'건국의 3영수' 우사 김규식을 만나다
'건국의 3영수' 우사 김규식을 만나다
  • 김유혁 단국대 종신명예교수
  • 승인 2020.08.13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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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75주년 기획특집]
중앙청 앞에서 연설하고 있는 김규식 박사
중앙청 앞에서 연설하고 있는 김규식 박사

김규식(金奎植) 박사는 1881년 1월 27일(庚辰 2월 28일) 청풍김씨 후예인 아버지 金智性의 아들로 그의 고향인 강원도 洪川에서 태어났다. 김지성은 당시 잘 알려진 외교관이었으나 그의 상소문이 청국과의 마찰을 빚는 까닭이 되자, 김지성은 외지로 밀려나는 처지가 되어 동래부사 밑에서 일시 근무하게 되었다.

김규식도 아버지 따라 동래에서 잠깐 지내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름보다 먼저 따라붙은 칭호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김규식에게도 청풍인, 홍천인, 동래인 등이 이름과 아호 우사보다 훨씬 먼저 따라붙은 것들이다.

고향을 상념(想念)케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어떤 경우에도 씨족관념, 당파의식, 지역감정 등의 역기능을 유발시키는 폐단을 경화(硬化)시켜서는 안 된다. 따라서 특정 인물을 쇠사슬 없는 포위권에 가둬 두려는 것은 더 지양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역사 인물 중, 고향에서 영웅호걸로 성장했다는 이는 거의 없다. 그리움을 체념하고 보호와 의존 속에서 벗어나야만 보다 넓은 세상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홀로 설 수 있는 신념과 아울러 극한적 경지를 이겨낼 수 있는 극기력(克己力)을 지닐 수 있다. 울안에서는 스스로의 도심(道心)과 발상력(發想力)을 길러가기란 어려운 법이다.

필자가 김규식 박사를 처음 느끼게 된 것은 1944년 가을 경이었다. 당시 일제의 수탈과 징병 징용이 극성을 부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른바 공습 방공훈련을 위해 농촌에 이르기까지 등화관제를 단속하던 때였다.

학자형 정치인 김규식과의 만남

지방유지급 인사들이 우리 집 사랑방에 모여 무엇인가 귓속말 하듯이 서로 손을 잡고 마음을 다짐하는 듯이 보였다. 그 까닭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은 약 3년 뒤의 일이다. 그 귓속말의 내용은 김규식 박사로부터 전해온 밀전(密傳:내용은 중학교 건립 위한 기성회 준비)였다고 한다. 그밖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다. 그것이 밀정에게 전해져 미행을 당하게 되자 나의 아버지는 행방을 감췄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3년간의 세월이 필자에게는 비애와 고통과 고독의 역경이었다. 몇 주일 후면 중학교 입학원서를 학교에 내야 하는데 나에게는 갑자기 신원보증서가 첨부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담임선생님에게 원서 제출해달라고 졸라댔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중학교 진학을 할 수 없었던 13세 아동 가슴에 멍이 들게 되었던 비애였다. 진학 못한 낙오감(落伍感)은 모든 것을 체념케 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고 달랠 수 없는 고독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동네 글방(書堂)을 찾게 된 것이 새로운 전기(轉機)를 찾게 되었다. 한문 선생님의 귀띔 한마디였다. 이퇴계는 생후 7개월만에 아버지 잃고 홀어머니의 한마디, 너는 과부 자식 소리 안 듣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열배 더 노력하라는 그 한마디가 그 어머니의 평생 교훈이었다고 한다.

서당에 나와 중학교 진학 못한 한풀이를 한문 공부로 해보라는 것이었다. 눈과 귀에 독기를 품은 듯이 더 많이 보고 읽고, 더 많이 듣기 위해 열정 쏟기를 3년간 쉬지 않았다.

열기와 열정을 열독(熱의 毒氣)으로 바꿔 지닌 셈이다. 여인이 원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언과 같이, 나는 가을 독사가 독을 품듯이 3년간에 소학 5권을 포함하여 사서(四書:대학, 논어, 맹자, 중용) 총 16권을 통독하고 권송(卷誦)을 다 해냈다.

아울러 당시(唐詩)와 연주시(聯珠詩) 외에 고문진보(古文眞寶)와 우리나라 조선시대 왕조약사를 시(詩)로 엮은 해동죽지(海東竹枝), 조선조 500여 년에 걸친 왕조별 비하인드 스토리(大東奇聞)을 섭렵하고 나서 17세가 돼 뒤늦게 중학교에 진학했다. 남의 말귀를 가려 들을 줄 알 만큼 됐던 것 같다. 중학교에 들어간 뒤 김규식 박사를 마음에서 다시 만나보게 된 것이다.

김규식 박사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한 뒤 동년 11월 23일 임시정부요인 제1진으로 귀국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김규식 박사 일행을 환영하는 국민적인 열광이 대단했다.

필자도 신문의 보도사진을 접하고 그분의 용안을 처음으로 확인했고 그분의 기사를 탐독하면서 김규식 박사의 위인상(偉人像)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이어 이승만 박사, 김규식 박사, 김구 선생을 건국 초기에는 우리나라의 3영수라고 일컬었다.

구미외교위원부 시절의 이승만 박사(좌)와 김규식 박사(우)
구미외교위원부 시절의 이승만 박사(좌)와 김규식 박사(우)

이승만 박사는 대미외교 독립운동가였고, 김규식 박사는 다변외교(多邊外交) 독립운동가였으며, 김구 선생은 항일투쟁을 위한 투사육성 독립운동가였다.

특히 김규식 박사를 일컬어 학자형 정치인이라고 하거니와 그분의 역량은 가히 헤아리기 어렵다. 그분은 조실부모하고 어린 때에는 병약하여 회생 가망이 없다 하여 병풍 뒤에 버려지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이가 당시 미국의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Underwood: 元杜尤)였다. 네살 전후로 추정되는 병약한 어린이가 울면서 벽의 종이를 빨아먹는 것을 보고 이 아이는 죽지 않는다며 스스로 경영하는 고아원으로 데려갔다. 그 아이는 자라면서 남들보다 영특했고 영어 습득 능력이 뛰어났다. 언더우드 부인은 특히 그 아이를 귀여워했다고 한다. 그것이 김규식이 어렸을 때의 편모(片貌)였다.

김규식은 1897년 가을 불과 16세에 미국 유학 길에 오르게 된다. 곧바로 미국 동부지역에 있는 로녹대학(Roanoke College) 예과에 등록했다. 다음 해인 1898년 6월 예과 졸업 시에는 준 우등생으로 선발되었다.

동년에 학부 문과대학에 진학했다. 이어 1900년 6월경 열린 강연대회에서는 1등을 수상했고 1902년 1월에는 전교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그의 연설문은 2월호 잡지에 실렸다.(제목:동방의 서광: The Daun in East)

그 연설문은 하나의 시(詩)와 같이 아름다운 글이었다는 중평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김규식이 참으로 우수했다는 것은 학문 활동에서 뿐만 아니라 졸업성적도 당시 최고득점자의 성적이 평균 92.13점이었는데 김규식은 91.67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4년간 통산 평균 성적은 92.16점이었다. 따라서 졸업식전에서의 대표연설은 김규식이 하기로 추천되어 다시 한번 그의 명성이 워싱턴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그즈음 김규식은 구름 타고 하늘에 오르는 희열을, 도리어 통렬히 반성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엄숙한 시간을 자주 지니게 되었다고 스스로 술회하고 있다. 이 점이 김규식이 지니는 위인상(偉人像)의 소지(素地)를 귀띔해주는 DNA가 아닌가 싶다. 동양의 현철인(賢哲人)들은 일일삼성(一日三省)을 통하여 주역 건괘(乾卦)에서 말하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을 수신(修身)철학으로 삼았던 것을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일깨워준다.

김규식은 자성(自省) 시간을 지닐 적마다 “물을 마실 때마다 샘을 판 이의 노고를 잊지 말자는 속언(俗諺)”을 잊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미리 말해두거니와 김규식 박사가 자신의 아호를 우사(尤史)라 한 것은 언더우드의 은덕을 잊을 수 없다는 뜻에서 언더우드의 한자 이름(元杜尤)의 끝자를 따서 우사(尤史)로 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규식은 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1세에 아버지마저 잃는 고독(孤獨)감에 잠겨 때로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집을 나가 방황했던 일과, 누구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다는 허전함에 휩싸이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더욱이 가정이라는 포근함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정서상의 삭막함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그와 같은 울적한 감정에 둘러싸이다 보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또는 사회적으로 폭발하기 쉽다.

김규식은 그런 충동을 느끼게 될 때마다 ‘로녹강’이 흐르는 전원도시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옛 고향처럼 상기하면서 스스로를 달래고 작은 규모의 로녹 캠퍼스를 더없이 좋은 안식처처럼 돌려 생각하자는 혼자 말을 되뇌고는 했다 한다.

따라서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사고전환과 사기종인(舍己從人)하는 겸허의식과 그리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먼저 들을 다음에 판단을 보다 공평히 하는 태도를 익혀야 한다는 겸청제명(兼聽齊明)의 방법을 고려하는, 이른바 신언근신(愼言謹身)하는 습관혁명 이야기를 자주 내비추기도 했었던 모양이다.

근세사 연구 및 독립운동사와 독도연구에 거의 독보적인 고 최서면(崔書勉) 박사는 이 사람이 청풍인이라 해서 우사 김규식 박사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비교적 자주 들려주곤 했다. 그는 말해 줬다.

김규식 박사는 중국 중경 등지에 오래 머물면서 독립운동에 관련된 많은 회의를 주재하고는 했다고 한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회의를 주재해도 동일한 주어, 유사한 문귀, 거듭되는 기조문을 사용하는 사례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김규식 박사의 폭넓은 경험과 해박한 지식을 귀띔해줬다.

김규식 박사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처음에는 언더우드 선교사를 도와 새문안교회에서 종교사업을 통하여 동포 계몽운동에 힘썼으나 105인 사건(기독교지도자 구속사건)을 조작하여 일제의 압박이 가해오자 신변 위험을 피해 국외로 탈출하게 되었다고 우사의 비서였던 송남헌 씨는 전해줬다.

청풍인 우사 김규식의 비하인드 스토리

김규식 박사는 해외 활동을 하면서 우선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타르(일명 庫輪)에서 일제와 맞서 무장투쟁을 하기 위한 무관학교를 설립할 계획이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후 파리에서 개최되는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활동을 했다.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 박사와 만나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개설하고 외교 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돌아왔다.

곧바로 모스크바에서 ‘동방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리게 되자 김규식 박사는 52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동 대회에 참석했다. 동 대회에서는 김규식 박사가 부회장으로 피선되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활동을 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당시에 김규식 박사는 임시정부의 학무총장, 외무총장을 역임하면서도 상해 남경 성도 등 주요 도시 소재 대학에서 셰익스피어와 영문법과 중국 고전 문학작품을 영어로 강의를 하면서 독립자금 모금에 심혈을 경주했다.

1940년부터는 임시정부의 부주석(副主席)에 취임하여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필자는 1980년대 중반기에 김규식 박사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김규식 박사의 영애가 미국에 거주 중인데 서울에 온다는 것이다.

우사 선생이 사랑하는 여식이라 하여 아름도 우애(尤愛)라 명명했다고 한다. 우(尤)는 우사의 우(尤)이기도 하지만 그 글자는 ‘더욱’이라는 뜻을 지니는 바, 우애는 몹시 사랑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망명 생활로 가족과 많은 세월을 헤어져 있게 되자 아버지의 두터운 사랑의 마음을 이름으로 지어준 것이다.

우애 씨는 나보다 여섯 살이나 위라서 나는 그녀를 누님이라 부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김규식 박사의 역작인 양자강의 유경(揚子江의 幽景)인 장편시집(長篇詩集:5章600餘節)이었다. 그것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문풍(文風)이 느껴지고 주선(酒仙) 이태백과 시성(詩聖) 두자미(杜子美)의 시귀가 여기저기에 등장한다.

더 감동을 주는 것은 그 말미에 “이 장편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준 고마운 연합군 장병의 고귀한 희생과 위대한 승전을 위해 여러분에게 바친다”고 했다. 김규식 박사의 사려 깊고 금도(襟度) 넓은 기개(氣槪) 앞에 절로 고개 숙여진다.

또 다른 하나는 김규식 박사가 영어교육을 했던 교재가 상해 복단대학(復旦大學)의 별도 서가에 보존 중이라는 것을 듣고 복단대학에 두 번이나 찾아가 총장 및 노교수 몇 분에게 탐문해봤으나 찾아내지 못했다. 교재를 찾아낸다면 그것을 김규식 박사의 수택본(手澤本)으로 영구 보존하려 했지만 아쉬움을 느낄 뿐이다.

그밖에 몽골에서는 김규식 박사가 미국의 자회사인 메이요 지사장으로 있던 사옥(社屋)을 발견하여 감회가 깊었다. 그 유허(遺墟)를 방몽 한국인에게라도 알려주기 위해 한한문으로 대자보를 써서 붙여 놨다.

몽골인들은 무엇인지 몰라서인지 수년간 지나도록 그대로 붙어 있었다. 아울러 김규식 박사의 사촌매제인 이태준(李泰俊)이 몽골 중학교 최초의 교의(校醫)와 황실 전문의사였던 것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김규식 박사가 6·25 당시 납북되어 서거한 이후 그의 묘소조차 알 수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다행히 2000년 11월 초 북한 방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목적은 고려 고종왕 시대로 올라가 네 번째 왕자인 국학대사가 세운 국청사 (國淸寺) 복원 문제로 일본인 2명, 한국인 학자 3명, 천태종 승려 2명이 일단이 되어 본인이 단장으로서 방북했다.

북한에서 김규식 묘약을 참배하다 

일방적인 일정과 일방적인 의제로 일방적인 돈의 요구를 해 왔다. 국청사 복원의 돈이 문제라면 그 문제는 수월하게 풀어갈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우리 측 요구를 제시했다. 그것은 국청사 옛터가 있는 개성지역 일대를 제한적으로나마 자유통행 도로를 개설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도자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면서 난색을 표하더니 느닷없이 이틀 뒤 북경행 고려항공편에는 좌석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돈에 대한 답변이 나올 때까지 억류한다는 속셈임이 뻔했다. 나는 그 순간 김규식 박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몇 년전 몽골 정부의 친지인 고위직 인사에게 북한에 가면 남한 인사에 관계되는 책을 구해 달라는 요청을 통해 구한 책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위대한 4월의 대화’였다. 김규식, 김구, 김일성 세 사람의 대화 기록이다. 아마도 애국열사묘역에 가면 김규식 박사의 묘석도 있으려니 하는 막연한 생각에서 “나는 귀국하기 전에 애국열사묘역에 참배하고 싶다”했다. 일행들은 모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 측 사람들은 은연중 반기는 눈치였다. 내가 대표로 다녀온다고 일행과 헤어졌다.

나의 1주일간 동행해준 북 사회과학원 부원장(金世民)과 나에게 배차해 준 벤츠 차(영빈용 벤츠 2차뿐이라 함) 기사와 셋이 묘역으로 갔다. 묘역 안내인은 약 40세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그곳에서는 안내인이라 않고 ‘520 애국열사묘 강사’라 한다. 그 여인은 묘소 1기마다 앞에 서면 30분 이상 열사 강의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김규식 선생의 조카(족질)되는 김유혁입니다, 여기 오면 김규식 선생을 뵐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고 했더니 그녀는 자기 혼자 박수를 보내며 “잘 오셨습니다. 우리가 잘 모시고 있습니다”라며 요즈음 날씨가 쌀쌀해서 참배객이 없는데 오늘 중앙당에 보고할 자료가 생겼다며 반겨줬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가보니 묘역 중앙통로 제1열 좌측 3번째 자리에 <김규식 선생 애국지사-1880년 12월 28일생, 1950년 12월 10일 서거>라 각명되어 있었다.

희불자승(喜不自勝)이라는 용어는 이럴 때 쓰이는 것 같았다.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북한까지 방문하여 520인 애국열사 묘역에 찾아가 김규식 박사의 묘역비와 존영까지 촬영해갈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이러한 김규식 박사의 관련 자료를 충분히 수집한 다음 우사연구회를 발족하려는 것이 당초의 계획이었다. 양자강의 유경은 그 원본을 단국대학 영미문화연구소에 의뢰하고 최종 감수는 미국인 레이놀드 교수에게 받아 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그것을 대학교재 전문출판을 하는 법경출판사와 예약을 해 놓고 필자는 해외출장길에 올랐다. 그동안을 참지 못하고 비학계인(非學界人) 일부 종인들이 졸속 추진한 결과 오늘의 현실처럼 우사연구사업이 명실 없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김규식의 통일론 ‘분단불가, 분열불가론’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위인을 씨족 관념 속에서 풀어드리지 않으면 안타까움의 여한을 달랠 길이 없어진다. 다행히 <미래한국>이 김규식 박사를 재조명하는 기회를 마련했다는 것을 거듭 감사하게 여기는 바이다.

끝으로 한마디 부언할 것은 김규식 박사의 통일론에 관해서도 한마디 하라면 필자의 전문분야는 아니나 요약한다면 그의 기조는 ‘분단불가, 분열불가론(分斷不可 分裂不可論)’이다. 국토가 분단되면 결국 민족분열의 불행을 자초하게 되고, 민족분열이 되면 국토가 불가불 분단된다. 분단과 분열의 불가론은 잘 연계지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분단불가론의 기조는 국토를 하나로 보존하면서(헌법의 정신과 같이) 공산분자는 우리의 울 안에서 교화 흡수하거나 척결하는 양면정책으로 풀어간다는 것이 그분의 기조라고 이해한다. 국토는 물건 개념의 것이기 때문에 분단이 가능하지만 민족은 개념상 선천적 생존체이기 때문에 분단될 수 없다. 따라서 분열의 비운이 불가피한 것이다. 분열이란 나눌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보자기를 찢어야 나눠지는 것처럼 분열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 겨레의 경우 실향민 또는 탈북민의 경우 모두가 고향을 잃고 혈육과 생이별을 하여 뼈아프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경우 실향은 했지만 제2의 고향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산가족의 경우 제2 아버지 제2 어머니라는 혈족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이산가족에게는 70년의 통한이 현재까지 이어가는 것이다.

그간 성급한 사람들은 김규식 박사의 통일론의 기조를 화이동류(和而同流)하듯이 심고원려(審考遠慮) 없이 고함박성(高喊拍聲)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을 드러냈던 경우가 없지 않아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보다 전문적인 분들에 의해 좀 더 깊이 연구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미래한국) 

김유혁 단국대 종신명예교수

와세다대 사회공학 박사
단국대 부총장
안중근의사기념관장
새마을운동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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