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출간된 『시선은 권력이다』 증보판 『메타버스 시대에도 시선은 권력이다』가 최근 출간(출판사 기파랑, 박정자 지음)됐다.
시선과 권력의 연결 방식(판옵티콘)을 통해 젊은 독자들의 권력 인지 감수성과 사유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화제의 책으로, 직관적인 디자인과 핑크의 감각적인 색채로 리커버했다.
판옵티콘(Panopticon)은 라틴어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다는 뜻이다. 18세기 영국의 계몽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구상한 감옥 건물 설계도의 이름으로 ‘시선이 곧 권력’이라는 명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름에 걸맞게 건물 가운데 있는 망루에서 간수 한 사람이 반지 모양의 원형 건물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감시한다.
죄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간수에게 완전히 노출돼 있다. 하지만 죄수들은 중앙 망루에 있는 간수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망루가 어둡기 때문에 거기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언젠가 한 번 망루에 간수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24시간 내내 거기에 간수가 있거니 하고 짐작만 할 뿐. 여기에 감시 권력의 중요한 원리가 있다. 즉 감시자의 존재는 편재(遍在)하되 확인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메타버스 시대의 시선과 권력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벤담의 판옵티콘은 오늘날의 전자 감시 체제에 비하면 애교에 불과하다. 도로 위, 주택가 골목 곳곳에 있는 CCTV는 현대판 판옵티콘.
CCTV 카메라 렌즈의 시선을 어렵사리 피한다 해도 당신은 여전히 판옵티콘 속에 갇혀있다. 무심코 주고받은 이메일, 휴대폰 앱에 저장된 쇼핑이나 검색 기록들, 단톡방에서 나눈 대화들, 해지된 은행거래 내역 등이 언젠가 당신을 옭아맬 판옵티콘들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온 국민이 식당이건, 병원이건 꼬박 QR 코드로 자기 동선을 국가에 신고하고 다니던 경험도 겪었다.
『시선은 권력이다』 초판이 나온 2008년만 해도 전자 판옵티콘은 고작해야 휴대폰이나 전자 사원증 정도였지만 14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천지개벽했다.
로봇이 심심찮게 눈에 띄고, 가상 인간이 모델계를 석권할 기세고, 사람들이 꼼짝 않고 집에만 있으면서 가상현실 속을 거닐게 될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 메타버스 시대의 도래가 예감되는 역동적인 순간이다.
『시선은 권력이다』는 시선의 이야기이면서 또한 권력의 이야기다. 푸코 철학 입문서이기도 하다. 다만 학자들이 흔히 난해하고 어렵게 집필해 일반 독자들의 접근이 쉽지 않았던 주제를 문학 영화 등의 장면을 빌어 쉽게 풀어 놓았다.
평이한 글쓰기로 대중의 접근성을 높여 저자 특유의 세밀한 감수성과 함께 날카로운 이성의 시선이 담겨 있다. 덕분에 20세기 후반기 철학계를 석권했던 푸코의 어려운 담론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다.
저자인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에서 석·박사를 했다. 박사논문은 “비실재 미학으로의 회귀: 사르트르의 『집안의 백치』를 중심으로”이다. 상명대학교에서 사범대학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많은 팔로워들이 좋아하는 페이스북 필자이기도 하다. 그는 소비의 문제, 계급 상승의 문제, 권력의 문제, 일상성의 문제 등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한 일련의 책들을 썼다.
저서로 『빈센트의 구두』 『시선은 권력이다』 『이것은 Apple이 아니다』『마네 그림에서 찾은 13개 퍼즐 조각』 『시뮬라크르의 시대』 『잉여의 미학』 『눈과 손, 그리고 햅틱』 『이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건 빵집 주인의 이기심 덕분이다』(대만에서 『在麵包店學資本主義: 從人文角度看數位時代資本家, 勞動者的改變』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다시읽기』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사르트르의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변증법적 이성비판』(공역), 푸코의 『성은 억압되었는가?』 『비정상인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만화로 읽는 푸코』 『푸코의 전기』 『광기의 역사 30년 후』, 앙리 르페브르의 『현대 세계의 일상성』, 앙드레 글뤽스만의 『사상의 거장들』, 레이몽 아롱 대담집 『자유주의자 레이몽 아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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