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발굴 특집] 후크 고지의 영웅들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6·25 발굴 특집] 후크 고지의 영웅들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 길도형  도서출판 장수하늘소 대표
  • 승인 2021.06.2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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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여 전, 한 페친으로부터 출판 제안이 들어왔다. 제안한 페친은 영국 교포 김용필 씨였다.

당연히 영국에서 출판된 책의 한국어판 출판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번역 출판해야 할 책은 영국에서 공식 출판된 적이 없는 6·25 참전 한 노병의 수기 프린트물이었다. 김용필 씨가 수기 내용을 대략적으로 소개하고, 또한 수기의 작성 동기 등을 알게 되면서 출판을 결정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출판 결정과 함께 영국에서 PDF 파일이 메일을 통해 날아왔다. 그로부터 1년 6개월여에 걸친 번역과 편집의 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번역자 섭외에 어려움을 겪던 끝에 이승만학당 정광제(松山) 씨가 흔쾌히 번역을 맡아 줬다. 번역에서의 난맥상은 원고의 거친 문장과 익숙지 않은 표현들이 역자와 편집자들을 괴롭혔다. 그래서 초벌 번역이 끝나고 출판을 제안한 김용필 씨가 긴급 투입됐다.

번역 전반을 검수하고 북부 잉글랜드 지방의 정서와 언어 습관 등이 살아 있는 문장으로 다듬어졌다. 그렇게 1년 6개월여의 장정이 끝나고, 2021년 5월 12일 <후크고지의 영웅들>(부제 : 6·25 참전 영국 노병들의 수기)이 제작 공정을 끝내고 한국에서 가장 먼저 출판됐다. 

<후크고지의 영웅들>은 6·25전쟁 당시 유엔군의 일원이자 영연방군의 일원으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해 공산 침략 세력을 물리치고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낸 영국군 장병들의 수기를 묶은 책이다. 17~20세 나이의 청년(청소년)들이 징병 병사로 참전해 삶과 죽음, 긴장과 공포, 피로와 휴식 등 전장에서 겪어야 했던 일상들이 담담하게 그려졌다.

'후크고지의 영웅들'은 sns를 통해 네티즌들이 책 구매 인증 릴레이를 펼치면서 더 알려지고 있다./페이스북
'후크고지의 영웅들'은 sns를 통해 네티즌들이 책 구매 인증 릴레이를 펼치면서 더 알려지고 있다./페이스북

가축운반선에 실려 한국까지 오는 데만 무려 한달 보름

전장의 병사들을 지휘, 관리해야 하는 부사관부터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여단장에 이르기까지 전투에 임하는 영국군 지휘관들의 절제와 솔선수범, 불굴의 리더십도 엿볼 수 있다. 특히 앞에서도 말했지만 영국에서 공식 출판된 적 없는 원문을 직접 받아 번역, 한국에서 가장 먼저 펴내는 첫 공식 출판물이란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영국군에게 한국전쟁은 영국 사우스햄튼 항구를 떠나면서부터 시작한다. 지금도 인천공항에서 영국까지는 비행기로 가더라도 12시간이 족히 걸린다.

1950년 7월 영국군은 장장 한달 보름간에 걸쳐 한국 부산항에 도착했다. ‘후크고지전투’ 참전용사들이 전하는 한국까지의 여정은 그 자체가 또 다른 전쟁이었다.

영국에서 출발한 수송선, 말이 수송선이지 가축운반선을 개조한 선박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고작 5년 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라 영국도 여객선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지브롤터 해협과 지중해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통과했다.

그리고 열대의 인도양을 가로질러 싱가포르와 홍콩을 거쳐 일본 구레항에 도착했다. 바로 부산에 온 것이 아니다. 구레항에서 작은 배로 갈아타고 꼬박 24시간이 걸려 부산에 왔다. 그리고 부산에서는 좌석도 변변치 않은 화차에 실려 또 다시 26시간이 걸려 최전방 전선에 내린 것이다. 

책에서는 ‘독천역’에 내렸다고 하는데 현재 독천역은 덕정역이거나 아니면 동두천역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렇게 10대 후반의 영국군은 한국 임진강 전선에 도착했다. 

후크고지는 임진강 북단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 사미천 좌측 군사분계선을 끼고 형성된 해발 200미터 남짓한, 서북에서 동남으로 비스듬하게 걸쳐 있는 능선 고지이다. 지형이 후크(hook)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후크고지전투는 1952년 10월부터 1953년 휴전 직전까지 미군과 영연방군이 4차에 걸쳐 중공군과 격전 끝에 사수함으로써 임진강 북단의 연천군 장남면, 백학면, 미산면, 왕징면 일대를 대한민국 영토로 귀속시킨 위대한 전투이다.

그중에서도 2차 후크고지전투를 통해 고지를 사수한 블랙와치 연대의 뒤를 이어 1952년 11월 후크고지로 투입된 듀크 오브 웰링턴 연대는 1953년 5월 28일, 50시간여에 걸친 포격과 참호 육박전 혈투 끝에 중공군을 물리치고 고지를 사수했다. 이 전투를 두고 ‘사미천전투’로도 부르나, 해당 전투가 영연방 사단이 주역이고 그들이 후크고지라 부른 만큼 공식 명칭을 후크고지전투로 부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후크고지의 영웅들' 저자인 케넷 켈트 옹
'후크고지의 영웅들' 저자인 케넷 켈트 옹./라미 현(현효제) 사진작가

4회에 걸친 후크고지전투는 1953년 4월 28일 중공군 1개 사단의 총공세 속에 벌어진 3차 전투가 가장 치열했고, 듀크 연대 측에서도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했다. 그 체험과 목격담이 수기 곳곳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후크고지의 영웅들>을 통해 후크고지전투의 사실관계가 위키백과 등을 통해 상당 부분 잘못 전달되고 있음을 당시 참전 노병들의 수기가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단적으로 미 해병 1사단 1대대장으로 기재된 데이비드 로즈 중령은 영국군 블랙와치 연대 1대대장이었음을 참전 노병들이 생생히 증언한다. 이 책을 통해 후크고지전투 관련 사실관계들이 바로잡히고, 공식 출판 백과사전류에도 등재되기를 기대한다.

이 책을 통해 6·25전쟁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전선과 동남아 싱가포르, 버마 전선 등에서 전투를 치른 영국 예비역들도 동원되어 참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증언을 통해 3차 후크고지전투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격렬했던 여러 전투들 이상으로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후크고지가 있는 연천군 장남면 일대에는 영국군과 영연방군의 전적을 확인할 수 있는 손바닥만 한 비석 하나 확인되지 않는다. 

케네스 켈드 옹은 1934년생이다. 켈드 옹은 1952년 4월 17일 징집 영장을 받고 18세 나이로 그린 하워즈 연대에 신병 입대했다. 6주간의 신병 기초군사훈련과 10주간의 추가 훈련을 받고 듀크 오브 웰링턴 연대(이하 듀크 연대)로 전출 배속되어 1952년 12월 하순경 햇수로 3년째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6·25전쟁의 최전선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한 달여의 항해 끝에 일본 구레 기지에 도착, 전선으로 출발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뒤 다시 일본의 수송선을 타고 24시간 만에 부산항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가축 수송용 열차를 타고 26시간을 달려 독촌역에 도착한 뒤 임진강 북단의 듀크 연대 주둔지로 이동한다.

후크고지전투 참전 용사들./라미 현(현효제) 사진작가
후크고지전투 참전 용사들./라미 현(현효제) 사진작가

포격전, 참호 육박전이 난무했던 3차 후크고지전투

1953년 2월 중순 듀크 연대의 D중대에 배속된 켈드 이등병은 앞서 후크고지를 사수하고 있던 블랙와치(Black watch) 1대대가 예비대로 빠진 자리로 투입된다.

투입과 동시에 시작된 중공군의 공격에 맞서 분전한 켈드 이등병과 그 전우들의 이야기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11월 부산 유엔군묘지에서의 작별 참배 사열을 끝으로 한국을 떠나 영국령 지브롤터에 머물며 징집병으로서의 나머지 복무 기간을 마치고 이듬해 1월 전역하기까지의 과정이 제1부 ‘한국전쟁과 나’에 실려 있다.

이 책은 6·25전쟁 당시 처절했던 후크고지전투에 대한 사료로서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크고지전투는 1차에서 4차까지의 큰 전투가 있었다. 1952년 11월초에 벌어진 2차 후크고지전투에서 중공군과 격전을 치른 블랙와치가 예비대로 물러나고 11월 중순 그 자리에 마침내 웰링턴 공작의 워털루전투 전통에 빛나는 듀크 연대가 투입된다. 

중공군의 크고 작은 도발에 맞서 싸우며 한국에서의 혹독한 겨울을 보낸 듀크는 1953년 5월 28일부터 중공군의 총공세에 맞서 엄청난 포격전에 이은 처절한 참호 육박전을 벌인다. 펀치볼전투와 백마고지전투, 백암산-949고지전투는 고지전 하면 한국인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6·25 백병전의 현장이다. 중공군 1개 사단에 맞서 듀크 연대가 감당해 낸 3차 후크고지전투도 그에 못지않았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앞에서 요약했듯 이 책의 메인 필자인 켈드 옹의 참전 수기로, 자신이 직접 치른 3차 후크고지전투와 그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2부는 이등병 소총수부터 선임하사,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포병대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스물두 분의 참전 노병들의 수기가 실려 있다.

듀크 연대 장병들의 수기가 주를 이루고 더함 경보병 연대, 에섹스 연대, 킹스 경보병 연대, 노스 스태포드셔 연대, 로얄 노섬버랜드 푸실리에스 연대, 왕립포병연대 출신 노병에 이르기까지 당시 영국군의 주력이 대거 6·25전쟁에 참전했음을 알 수 있다.

부산항에 도착한 영국군을 환영하는 미군 군악대의 ‘St. Louis Blues March’를 들으며 임진강 전선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고, 전투가 소강 상태로 접어든 짬에 간이 Pub에서 ‘I went to your wedding’을 즐겨 부르던 전우의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된 이야기, 참호 안으로 들어온 뱀을 스텐 기관단총 탄창이 다 빌 때까지 쐈으나 한 발도 맞추지 못한 이야기, 버려진 쥐가 먹은 초코바를 수색 정찰을 나갔다 온 병사가 멋도 모르고 주워 먹은 이야기 등 이 책에는 전장의 군인들이 전투와 수색 정찰, 진지 작업, 중공군 포로수용소에서의 포로 생활 이야기 등이 실감 나게 담겨 있다.

3부에 실린 참전용사 아내가 쓴 수기는 또 다른 의미에서 각별하게 다가온다. 신생 독립국이자 세계 최빈국의 국민이었던 우리가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던 나라 영국도 대단히 힘든 시기였다. 그들도 2차 세계대전의 참담했던 현실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었다.

영국군 주요 전투지역 위치/구글 캡쳐
영국군 주요 전투지역 위치/구글 캡쳐

그들도 힘든 시기였다. 그런데도 6·25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함도 아니었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남편이 다시 동원 명령을 받고 한국으로 떠나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보며 아직 걸음걸이도 서툰 두 아이를 키워야 했던 한 젊은 아내의 이야기는 우리가 쉽사리 느껴 보지 못한 또 다른 전쟁의 기록이다.

후크고지에서 숨져간 영국의 젊은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조그마한 승전기념비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가칭 ‘후크고지전투 전적기념비 건립추진사업’이다. 페이스북에 그룹을 만들고 그 취지를 알렸다. 그러자 영국 BBC코리아에서 관심을 갖고 공역자(共譯者) 중 한사람인 김용필 씨와 인터뷰했다.

‘후크고지 영웅들’ 책이 출간되자 많은 네티즌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독후감을 올렸다. 그렇게 알음알음 책이 알려지고 이제 곧 2쇄가 인쇄에 들어갈 예정이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10대 후반의 영국군들이 이 땅을 피로 지킨 것이 널리 알려지기를 소원한다. 

끝으로 이 책을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모든 영국군 참전용사들에게 바칩니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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