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가 ‘민주화운동의 대부’라고?
김근태가 ‘민주화운동의 대부’라고?
  • 미래한국
  • 승인 2012.01.20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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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지난 12월 30일 사망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에 대한 추모의 열기가 대단히 뜨겁다. 그의 빈소와 추도식장 및 장례식장을 찾아간 인원수가 매우 많고, 특히 언론매체들이 보여주고 있는 그에 대한 추모의 표현은 최상급이다. 김근태 씨가 사망한 날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이름이 민주주의였고 그의 삶 자체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라고 김 씨를 높이 띄우자, 언론매체들은 김근태 사망기사를 보도하면서 일제히 김 씨를 ‘민주화운동의 대부’라고 칭송했다.

보수언론들의 이상한 보도들

김근태 칭송 캠페인에는 소위 ‘보수적인’ 신문들도 동참했다. 김근태 관련 기사를 보도하면서 조선일보는 김근태 씨의 사망을 ‘민주화운동의 대부, 신사정치의 상징을 잃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한 술 더 떴다. 재벌의 신문인 중앙일보는 반재벌의 투사인 김근태 씨를 ‘좌도 우도 존경했다… 민주화투쟁 시대의 큰 형’이라는 제목을 달았고, 동아일보는 김근태 추모기사를 보도하면서 ‘좌도 우도 하나 되어’라는 제목을 달았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우익진영 인사 중 누가 김근태를 존경하거나 추모했는지를 밝히지 않은 채 그런 제목을 붙였다.

김근태 씨는 참으로 ‘민주화운동의 대부’였을까? 김근태 씨가 ‘민주화운동의 대부’였는지 여부를 판단하려면 그의 행적을 살펴봐야 한다.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김 씨는 1970년대 중반부터 경인지역에서 육체노동자로 위장 취업해 혁명적 노동운동을 전개했고, 1983년에는 학생운동자 출신자들을 규합해 혁명운동 단체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만들었다. 민청련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남한에서의 당면혁명(궁극적인 목표로 가기 위한 중간단계의 혁명)을 민족민주혁명(NDR)로 규정하는 일을 선도했다.

김 씨의 민족민주혁명론은 대학가의 운동권 학생들에 접목됐으며 후일 운동권 학생들은 자기들이 실현하려는 당면혁명을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NLPDR)으로 정립했다.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이란 북한이 1970년대부터 남한에서 일으킬 혁명으로 제시해온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과 내용이 동일한 것이다. 단지 남한의 법집행기관과 대중을 기만하기 위해 북한이 사용한 ‘인민’을 ‘민중’으로 바꿨을 뿐이다. 혁명운동권에게 있어서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은 궁극적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실현하기 위한 중간단계의 혁명이다.

김 씨는 1985년 투옥됐다가 3년 후 출옥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결성을 주도해 그 단체의 집행위원장이 됐다. 전민련은 당시 대학생과 노동자 및 청년들의 혁명운동과 연결된 반(半)합법 운동단체였다. 그는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투쟁하는 세력들 가운데 친북파벌인 민족해방(NL)파이거나 아니면 그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핵심적 인물 중의 하나로 평가되던 사람이었다. 김 씨는 1990년 국보법 등의 위반으로 다시 투옥됐으며 2년 후 석방되자마자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국민회의를 결성해 그해 12월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씨를 당선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김대중 씨가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한 직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외유를 떠난 뒤 김근태 씨는 국내에서 통일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라는 단체를 만들었다가 김대중 씨가 정계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할 때 그에 가담했다. 그리고 1996년 서울 도봉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김 씨는 정계에 입문하면서 자신의 과거 혁명운동에 대한 반성을 말하거나 사상 전향을 선언한 바 없다.

김 씨는 정계에 입문한 후 학생운동권의 NL파가 주도하는 친북이적단체 한총련의 합법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을 선도하고,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나 대남 도발 및 인권 탄압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나 대남 도발을 응징하려는 미국과 대한민국의 조치들에 대해서는 앞장서 비난해왔다. 

과거 혁명운동에 대한 반성과 전향 없어

이상과 같은 김근태 씨의 행적에 비춰볼 때 그를 ‘민주화운동의 대부’라고 호칭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그가 추구해온 민족민주주의 혹은 민중민주주의라는 것은 정상적인 의미의 민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김근태 씨나 그의 동지 및 추종자들에게는 민주주의일 수도 있겠지만 정치학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로서의 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더구나 자유민주주의를 정치이념으로 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반대되는 내용을 가진 민족민주주의나 민중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적으로 간주될 수는 있어도 민주주의로는 인정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민족민주주의나 민중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운동’해온 김근태 씨를 민주화운동의 대부라고 호칭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행위와 같다.

김근태 씨의 사망과 장례식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면서 그를 민주화운동의 대부라고 호칭하는 이 나라의 언론매체들은 김 씨가 실현하기 위해 ‘운동’해온 민족민주주의나 민중민주주의에는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포함돼 있기 때문에 그를 민주화운동의 대부라고 호칭하는 것에 잘못이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런 주장은 북한의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으므로 북한을 민주국가로 호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황당한 말장난이다.

이치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김근태 씨의 빈소나 장례식장 등을 찾아가 그를 민주화운동의 대부로서 존경하는 마음을 표시하고, 언론매체들이 입을 모아 그를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칭송한 것은 어찌된 영문인가?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민족민주주의 혹은 민중민주주의를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김 씨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이 매우 많고, 민주주의의 의미도 김근태 씨의 실체도 모른 채 덩달아 빈소나 장례식을 찾아가고 기사를 쓰는 사람들이 매우 많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정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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