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 이승만 탄생 135주년
3월 26일 이승만 탄생 135주년
  • 미래한국
  • 승인 2010.03.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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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대통령 아는 것이 선진화

이승만 저서 ‘독립정신’, 청소년 대상 개정본으로 발간

 

때아닌 폭설로 서울 전역이 하얗게 뒤덮인 지난 3월 10일, 건국 대통령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이화장(梨花莊)을 찾았다. 이화장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고 이승만 박사가 해방 직후 귀국해 살았던 곳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내각을 구성했던 곳이기도 하다. 낙산 기슭에 있는 이화장은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위엄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소박한 집의 주인으로서 격동의 세기, 신생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지도자 이승만은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미래한국>은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탄생 135주년을 맞아 이승만 연구가 김효선 씨(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를 만나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는 이승만 대통령 탄신일과 추모식을 준비하고 관련 서적을 출간해 보급하는 일을 하는 사단법인 단체다. 김 사무총장은 이곳의 살림꾼으로 탄신일 행사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 탄신일에는 이승만 박사의 청년기 저서인 ‘독립정신’을 ‘이승만, 100년전 선진화를 외치다’(가제)라는 제목으로 재출간한다. 김 사무국장은 ‘독립정신’ 재출간 작업을 도맡아 해왔다.

- 새롭게 발간되는 책이 젊은이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1904년 한성감옥서에서 완성된 독립정신(좌).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1910년 판(우)
“기존의 독립정신은 100년 전에 쓰였기 때문에 ‘태양이 왜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지는가’ 등 아주 기본적인 것까지 설명해 놨습니다. 그 당시에는 일반 백성들이 기초적인 과학 이론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 박사가 기초적인 것까지 다 설명을 해 놓은 거죠. 요즘에는 이런 내용은 굳이 필요가 없어서 핵심 내용만 간추려서 재출간하게 된 겁니다. 문장도 짧게 자르고 표기법도 좀 더 매끄럽게 수정했고요. 바라기는 ‘독립정신’을 젊은이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국가보훈처에서 지원을 받아 상당히 많은 부수를 이번에 출간합니다. 책이 나오면 전국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군 내무반에도 1권씩 보내려고 합니다.”

전체 내용을 다시 정리해서 올해 늦봄에는 새로운 ‘독립정신’이 또 발간된다.

“이번에 손 본 내용에 미처 시간이 없어 손보지 못한 나머지 부분을 정리해서 다시 출간합니다. 학자들은 인용을 해야 하니까 요약본 가지고는 안 되죠. 앞으로 100번은 더 개정을 해야 내용이 매끄럽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이번 책에서 중점을 두어서 읽어야 할 대목이라면 뭐가 있을까요.

“책 구성이 총론, 각론, 끝에 후록,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으로 있습니다. 저는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을 결론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상황이 위태로우니 국민들이 먼저 각성해야 한다, 새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독립정신’이 쓰였을 때는 쇄국 정책이 만연할 때였는데 이 박사는 100년전부터 ‘통상을 해야만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주장하고 있는 거죠. 그러면서 영국이 일찍 부강하게 된 이유도 통상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어요. 외국사람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을 막지 말고, 해치치 말고, 전부 다 개방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박사는 ‘개방적 국제주의자’였습니다.”

이번 이승만 대통령 탄신 행사는 3월 26일 오후 2시 정동제일교회에서 예배 형식으로 진행된다.

- 정권 교체 이후 탄신일 행사 분위기도 달라졌을 것 같은데요.

“조금 달라진 것 같긴 해요. 보통 추모식 때 의전상 대통령의 화환이 오지만 탄신일 행사 때는 거의 안 왔는데 지난해에는 탄신일 행사 때에도 오더군요. 정권이 바뀌긴 바뀌었구나 생각을 했죠. 하지만 그것보다도 이승만 박사에 대한 조금 생각이 바뀌고 있는 것 같아요. 참석하는 인원도 매년 느는 것 같고요.”

 

가장 큰 업적은 대한민국 건국

▲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서에 서명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3년)
 

- 나라가 어수선 합니다. 요즘 시국을 보시면서 생각해 봐야 할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굉장히 많지만 건국 자체가 제일 중요한 업적이죠. 건국이 안 됐으면 지금 이 나라가 없었을 테니까요. 건국이 있었기 때문에 한미동맹도 맺고, 평화선(인접 해양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도 긋고, 무상교육 등 교육혁명도 있을 수 있었죠. 최근 몇 년 동안 한미연합사 해체에 반대하는 천만명 서명운동도 했는데 연로하신 분들이 이런 일을 한다는 건 굉장히 감사하기도 하지만, 뭔가 빠지지 않았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한미연합사가 해체되면 한미동맹이 느슨해지면서 와해된다고 하는데 정작 한미동맹을 실현한 대통령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니까요.”

▲ 이승만 연구가 김효선 씨(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김효선 사무국장은 우리 국민은 참 “복이 많다”고 했다.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복이 많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고, 이승만이라는 걸출한, 위대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반대세력과 싸워서 대한민국을 건국했으니까요. 좋은 부모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행운이 있었던 거죠. 물론 이 박사가 대한민국을 혼자 건국한 건 아닙니다. 같이 협력한 많은 민족 진영의 어른들도 있지만 이 분들이 좌우 합작에 혹하기도 하고 미 군정을 더 연장하자는 주장을 할 때 설득해서 신념대로 밀고나간 이 박사가 없었다면 건국은 어렵지 않았겠나 생각합니다. 이 박사는 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서 우리가 국방비를 크게 지출하지 않고 조금 있는 재정으로 경재 재건에 집중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에는 이밖에 무엇이 있습니까.

“너무 많아서…(웃음).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선구자적인 혜안으로 대한민국이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도 이 대통령이었습니다. 이 박사는 전쟁통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했습니다. 그 결실을 요즘 들어 거두고 있지 않습니까. 이 박사가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할 때 사람들이 그를 ‘미친 노인’이라고 했습니다.

또 이승만은 1952년에 평화선을 선포합니다. 1980년대에 국제사회에서 각국이 자기 영해마다 배타적 전관수역 12해리를 그었는데 그것을 이승만은 이미 30년 전에 선포를 했습니다. 어떤 나라도 그런 걸 한 적도 없고 할 생각을 안했는데 이 박사가 외교 주권을 실현한 거죠.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협정을 맺을 때 굉장히 우리 쪽에 유리한 협상카드로 작용했습니다.

이 박사는 농지개혁을 해서 봉건적인 제도도 없앴습니다. 일제시대에도 나름대로 자본주의가 작동을 했지만 그때에도 머슴이 있었고 지주가 있었습니다. 농지개혁으로 말미암아 상하관계가 없어졌습니다. 농민들이 내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고요.”

- 농지개혁이 공산화를 막는 데도 기여했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네 맞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건국 이전에 정치고문 올리브 박사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깜짝놀랄 일이 벌어질 것이다’, ‘제일 먼저 농지개혁 할 것’이라고 말하고 농지개혁 법안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지주가 많았던 한민당 때문에 자꾸 지연이 되자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농민부 장관으로 세워서 농지개혁을 밀어붙이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농지개혁법을 제정을 하고 6·25가 발발하기 전까지 마무리를 합니다. 6·25가 일어났을 때 농민들은 자기 농토를 가졌기 때문에 폭동을 안 일으켰습니다. 오히려 대한민국을 수호했죠. 만약에 농민들이 그 때 봉기했으면 전쟁을 못하고 끝났을 겁니다.”

- 이승만 박사에 대한 비판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1954년에 ‘4사5입’이라는 억지논리로 개헌을 강행해서 장기 집권을 도모하고, 그 후 자유당과 경찰을 동원해서 부정선거를 자행 내지 묵과한 점은 이 대통령의 실정(?政)으로 꼽히고 있는데요.

 

대한민국이 먹고 살 수 있는 기반 마련

 

▲ 대한민국 최초의 내각을 뽑았던 조각당(組閣堂)
▲ 1948년 봄 이화장에서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이 대통령을 무조건 추앙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過)는 과(過)고 공(公)은 공(公)이지만 저는 그 당시 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됐느냐는 이견을 꼭 붙입니다. 많은 일을 하다보면 잘못된 일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이 박사에 대해 훌륭한 행적 보다는 ‘과’만 가지고 얘기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우리나라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의 역학관계를 봐야 하는데 단순하게 국내 문제만 가지고 이 대통령을 ‘권력욕의 화신’이라든지 ‘독재자’라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좌익들은 이승만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고 말하는데 그 당시 국민들 중 민주주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그 당시에는 한민당 사람들도 내각책임제를 선호했습니다. 진정한 민주제가 아니죠. 이승만 대통령은 완전한 민주 공화제를 선호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문맹률이 80%가 넘었는데 가르치면서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 대통령은 대통령이지만 우리 국민들이 너무나 몰랐기 때문에 민주시민이 될 수 있게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아버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을 한다면 ‘권력욕의 화신’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이화장에 오는 방문객들을 손수 안내하고 있는 김 씨는 마지막으로 ‘이화장’에 대한 소개도 빼놓지 않았다.

“여기에 이 박사가 1947년에 입주해 1948년에 조각당(組閣堂)에서 초대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이 박사가 처음 귀국하시고 ‘돈암장’이라는 곳에 계셨는데 당시 주인이 이 박사가 대통령될 줄 알고 덕 좀 보려고 하다가 미 군정 사령관 하지와 사이가 벌어지자 내쫓은 것 같습니다. 이후 이 박사는 미 군정청에 얘기해서 ‘마포장’으로 옮겼는데 춥고 좁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마포 나루터가 있는 곳이어서 강바람도 셌고요. 국내 민족주의 진영에 있던 33분이 돈을 모아서 이 집(이화장)을 사드려서 여기로 온 겁니다. 이화장은 원래 제주도에 고아원을 만들어서 돌봤던 황온순 여사의 집이었는데 황온순 여사도 일정 부분 몫을 부담했다고 합니다.”

현재 방재시설조차 되어 있지 않은 이화장은 다행스럽게도 지난해 서울시 정비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2013년까지 대한민국 조각본부 구성 당시의 모습으로 정비될 예정이다.#

서은옥 기자 seo0709@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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