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세계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한국영화의 세계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 미래한국
  • 승인 2013.07.1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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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문의 說과 口樂
 

‘이별계약’(分手合約)이라는 영화가 중국시장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 영화가 중국 내에서 흥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감독이 한국인 오기환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관심이 달라진다.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설국열차’는 국내 영화사가 제작한 우리 영화지만 크리스 에반스, 에드 해리스 같은 외국 배우들이 주연급으로 출연한다.

흥행 결과가 실망스럽게 끝나기는 했지만 강제규 감독이 연출한 ‘마이웨이’에는 톱스타 장동건을 비롯해 일본의 오다기리 조, 중국의 판빙빙 등 각각 자기나라에서는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모였다.

박찬욱, 김지운 감독은 미국에서 ‘스토커’ ‘라스트 스탠드’라는 영화를 연출했다. 중국이 공들여 만든 ‘집결호’라는 영화의 특수효과 부분은 우리 기술팀이 맡았다.

우리 영화인들이 외국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일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외국 영화인들이 우리 영화에 참여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이런 저런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목표는 흥행 시장을 넓혀보자는 것이다.

1957년 작 ‘이국정원’(異國情鴛)은 한국영화계가 국내를 벗어나 해외 시장에 접근하려는 과감한 시도였다. 한국의 작곡가와 홍콩의 가수가 사랑에 빠진다는 멜로드라마. 그 무렵 한국영화는 가난하고 어려웠다.

전쟁의 그늘은 짙었고 자본은 부족했으며 기술은 빈약했다. 한국영화와 미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들의 영화와는 근본적으로 출생 신분이 다른 것으로 여겼다. ‘외국’이나 ‘해외’라고 하더라도 일본이나 홍콩, 대만 정도가 끝이었고 미국이나 유럽은 너무 멀었다.

그런 시절에 ‘이국정원’은 한국과 홍콩, 일본 3국의 자본과 인력, 기술, 야망을 한데 섞었다. 한국에서는 한국연예주식회사, 홍콩에서는 소씨제편창(召氏制片廠, 쇼브러더스)이 손을 잡고 합작으로 시작한 프로젝트. 한국연예주식회사 사장 임화수(1919-1961)는 자유당 정권 시절 권력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위세를 과시하던 인물이다. 5·16 후에는 정치폭력의 멍에를 쓰고 형장에서 일생을 마치는 바람에 자신이 영화보다 더 극적인 인물이 되기도 했다.

홍콩 측의 런런쇼(召逸夫)는 홍콩을 넘어 아시아의 모굴(Mogul)로 도약하던 슈퍼맨. 감독은 한국의 전창근(全昌根)과 홍콩의 도광계(屠光啓), 일본의 와카스기 미쓰오(若杉光夫) 3인의 공동연출(국내 개봉 때는 일본 감독 이름을 뺐다).

일본 감독이 이 영화의 연출에 참가한 것은 컬러 영화로 만드는 기술 부분을 대응하기 위한 조치로 당시만 하더라도 컬러 필름으로 촬영하고 현상하며 사운드를 조합하는 기술은 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이 독보적이었다.

한국과 홍콩이 야심차게 만드는 합작영화의 기술 단계를 높이자는 계산이다. 임화수와 런런쇼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에서 처음 대면하고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가동한 것이다.

한국과 홍콩에서 각각 개봉했지만 국내 흥행은 실망스러웠다. 국도극장에서 간판을 올렸지만 1주일 정도를 겨우 견디다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한 채 퇴장했다. 해외로 향하려는 의지는 최초의 이스트만 컬러, 첫 해외 합작이라는 기록만 남긴 채 한국영화의 역사가 됐다.

조희문 편집위원·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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