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신보수주의 대부 ‘어빙 크리스톨’ 타계
美 신보수주의 대부 ‘어빙 크리스톨’ 타계
  • 미래한국
  • 승인 2009.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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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수주의 정립해 美보수주의 줄기 바꾼 인물
▲ 어빙 크리스톨(Irving Kristol)

레이건·조지 W. 부시 행정부 국내외 정책 근간 마련

미국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의 대부로 유명한 어빙 크리스톨(Irving Kristol·사진)이 지난 9월 18일 8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어빙 크리스톨. 다소 생소한 이름일 수 있지만 그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미국의 국내외정책 방향을 좌지우지하던 유력잡지 위클리 스탠다드(Weekly Standard) 발행인인 윌리엄 크리스톨의 아버지로 부시 행정부 당시 유명했던 네오콘(neocon·신보수주의자)들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가 타계하자 워싱턴포스트 등 미 주요언론들은 ‘미국 신보수주의의 대부가 타계했다’며 그의 삶을 조명하는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그에 대한 평가 가운데 많이 인용되는 표현이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말이다.

부시 전 대통령은 2002년 7월 미국 민간인이 미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인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어빙 크리스톨에게 수여하면서 “20세기 말 일어난 미국 보수주의 르네상스의 지적 기초를 놓았다”고 칭송했다.

이 말처럼 어빙 크리스톨은 ‘신보수주의’를 정립하며 미국 보수주의의 줄기를 바꾼 인물이다.

크리스톨은 극단적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했다. 미국에서는 1930년대 대공황으로 불안정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마르크시즘, 공산주의, 나치즘이 부상했다. 1920년 뉴욕 브루클린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크리스톨도 이 분위기에 휩쓸려 그는 뉴욕시립대에 들어가 마르크시즘에 심취했고 스탈린과 함께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주도했던 트로츠키의 신봉자가 되었다.

하지만 20대 중반 보병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소련 스탈린의 만행을 보고 그는 반공주의자로 변신, 반공 성향의 리버럴(Liberal·진보) 잡지인 커멘터리(Commentary), 인카운터(Encounter), 더 리포터(The Reporter) 등에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썼고 한 반공단체에서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 어빙 크리스톨(좌)이 2002년 7월 조지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수여받고 있다

1950년대 미국에서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이 ‘미국 곳곳에 공산주의자들이 숨어 있다’며 이들을 색출해야 한다는 주장하 것에 대해 리버럴들이 마녀사냥이라며 반발할 때 크리스톨은 오히려 매카시 의원을 두둔해 같은 리버럴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크리스톨이 우파로 전향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60년대 미국에서 부상한 소위 ‘신 좌파(New Left)’들 때문이다. 이들이 유토피아적 이념을 받아들이면서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공격하자 20년 전 공산주의와 연합하자는 리버럴들과 똑같이 위협이라며 크리스톨을 포함, 뉴딜정책 지지자 등 전통적 리버럴들은 반발했고 이런 대응은 ‘새로운 보수주의’로 규정됐다. 이것이 나중에 ‘신보수주의’로 전개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보수주의는 미국 보수주의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자유(진보)주의(Liberalism)가 기원으로 ‘미국 자유주의의 우익 계열’(a right-wing branch of American liberalism)이라고 볼 수 있다.

크리스톨은 1965년 ‘신보수주의 산실’로 평가되는 잡지 ‘The Public Interest’를 창간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했다. 이 잡지는 신좌파에 대한 대응 뿐 아니라 1960년대 진행된 민주당의 린든 존스 대통령의 이른바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의 공공정책들이 효과적이었는지 평가하자는 취지도 중요한 창간 목적이었다.

수십 년 간 정부주도의 개혁정책에도 불구하고 사회 무질서와 도시폭력 증가 등 문제가 지속되자 과연 그 정책들이 효과적이었느냐는 것이다. 가령, 도시 내 가난 억지 프로그램의 실패는 정부가 증명되지 않은 이론에 의지했기 때문이고 소수민족차별정책은 정작 필요한 사람들은 도움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인종 간 긴장관계만 초래했다며 이렇게 된 것은 정부의 책임이라고 비판했다.

노만 포드호레츠, 팻 모니한 당시 중량급 리버럴들이 여기에 참여하면서 이 움직임은 주목을 받았다.

사회비평가인 마이클 해링톤(Harrington)이 1973년 이들을 ‘민주당의 지배적인 정치문화적 태도에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형태의 보수주의를 지향해가는 진보지식인들과 정치철학자들’로 ‘신보수주의자’라고 부르면서 ‘신보수주의’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다. 미 잡지 ‘에스콰이어’(Esquire)는 1979년 2월호 표지에 크리스톨 얼굴 사진과 함께 신보수주의를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새로운 정치세력’이라며 특집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크리스톨 자신은 ‘신보수주의자는 현실을 철저히 연구하는 리버럴(Liberal)’이라며 기존 리버럴들이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이상만 추구해왔다고 지적했다.

크리스톨은 잡지 ‘The Public Interest’에 어떤 공공정책에 대한 보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 그 분야에 대한 글을 쓰도록 했다. 공급측면 경제학, 복지와 교육개혁, 주택, 세금, 도시 재개발 등에 대한 글들이 게재되었고 이 내용들은 나중에 레이건 행정부의 보수적 정책들의 견고한 지적인 기초가 되었다.

그는 뉴욕의 기업들과 언론사, 워싱턴의 정책결정자, 보스턴의 학자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해 가령, 레이건 행정부 시절 채택되어 미국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한 공급경제학을 처음으로 다룬 책 ‘The Way the World Works’(著Jude Wanniski)이 나올 수 있도록 자금을 마련했다.

그는 또 기업인들에게 신좌파들에 의한 국민들의 세뇌를 막기 위해서는 보수 싱크탱크가 필요하다며 기부하라고 역설, 헤리티지 재단 등이 마련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크리스톨이 1970년대 놓은 이 기초는 1980년대 레이건 선거 캠페인 때 모아졌고 그가 10여 년 동안 키운 사람들과 구상안들이 레이건 대통령의 각료와 정책이 되었다. 폴 월포비츠, 리차드 펄, 윌리엄 버넷, 엘리어트 아브라함, 진 커크패트릭 등과 같은 신보수주의자들이 입각해 국내, 외교, 국방에서 영향을 미쳤고 감세를 통한 공급경제학은 레이건 행정부의 대표적 경제정책이 된 것이다.

신보수주의는 국제문제에서 공산주의를 봉쇄하고 해외민주주의를 고양하는 강력한 국제주의자 정책을 지지해 지난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 외교정책의 기조가 되었다.

크리스톨은 “강대국에게 국익은 지리적 개념이 아니다”며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능한 한 비민주적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민주적 정부를 보호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는 미국이 세계 경찰 역할을 하지 않으면 세계는 혼란과 불안정해질 것이라며 전 세계 민주주의 확산에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부시 행정부가 아프간, 이라크전을 하고 중동 민주화를 추진한 외교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

아틀란타 = 이상민 특파원 genuinevalu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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