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이바라본 광복절과 대한민국 건국
이승만 대통령이바라본 광복절과 대한민국 건국
  • 미래한국
  • 승인 2010.08.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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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2주년 특집 인터뷰/ 이인수 박사(이승만 건국대통령 양자)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것은 1945년 해방 당시 세계사적 흐름에서 대세를 이루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미래한국>은 8·15 건국기념일을 맞아 건국 과정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애국정신과 활약상을 그의 양자(養子)인 이인수 박사를 통해 들어보았다.


-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8·15 ‘광복’과 ‘건국’의 의미가 혼동되고 있고, 그나마 건국의 의미는 상당히 간과되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당시의 인식은 어떠했습니까.

일제에서 해방된 후 처음에는 해방기념일이라고 했지 광복절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을 광복(光復)이라고 하지만 광복은 단순한 민족 해방이라는 개념보다 독립의 성취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토, 국민, 주권 이 세 가지를 갖추고 독립을 해야 광복이죠. 이승만 박사는 일제에서 해방된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보셨지만 진정한 광복은 독립국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를 건국의 출발로 얘기하자는 주장이 있지만 그 당시는 국권을 강탈당한 상태로 독립국가로서의 요소는 없었죠. 영토, 국민이 없기 때문이죠.

이런 의미에서 1945년 해방도 진정한 광복은 아닙니다. 1943년 11월 27일 미·영·중의 카이로선언으로 장차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의했지만 1945년 2월 11일 미·소·영이 얄타협정에서 한국을 미·소·영·중 네 나라의 신탁통치 대상국으로 비밀히 결정했습니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과 동시에 국제간에 밀약된 신탁통치 대상국이 된 것이니 이런 점에서 광복이 아니죠.

이승만 박사는 독립운동을 할 때 자신이 대한제국의 민족사적 역사를 계승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라는 것을 여러 나라에 선포했습니다. 1919년 6월 18일 워싱턴에 있을 때 일본 천황에게 ‘이제 우리는 합법적 한성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일본군대, 일본관리, 일본국민은 철수하라’는 국서를 보냈습니다. 물론 일본이 철수하지는 않았지만 이것만 보더라도 임시정부가 현대국가로서의 정통성을 갖춘 것입니다. 1945년 5월 31일 제헌국회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한성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공표했습니다.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법통을 이은 것을 이승만 박사가 선언해 우리의 민족사가 반듯하다는 것을 과시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광복은 국권이 온전히 회복돼 독립을 이룬 1948년 8월 15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1945년 8월 15일 일제에서 해방된 것이 소홀하게 취급돼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이 박사는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의장으로서 헌법 제정을 서둘러 7월 17일에 헌법을 공포하고 8월 15일에 정부 수립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일제의 해방도 기념하고 독립도 기념하기 위해서죠. 이에 애초에 8월15일은 첫째 광복절이 민족이 해방된 날, 둘째 건국운동을 해서 독립국가를 완성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한 날 두 가지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승만 박사 하야 후 독립국가 즉 건국으로서의 광복의 의미는 무시되고 말았죠.


상해임시정부, 한성정부의 정통성 이어받아

- 상해임시정부와 한성임시정부의 차이를 말씀해주신다면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3개의 임시정부가 출범했습니다. 노령(露領·블라디보스토크)에서 3월 17일, 상해에서 4월 11일, 한성(서울)에서 4월 23일 선포됐습니다. 상해 임시정부는 이동녕,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이었고 노령에서는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출범했죠. 4월 23일 서울에서는 13도 대표들이 모여 국민대회를 열고 국체를 민주제로 하고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임시정부가 선포됐어요. 이를 한성임시정부라고 합니다.

한성임시정부는 이승만 집정관총재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의 정부와 파리강화회의 의장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이 정부가 대한제국의 외교관계를 승계하는 한민족의 정통정부임을 통보했죠. 이 공문에서 처음으로 영문 국가명칭 ‘Republic of Korea’를 사용했어요. 8월 25일 워싱턴DC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9월 1일 독립공채를 발행했습니다.

이후 9월 6일 한성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존중해 상해에서 세 임시정부를 통합한 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서울은 일제 치하에서 활동할 수 없고 노령은 북쪽에 있어 교통이 불편하고 상해의 프랑스 조계가 독립운동을 하기에 좋았기 때문이죠. 여기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는데 서울에서 국민대회와 13도 대표에 의해 수립된 민주방식을 중시한 까닭입니다.

- 구한말부터 해방전까지 이승만 박사의 활동은 개화와 구국·독립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데, 주요 내용을 정리해주신다면

이승만 박사는 구한말 매일신문, 제국신문을 창간해 언론인으로서 민중계몽을 시작했고, 최초의 학생단체인 협성회를 조직해 토론회를 개최했으며, 1896년 시작한 독립협회로 하여금 1898년 3월부터 만민공동회를 열게 해 구국운동을 주도한 개혁적 인물이었습니다.

1904년 11월 유학생 자격으로 미국으로 가서 독립 보전을 위한 비밀외교를 추진, 시오도어 루즈벨트 미 대통령을 만나 독립 보장을 요청했죠. 1919년부터 1925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맡았습니다.

이 박사는 1918년 한인기독교회와 기독학원을 설립하고 1921년 대한인동지회를 결성해 합법적인 독립운동을 이끌어나갔습니다. 이 박사는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외교와 홍보를 중요시했습니다. 1932년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와 상의해 특명전권수석대표의 신임장을 받아 1933년 제네바에 가서 국제연맹에 한국을 독립시켜야 극동의 평화가 유지된다는 것을 역설했어요. 1941년 일본의 대미 전쟁 도발을 예언한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을 발간해 주목을 받았고 한국인의 대일전쟁 참가와 임정의 국제승인 그리고 전후 자주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해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렸습니다.

- 1945년 8·15 해방 후 이승만 박사의 건국운동의 주요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해방 직후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좌익 세상이었습니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소련군이 8월 13일 북한의 청진에 들어왔습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인민위원회를 조직했고 9월 20일 스탈린의 비밀 지시로 북한 공산화와 공산정권의 수립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총독은 북한에 소련군이 들어온 것을 보고 남한까지 소련군이 들어와 공산화될 것으로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우익 지도자 송진우에게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요청했다 거절당하자 여운형에게 제의해 수락을 얻습니다. 여운형은 일본 총독으로부터 당시 일본돈 2천만엔을 받아 박헌영과 손을 잡고 전국에 치안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이 들어오지 않고 38선을 기준으로 이북에는 소련군이, 이남에는 미군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진군한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미군 상륙 이틀 전인 1945년 9월 6일 여운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석에 미국에 있는 이승만 박사를 추대하고 자신은 부주석이 됐습니다.

워싱턴에서 해방을 맞은 이승만 박사는 곧 귀국하려 했으나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고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팽창정책을 경고해와 이에 대한 의견이 다른 미 국무부가 허락하지 않아 두 달이 지나서야 33년 만에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취임을 거절하고 정당사회단체를 통합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해 11월 4일에는 ‘연합국에 대한 우리의 결의문’을 발송했죠.


이 박사의 5대 건국 강령

그 내용은 완전독립의 요구, 38선 철폐, 신탁통치 반대, 임시정부의 법통 존중과 선거를 통한 민주정부 수립이었으니 곧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시행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는 이 박사의 건국강령으로, 이 박사는 3년 동안 이 강령을 실현하기 위해 국내외로 정치활동을 전개해 마침내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38선 철폐 조항만 빼놓고 모두 달성했습니다. 남한 내 공산당은 공산화를 불가능하게 할 이러한 내용에 당황해서 공산당수 박헌영은 38선 철폐 주장이 “연합국의 반감을 사게 할 내용”이라며 친일파 숙청이 먼저라고 이 박사의 통합운동에서 탈퇴했죠.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을 5년 동안 신탁통치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미소공동위원회가 한국인 정당사회단체와 상의해서 한국인 임시정부를 세운다는 내용을 발표하게 한 것입니다. 한반도 공산화를 추구하는 소련과 좌우합작정부를 생각하고 있는 미국의 이익이 달라 미소공동위원회가 공전을 하자 이승만 박사는 1946년 9월 임영신 박사를 UN에 파송해 한국문제를 UN에 이관시켜 독립을 추진하기로 했어요. 10월 28일에는 3상 결정을 취소하라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미국은 1947년 7월 1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이 박사의 주장대로 한국문제를 UN으로 가져가 9월 23일 총회가 의제로 채택하고 11월 14일 남북한 자유선거와 한국임시위원단 파견을 결정하게 됐습니다. 1948년 1월 8일 유엔의 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에 왔으나 소련과 김일성은 이미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했기 때문에 이들을 북한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남북한 통일선거를 거절했죠.

▲ 1948년 7월 17일 초대 국회의장으로서 제헌헌법에 서명하는 이승만
한국위원단이 남한의 각계 인사들을 만났는데 이승만 박사는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구, 김규식은 선거 전에 북한 지도자와 만나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위원단의 중국대표이며 중국 총영사이기도 한 유어만 공사의 주선으로 중국 총영사관에서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만나게 됐죠. 그리하여 김구, 김규식은 남한선거에 반대하지 않고 이승만은 김구, 김규식의 남북회담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합의했습니다. 결국 UN 소총회는 1948년 2월 26일 선거가 가능하고 인구의 3분의 2가 사는 남한에서 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세우도록 결의해 한국위원단에 통보했고 이에 따라 위원단은 3월 12일 이 결의를 채택할 것을 가결하고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게 됩니다. 5월 31일 제헌국회가 열리고 7월 17일 헌법 공포, 8월 15일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오랜 독립운동을 마무리하는 건국을 이루게 된 것이죠.


이 박사는 당대 학식·정치적 식견에서 세계적 지도자


- 이승만 대통령이 꿈꿨던 대한민국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승만 박사는 구한말 개혁운동을 하다 감옥에 가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어요. 대한민국을 기독교국가로 만든다기 보다는 역사적으로 현대의 민주주의는 다분히 기독교 정신에서 나왔다는 확신을 갖게 됐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기반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양의 문명사에서 비중이 큰 기독교 정신을 존중해야 세계사에서 발전하는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때 하나님께 기도로 시작한 것도 그런 취지였죠.

▲ 1948년 7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는 이승만
신생국의 어려움과 6·25의 엄청난 폐허 속에서도 토지개혁, 전란의 수습, 교육의 진흥과 인력의 양성, 경제부흥과 산업의 육성, 각종 자치제도의 시행과 복지문제 등 후일 발전의 토대를 착실하게 구축해 나갔어요. 1953년 휴전 이후 경제 부흥을 위해 민간주도형의 발전과 자립경제를 달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죠. 경제개발 3개년계획과 기간산업 육성에 주력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입국으로 인재양성을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인력을 양성했는데 이들이 60~70년대 경제발전의 주역이 됐죠.

이 박사는 한민족의 정체성 확립, 일제 잔재 불식, 여권신장, 언론의 창달 등 근대화 정책으로 조용한 혁명을 이룩해나갔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굳은 의지로 외세에 적극 도전하며 통일을 달성에 노력했습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고 65만의 국군을 증강해 국가안보를 강화해 지금까지 60년을 바라보는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 경제와 국가 발전을 가능하게 한 것이죠. 이승만 대통령이 놓은 기초가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번영을 누리게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지금 우리 사회는 이승만 박사의 위대한 업적을 폄하하고 오히려 대한민국 수립을 반대했던 김구 선생을 더욱 추앙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그 당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학식으로나 정치적 식견으로나 세계적으로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나라가 없었지만 트루만, 처칠, 스탈린, 애틀리 등 당대의 세계적 유명 정치인에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일제에서 해방된 우리나라가 국민소득이 50달러 밖에 안 됐을 때 이승만이라는 지도자가 있었던 것은 복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박사가 상해임시정부 대통령 때 김구 선생은 경찰국장으로 이 박사의 보디가드 역할을 했습니다. 황해도 동향으로 한 살이 적어 ‘우남 형님’하며 따랐습니다. 김구 선생이 상해임시정부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해체 위기에 놓일 때 이를 잘 지켜온 애국자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 박사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중시해 미군정을 설득해 11월 23일 개인자격이라는 조건부였지만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를 비롯한 임정요인을 귀국할 수 있게 했습니다.

UN이 결의한 남북한 자유선거가 논의될 때 1947년 12월 1일 김구 선생은 “나는 이승만 박사와 같은 노선이다”라며 남한만의 선거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다 12월 2일 한민당 중진인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는데 여기에 김구 선생의 부하가 관여된 것으로 드러나자 김구 선생은 한독당의 운명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한에서 정권을 잡을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고 또 김일성의 회유에 넘어가게 돼 남한만의 선거를 반대하게 된 것입니다. 1948년 4월 19일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 선거를 반대하는 좌파단체의 일원이 돼 월북했죠. 결국 남한에 돌아와 서울에서 발표한 것이 4·30성명인데 한마디로 이 성명서는 한반도를 공산화할 공산당의 계획에 김구와 김규식이 합의한 결의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박사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반을 만든 큰 공로는 인정하지 않고 말년의 부정선거 문제(그것도 진실이 아닌데도)로 폄하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암살된 김구 선생은 감성에 치우친 한국인에게 존경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가 하야한 후 역대 정권은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반이승만 선전에 힘써 자기 정권을 차별화하는 데 주력했고 이에 영합하는 언론과 기타 대중매체가 반이승만시대를 만드는 데 앞장서왔습니다. 학계와 문화계가 이에 동조했고 일제의 식민사관, 미국의 수정주의 사관, 북한의 김일성 사관과 민중사관이 밑받침이 됐던 것입니다.

이 결과 반이승만 사고가 일반화돼 대한민국의 건국은 외면당했고 반이승만 사고가 대한민국의 건국에 대한 자부심이나 자긍심을 갖지 못하는 풍토를 조성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하는 반국가적 사고까지 하게 했습니다.


식사 때마다 ‘나의 사명은 끝났으니 우리 민족에 복 주옵소서’ 기도

이승만 박사를 부정하는 것은 개인의 위상 추락일 뿐만 아니라 건국 공로자를 기리지 않아 자기 나라에 대한 정체성을 상실한 국민정신이 없는 국가적 불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북한의 선전도 작용했지만 남한 좌파의 선동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국가의 기틀이 흔들립니다. 대한민국 건국의 중심 인물인 이승만 대통령을 바로 알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1945년 8월 15일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맛보며 3년 동안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우리 힘으로 외세를 배격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한 것을 기리는 것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따라서 8·15를 언급할 때 이 문제는 반드시 짚고 가야 합니다.

- 1961년 양자로 들어가신 후 가까이 뵌 이승만 박사님에 대해 말씀하신다면

워낙 크신 어른입니다. 아버님으로 모시면서 감히 그 인품에 아무도 범할 수 없는 위엄을 갖춘 순수한 한국인이심을 느꼈습니다. 그분을 통해 저는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회복했습니다. 지금도 생생한 것은 아버님이 식사 때마다 하신 기도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심신이 허약해졌습니다. 하나님 우리 민족에게 복을 내려주옵소서’. 아버님은 일평생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살아오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머님 프란체스카 여사도 아버님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루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던 모습이 늘 생각나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남북통일을 역설하셨습니다. 아버님은 평소에 끊임없이 ‘남북통일을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통일을 위해 힘을 길러야 한다’며 북한에서 선출된 자유민주주의 대표들이 대한민국에 참여하는 것이 통일이고 한국민족이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씀이 한국민족에게 주고 싶은 유언이라고 하셨어요. #

강시영 편집국장 ksiyeong@futurekorea.co.kr

사진·김동수 기자 dskim@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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