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를 건 탈북, 생이별, 그리고 기적 같은 만남
생사를 건 탈북, 생이별, 그리고 기적 같은 만남
  • 미래한국
  • 승인 2010.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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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이야기]


어머니와 2남 1녀 세 자녀가 북한을 탈출해 대한민국에 들어오기까지, 그들은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었다. 어머니가 먼저 탈북하고 2년 뒤 자녀들이 차례로 탈북했다. 그러나 각자가 탈북과 강제 북송을 몇 번 되풀이하는 과정을 겪고 나서야 온 가족이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 정경화 씨는 이제 목사가 됐고 서울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정 목사는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을 참을 수 없다”며 고통의 시기를 회고했다.
 

‘시장에 간다’는 말 남기고 탈북

정경화 씨는 함북 청진에서 고등중학을 졸업하고 한때 권투선수였던 남편을 만나 22세에 결혼했다. 나름대로 행복한 생활을 했지만 남편이 결핵을 앓으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 ‘고난의 대행군’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정 씨 가족은 굶기를 다반사로 했고 산에서 뜯어온 풀과 나물 또는 약초를 끓여서 연명했다. 하지만 힘이 있을 때 죽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남편에게는 ‘시장에 간다’는 말만 남기고 집을 떠났다. 집에 옥수수 겨 2kg을 들여보내고 정 씨는 1997년 9월 이웃의 할머니와 함께 중국 삼합(三合)으로 탈북했다.

이웃 할머니는 침술 기술이 있어 정 씨는 ‘보조로 일하며 살면 되겠구나’ 생각했지만 할머니는 독자적으로 일하겠다며 목단강 지역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정 씨는 중국의 한 농가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1998년 2월 중국 공안에 걸려 회령 보위부로 북송되었고 결국 노동단련대에 수감되었다. 정 씨는 벌목장에서 노동을 했다. 그 때 불과 15세 전후의 아이들이 매를 맞으며 노동을 하다가 허기져 죽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다. 그들은 매일 험한 산을 타고 140리 길을 다니며 노동을 했는데 20일 동안에 무려 5명의 아이들이 죽어가는 애처로운 모습을 보았다.

정 씨가 갑자기 장티푸스에 걸리자 노동단련대는 전염의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정 씨를 귀가시켰다. 하지만 결핵환자인 남편에게 장티푸스가 전염되어 남편은 40일 만에 죽고 말았다. 정 씨는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애를 썼다. 아픈 몸을 끌고 장마당에 나가 옷가지를 팔아 쌀 한 줌을 구해 와서 가족을 먹여 살리곤 했다. 거지나 다름없었다.

1998년 7월 또 다시 두만강을 건넜을 때 정 씨는 이것이 고향땅을 밟는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그 뒤 2년간 자녀들을 만나지 못했다. 정 씨는 용정지역의 한 봉제공장에서 바지 만드는 일을 했다. 바지 한 벌에 고작 2원을 버는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고혈압 증세로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가족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돈을 모았다.


세 아이들과 생이별


한편, 갑자기 어머니를 잃어버린 3남매는 먹고 살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했다. 당시 16세였던 큰 아들은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훔쳐서라도 두 동생을 먹여 살렸다. 1999년 2월 경 큰 아들은 중국에서 먹을 것을 구하려고 홀로 탈북해 연길의 한 지하교회로 들어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북한으로 들어가 10세 된 남동생을 데리고 나왔다. 그러나 동생은 어느 날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되었다. 큰 아들은 남동생을 찾기 위해 북한에 들어갔다가 이번에는 13세 여동생까지 데리고 나왔다. 큰 아들은 두 동생을 중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국경을 숨바꼭질하듯이 다녔다. 그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3남매가 죽을 고생을 하는 동안 정 씨는 애끓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이 북한에서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미친 듯이 아이들을 찾아 연길 일대의 지하교회를 뒤졌다. 당시 지하교회는 북한 아이들을 구실 삼아 남한교회로부터 돈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몰래 숨겨두곤 했었다. 또 애타는 심정으로 무당집도 찾았고 점집도 찾았다. ‘언제쯤 아이들을 찾겠느냐?’고 물었지만 대답은 구구각색이었다. 3년이면 만난다고도 했고 3형제가 다 흩어져서 밥 빌러 다니며 딸은 남의 집에서 삯빨래 한다는 얘기도 했다.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정 씨는 누군가에게서 들은 대로 ‘하나님께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2000년 1월경 정 씨는 연길의 친구 집에 머물며 기도에 매달렸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갈라지고 다시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인 줄 압니다. 자녀들을 만나게 해주세요. 보고픈 내 아이들을 만나게만 해주시면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걸으나 서나, 오로지 아이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때로는 ‘내가 미쳐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리고 2월 말쯤 정 씨는 지인의 권유로 교회에 가게 되었다. 그를 인도한 아주머니는 각각 다른 교회로 정 씨를 안내하여 아이들을 찾도록 수소문해주었다. 마지막 교회에 가보니 탈북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아이가 큰 아들을 안다고 했다. 그 아이가 가르쳐준 전화로 곧바로 연락했더니 훈춘의 한 교회 전도사가 전화를 받고 확인해 주었다. 정 씨는 이렇게 극적으로 자녀 상봉을 할 수 있었다. 기도를 시작한 지 40일이 되던 날이었다. 정 씨는 이 만남이야말로 기도의 응답이었음을 믿었다.


군견(軍犬)들을 멈추게 한 믿음


그러나 정 씨 가족의 탈북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얼마 뒤 사랑하는 딸이 다시 중국 공안에게 체포되어 북송되고 말았다. 그 애통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딸이 북송되었지만 우선 두 아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남한 행을 결심했다. 2001년 3월 4일, 주일 예배를 드리고 정 씨와 두 아들은 남한을 향해 연길을 떠났다.

다른 탈북민들과 함께 베트남 국경을 넘었다. 산을 넘는 동안 세 번의 강도를 당해 있는 돈을 거의 다 강탈당했다. 다행히 베트남 땅에서 선교사의 도움으로 호치민까지 갈 수 있었고 다시 캄보디아로 들어갔다. 베트남에서는 북송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캄보디아 국경을 넘자 정 씨 가족은 경비병들에게 쫓겨 다녔고 급기야는 군견 다섯 마리의 먹잇감이 될 뻔도 했다. 벌레들이 우글대는 논바닥을 기어서 겨우 경비병을 피해 큰 길로 나왔지만 무서운 개소리가 들렸다. 어렴풋이 보니 송아지만한 경비대의 군견들이 다섯 마리나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도저히 달아날 수 없는 지척의 거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부르짖는 기도 밖에 없었다.

“하나님 도와 주세요. 개에게 물려 죽게 되었어요, 저 개를 멈춰주세요.” 정 씨는 도망가면서 소리쳐 기도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을 구하기 위해 천사를 보내셨던 것처럼, 갑자기 뒤를 돌아보니 다섯 마리 개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영화 속의 정지 화면처럼 개들은 이빨을 드러낸 채 달려오는 자세 그대로 얼어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기적이었다.

정 씨 가족이 헤매던 곳은 바로 캄보디아 국경의 검문지역이었다. 체포되고도 남을 순간이었지만, 한 경찰의 도움으로 호위를 받으며 프놈펜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고 그곳에서 한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정 씨 가족은 서울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 후, 딸이 중국으로 넘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정 씨는 최선을 다해 항공편으로 딸도 서울로 데려왔다. 온 가족이 다시 만난 것은 첫 탈북 후 4년만의 일이다.

지금 정 씨는 하나님 앞에 서원한 대로 목회자가 되어 탈북민들을 섬기고 있다. 큰 아들은 캐나다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으며 딸은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시련을 원망하기보다 현재의 축복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 

김창범 편집위원 cbkim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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