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성계 파탄의 주역, 송두율은 누구인가
한국 지성계 파탄의 주역, 송두율은 누구인가
  • 미래한국
  • 승인 2009.07.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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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를 위협하는 사람들 ②
▲ 간첩활동 혐의로 국가보안법 위반 조사를 받고 있는 송두율 씨가 2003년 10월 6일 서울지검에 재소환되고 있다. 송 씨는 기자들의 질문에 고개를 숙인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송두율의 약력
1967년 서울대 철학과 졸업
1972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대 대학원 철학 박사
1973년 평양방문, 북한 노동당 가입, 이후 19차례 북한 방문
1974년 재독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초대의장
1982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과 교수
1991년 북한 사회과학원 초청,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
1994년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 교수, 김일성 장례식 참석 위해 북한 방문
1995년 베이징에서 남한/북조선 학술회의 주도
2000년 늦봄통일상 수상
2003년 한국 귀국,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1심, 7년 징역형 선고·항소심,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선고


김광동 나라정책원장

철학분야에 권위가 있다는 독일의 철학교수이자 한국 사회에서 ‘세계적 석학’으로 평가받아온 송두율은 한국 사상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다. 1980년대 후반 이래로 송두율은 리영희, 한완상, 백낙청, 강만길 김세균, 서중석 등과 함께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의 혼을 빼앗고 이념적 왜곡을 형성시키며 한국 지성계를 석권하다시피 했다. 특히 송두율은 한국의 주요 언론에 가장 잘나가던 칼럼니스트이기도 했다. ‘한겨레’는 물론이고 ‘시사저널’ ‘내일신문’의 주된 기고가이기도 했고 ‘역사비평’ ‘한겨레21’ ‘창작과 비평’을 위시해 ‘신동아’ ‘사회와 사상’ ‘민족예술’ ‘참여사회’ 등 수많은 잡지와 ‘관악’ 등 대학신문의 필진으로 활약했다.

송두율의 저서 <현대와 사상>(한길사, 1990),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한겨레신문사, 2000), <계몽과 해방>(한길사, 1988), <소련과 중국>(한길사, 1990) 등은 한국에서 출판돼 애독됐고 1991년부터 한국 최고 대학이라는 서울대 조차 그의 강의를 개설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었다. 그만큼 그가 남긴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분석틀과 북한체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DNA처럼 넓고도 깊게 각인돼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김대중정부에 이어 노무현정부가 출범한 이후인 2003년 송두율이 한국사회에 일시 귀국했을 때 그에 대한 신드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정연주 사장이 재직하던 KBS 등을 선두로 한국 방송들은 그의 일생을 미화하는 특별프로그램과 기획보도를 앞 다퉈 만들어 방송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조차도 국회 국정연설에 나가 특별히 시간을 할애해가며 특정인 송두율 교수를 거론하고 이제 우리 사회가 그를 포용하자고 역설했을 정도였다.

반정부투쟁 청년과 뉴레프트의 만남

전남대 교수의 아들로 성장했던 송두율이 본격적으로 한국사회의 구체적 사건과 맞닥뜨리며 그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했던 것은 그가 서울대 철학과 대학생 때인 1965년 한일수교 반대투쟁에서였다. 독일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한·일수교반대투쟁을 통해 대한민국과 정부에 대한 저항의식을 싹틔웠고 그 이후로는 일관되게 대한민국에 대한 비판자 입장에 섰다.

극도의 고립을 극복하고 사회경제적 발전을 위해 추진된 일본과의 수교를 결사반대하던 인식을 안고 있던 송두율은 결국 1967년 독일로 건너갔고 당시 유럽 전역에서 학문적 경향으로 불어 닥치던 친 뉴레프트(New Left)의 물결에 자신의 몸을 내맡겼다.

독일로 건너간 그는 당시 신좌파운동의 거두이자 이론가인 하버마스(Habermas)의 지도 학생이 되었고 1972년에 쓴 그의 박사논문은 헤겔과 마르크스 그리고 베버를 비교 연구한 것이었다. 그 후 10년 뒤인 1982년 그가 사회주의이론을 기반으로 교수자격논문을 제출했을 때 쓴 논문은 바로 중국과 소련의 농민, 노동자 및 지식인을 비교하는 연구였다. 그리고는 줄곧 그는 ‘사회주의(공산주의)’체제의 완성을 위해 살았고 신분상으로는 독일 뮌스터대에서 가끔씩 강의를 하는 교수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게 한국은 잘못된 길을 가는 잘못된 사회다. 한국은 여전히 민주화가 되지 않은 나라이자 ‘파시즘적 특성’을 갖는 사회일 뿐만 아니라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 중첩된 사회이기 때문에 북한의 이념체계에 맞춰 민족모순을 해결하면서 계급모순을 해결해가야 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평가받는 한국의 경제성장 모델에 대해서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업재해율’과 ‘세계에서 가장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의 결과일 뿐이며 ‘노동조합을 조직할 권리까지도 제한된 노동’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에 단지 ‘비인간적 모델’일 뿐이라고 단언해왔다.

필생의 과업 : 반미투쟁

송두율을 특징짓는 가장 큰 성격 중의 하나는 반미투쟁이다. 반미투쟁은 사회주의에 대한 헌신과 함께 그의 일생의 과업이자 주제였다.

예를 들면 북한 황해도 신천군에 가면 김일성체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날조하여 만들어놓은 ‘미군학살박물관’이 있다. 그 기념관은 쿠바 등 전세계 반미투쟁가들의 ‘성지’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 학살기념관을 둘러보면 한국전쟁 때 미군이 북한주민을 너무도 끔찍하고 집단 살육하는 각종 모습을 전시해가며 반미투쟁을 선동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면 누구든지 ‘미 제국주의자와 싸우다 죽겠다’는 각오를 하게 마련이다. 물론 6·25전쟁 때 미군 전투부대가 그 지역으로 지나간 적도 없고 단 한 건의 미군에 의한 학살이 있었던 적도 없었지만 북한은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당시 6·25 때 발생한 신천사건이란 공산주의자와 기독교세력간의 투쟁이자 공산주의자의 기독교도 학살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송두율은 한국전쟁(6·25) 때 황해도 신천에서 미군에 의한 수만 명의 대학살이 있었다고 근거 없는 사실을 반복하여 선전하고 나아가 “미군이 어린이들까지 방공호에 몰아넣고 불태워 죽였다”고 선전하고 다닌다.

송두율에겐 미국에 대한 투쟁만큼 고귀한 것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 대미투쟁이야말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제국주의와 직접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북한이나 쿠바는 여전히 공산당의 유일적 영도원칙을 계속 고수하고 있다”며 북한과 쿠바의 공산당 독재를 합리화하면서 북한, 쿠바 등이 펼치는 체제수호 투쟁이야말로 “외롭게 자기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계속이고 그것이 바로 “제3세계 지성의 위안”이 되고 있다고 극찬해왔다.

김일성·김정일 체제와 주체사상 찬양

송두율이 펼치는 반미투쟁의 또 다른 편에는 친북투쟁이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나라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옹호투쟁이 곧 그의 평생 프로젝트다. 특히 세계적 석학이자 철학자라는 송 교수는 김일성이 폐쇄적 공산전체주의체제를 구축하고 개인숭배체제를 확립시키기 위해 만든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찬양한다. 그는 주체사상을 ‘민족의 사상’이자 ‘통일의 사상’이고 각종 모순을 극복하는 사상이라고 평가한다. 그것이 소위 ‘독일 철학자’의 수준이고 이를 떠받드는 것이 ‘한국 사상계’의 수준이다.

송 교수는 북한의 주체철학을 언급하면서 그는 “근대가 모든 것을 하나로 규격화하는 것이라면 주체철학은 거기에 저항하고 다양성을 강조하는 탈근대적 철학체계라고 볼 수 있다”며 극찬하고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동시적 해결 과제가 북한 사회주의의 내재적 이념, 즉 ‘주체사상’으로 표현”되고 있기에 북한은 민족과 집단의 가치를 으뜸으로 삼는 철학체계를 세우고 있고 주체철학이란 “그런 정신을 하나의 철학으로 정립한 것”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주체철학이 북한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것이다. 철학과 학문에는 보편성을 기반으로 해야 함에도 송두율의 철학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전체주의를 전체주의자의 논리로 보자는 내재적 방법론

북한의 공산전체주의를 합리화해 온 송두율이 한국사회에 확산시킨 가장 큰 ‘업적’의 하나는 북한사회를 보편적 시각으로 보지 않고 북한 김일성-김정일의 시각으로 북한을 보도록 한 것이다. 소위 ‘내재적 접근법’(immanent approach)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논리로 북한을 보자는 내재적 논리는 한완상, 안병욱, 강정구, 이종석 등 소위 한국의 지성계와 북한연구자들에게 급속도로 확산돼 이제는 내재적 시각이 곧 보편시각이 되었을 정도다.

송두율이 말하는 내재적 시각이란 북한과 같은 사회는 사회주의국가이자 독특한 주체식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외부적 시각이나 보편적 시각을 가지고 볼 것이 아니라 ‘내재적 시각과 접근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송두율의 내재적 접근이란 곧 독재자의 시각으로 그 체제를 평가하자는 말과 전혀 다르지 않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시각에서 소련과 독일을 이해하자는 태도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다른 한편으론 김일성과 김정일의 개인숭배적 전체주의자의 시각으로 북한체제를 이해하고 접근하자는 것일 뿐이다. 그 자체가 객관성을 기반으로 한 학문의 포기이고 가치지향적 보편성과 비판정신을 포기하자는 선동일 뿐이다.

송두율이 북한의 공산전체주의와 김일성-김정일체제를 위해 복무한다는 사실은 공지의 사실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나라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옹호투쟁은 곧 그의 평생 프로젝트다. 이 투쟁이 북한으로부터 금전을 받고 하는 것인지 단지 ‘철학’적 신념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공로가 인정되었음인지 송두율은 북한으로부터 최상의 대우를 받았고 최소한 15만 달러 이상의 돈도 받았다. 그는 그렇게 가입이 어렵고 까다롭다는 조선노동당에 1973년에 가입할 수 있었고 1991년에는 김일성을 만나고 사진까지 함께 찍는 영광을 누렸다.(1991년 5월 25일자 노동신문 제1면) 그리고 몇 년 후인 1994년 김일성이 죽자 북한의 장례의전 서열상으로 볼 때 국가서열 22위의 위치에 있었다. 그만큼 그가 행한 역할이 중요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좌파세력의 옹호와 영웅화

그가 정기적으로 북한에 정보보고서를 작성해 보내고 돈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도 이미 다 밝혀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지의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지성계나 언론계는 여전히 그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일고의 반성도 변화도 보이고 있지 않다. 한국의 학계에서 송두율에 대한 학문적 차원의 평가는 진전된 것이 없다. 최근엔 침묵만 있을 뿐이다.

송두율을 찬양하고 영웅시했던 한국사회는 커다란 반성을 필요로 한다. 송두율은 미국을 저주하며 북한 공산전체주의체제를 찬양하는 데도 한국의 학계는 오히려 그런 송두율을 찬양해왔기 때문이다.

송두율은 친북·반미 내지 반대한민국과 김일성찬양을 위해 살 수 있었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학문의 길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출세와 생존을 동시에 보장하는 자기 직업이자 생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철학과 사회과학 인식론에 무비판적으로 휩쓸리는 한국사회다.

그것은 바로 한국 사회과학 및 철학의 빈곤을 말하는 것이자 지성계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보편가치에 대한 정립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 면에서 ‘세계적 지성이자 석학’이며 ‘민주화투쟁의 영웅’이라는 송두율을 극복하는 것은 곧 한국의 사회과학계와 지성계의 문제를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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