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 전투가 시작되다
1차 대전, 전투가 시작되다
  • 이춘근 박사
  • 승인 2014.04.2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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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④
리에주 전투에 참전 중인 군인

국제정치학자들이 전쟁을 연구할 때 주로 관심을 두는 부분은 전쟁의 원인(causes)과 결과(consequences)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전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conduct)에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괴리를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전쟁의 진행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쟁을 시작하는 나라들은 양편 모두 전쟁에서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고 낙관하고 전쟁을 하게 되는데 한편은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을 터이니 바로 이 부분을 설명해 주는 것이 전쟁의 진행과정일 것이다.

본시 전쟁은 생각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를 ‘전쟁의 안개’(Fog of War) 혹은 마찰(Friction) 등의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실제 전쟁 상황에서 무기와 군인들이 원래 계획하고 연습했던 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죽느냐 사느냐의 처절한 상황에서 평소 생각했던 계획이 제대로 작동할리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군인들은 지속적으로 FM(야전교범)을 ‘숙달’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총알이 핑핑 날아오는 전쟁터는 생각할 겨를이 없는, 그래서 평소 잘 익혀둔 대로 ‘반사적’으로 행동해야만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역시 도무지 기대하지 못했던 전쟁터가 연출됐다.

몰트케

독일군 작전 계획의 파탄

독일은 몰트케 장군이 수정한 슐리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네덜란드와 아르덴느 사이 뫼즈강 유역의 좁은 회랑을 통과해야만 했다. 리에주라는 작은 도시는 회랑을 장악하기 위한 요충지였다.

그러나 12개의 요새가 구축된 리에주를 신속하게 점령하지 못할 경우 독일군의 작전 계획은 애초부터 어긋날 것이 분명했다. 독일군은 리에주를 공격하기 위해 6개의 최정예 여단을 동원했다. 210mm 중포의 포격을 견딜 수 있는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독일은 각각 305mm, 420mm에 이르며 사정거리 11.2km에 이르는 대구경 곡사포를 제작했다.

8월 5일 시작된 리에주 요새 공격작전에서 독일군은 벨기에군의 치열한 저항 때문에 루덴도르프 장군이 직접 나서야 했지만 8월 7일 요새를 점령할 수 있었고 루덴도르프 장군은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됐다. 벨기에는 용감히 싸웠지만 영국, 프랑스의 지원이 늦어지자 8월 20일 브뤼셀을 독일군에게 내주게 된다. 후방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병력도 없이 주어진 시간표대로 공격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독일군은 점령지 주민을 억누르기 위해 민간인 처형, 건물 파괴 등 ‘공포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벨기에를 공격했지만 프랑스는 8월 6일 남부의 알자스 북쪽 지역으로 공격작전을 개시했다. 슐리펜의 본래 의도는 독일군의 좌익(즉 프랑스 남부를 공격하는 부대)을 점진적으로 철수시키면서 프랑스군을 깊숙이 유인한 후 주공이 이루어지고 있는 우익으로부터 프랑스군을 멀리 이격 시킨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계획은 독일군의 주공세력이 서쪽으로 깊숙이 진격한 후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서쪽에서부터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8월 하순경 독일군은 서부전선 전역에서 우세한 진격작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승세에 있던 독일군은 일시적인 전술적 승리에 홀려 전략적인 목표를 까먹는 우를 범하게 된다. 몰트케는 연합군을 좌우에서 포위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독일군 좌익 지휘관들에게 공격작전으로 전환할 것을 허락했다.

더 나아가 몰트케는 병력을 추가적으로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인 우익에서 2개 군단을 차출, 러시아군을 막기 위해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켰다. 전쟁의 원칙인 집중, 목표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프랑스를 완전히 제압한 후 동부전선으로 방향을 돌린다는 슐리펜 플랜이 애초부터 엉망이 되는 상황이었다.

독일은 전쟁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자 전쟁 개시 불과 한 달만에 참모총장 몰트케를 해임하고 9월 14일부터 팔켄하인 장군이 전쟁의 지휘를 맡게 됐다. 군의 체면과 사기를 고려, 몰트케는 11월 3일까지 명목상의 참모총장직을 유지하기는 했다.

프랑스도 전쟁계획17호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프랑스는 독일군의 파리를 향한 공격에 대비하기 보다는 오히려 40여년전 빼앗긴 알자스 로렌을 탈환하는 데 더 큰 신경을 쓰고 있었다. 독일군이 벨기에를 통과해 프랑스의 동북부로 진격해 올 줄은 몰랐다.

루덴도르프

프랑스군의 의지

프랑스군은 독일의 작전계획이 프랑스군의 주력을 남쪽에 묶어두는 것임도 간과했다. 프랑스는 독일군의 공격으로 프랑스군이 위험에 빠졌을 때 연합작전을 펼치던 영국군과 합의도 하지 않은 채 퇴각해 버렸다. 자신의 본토를 수비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는 프랑스군의 초기 지리멸렬은 심각했다. 다만 조프르 장군의 냉철한 판단 때문에 퇴각하는 프랑스군은 군을 재편성, 장기전에 대비할 수 있었다.

조프르 장군은 프랑스군 제6군을 재편성, 파리 북부에 배치시켜 놓았다. 파리를 서쪽에서 공격해 들어간다는 원래의 계획을 어긴 독일군은 파리의 동북쪽에서 진격을 개시하고자 했다. 독일군은 프랑스 제6군에게 고스란히 측면을 드러내게 됐던 것이다. 9월 6일과 7일, 프랑스 제6군은 파리로 진격하던 클루크 장군의 독일 제1군의 측면을 공격, 보급로 차단 작전을 전개했다.

프랑스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들까지 동원해서 병력을 수송하는 등 총력전을 개시했다. 독일군이 전투에서는 우세했지만 9월 9일 전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먼저 전의를 상실한 편은 독일이었다.

독일은 파리를 점령하지 못하고 북쪽으로 퇴각했다. ‘마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프랑스군의 방어 전투는 독일의 공격으로부터 파리를 구했을 뿐 아니라 서부전선에서 신속한 승리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독일의 전쟁계획을 완전히 파탄 시켰다. 초전에서 패배했지만 완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던 프랑스 장군 조프르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투지를 지켰다. 마른느 전투 이후 조프르는 프랑스의 구원자로서 명성과 권위를 얻게 됐다.

존 프렌치

영국 원정군

1914년 당시 세계의 패권국답게 영국은 자기 본토에 대한 공격이 아닌 해외의 전쟁에 직접 개입했다. 오늘 미국의 군사력이 언제라도 본토가 아닌 외국에서 원정군(Expeditionary Force)으로서 전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국군도 프랑스로 원정을 떠났다.

존 프렌치 육군 원수가 지휘하는 영국군은 8월 5일 최전선인 벨기에의 모뵈즈-리카토에 도착했다. 그러나 영국군 총사령관인 프렌치와 현지 군단장 도리안 장군은 오랫동안 대립적인 사이였고 이 전쟁에 대해 상이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8월 22일 몽스에서 연합군의 공격작전이 개시됐고 영국 원정군은 클루그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군의 공격을 지연시켰다.

그러나 벨기에 전선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연합작전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두 나라 군대가 따로 싸우다 보니 프랑스군은 독일군에게 밀렸을 때 영국군과 상의도 하지 않은 채 단독으로 퇴각해 버렸다. 지신의 영토를 지켜야 할 프랑스가 후퇴했는데 원정군인 영국군이 얼마나 열심히 전투를 할 수 있었을까? 영국 역시 퇴각했고 8월 하순 연합군은 서부전선 전역에서 퇴각 중에 있었다.

조프르

상상을 초월하는 인명 피해

영국군은 원정군임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싸웠지만 프랑스군에 실망하고 영국 원정군의 피해에 경악한 영국군 사령관 프렌치 원수는 영국군을 연합군에서 완전히 빼내서 세느강 너머로 철수 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전쟁 장관 키치너경은 프랑스에 직접 달려와 프렌치경의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게 뜯어말렸다.

국가간의 모든 싸움이 전쟁(War)으로 기록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대표적인 연구 프로젝트인 미국 미시건대학의 전쟁 관련 요인 프로젝트(Correlates of War Project)는 역사에 나타난 수많은 국제분쟁 중에서 전투 현장에서 발발한 인명 피해가 1000명이 넘는 경우를 ‘전쟁’ 이라고 정의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 언론인들이 받아들이는 정의가 바로 이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해에 세계 도처에서 20개의 전쟁이 발발했다’는 신문 보도는 인명 피해 1000명 이상의 분쟁이 20개 발발했다는 의미다. 이 같은 정의는 귀납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999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건은 전쟁이 아니냐?’고 따질 필요는 없다. 역사를 살펴보고 전투사망자(Battle Death) 1000명이라는 기준이 가장 무리가 없었기에 선정된 것이다.

즉 1000명의 인명 피해를 발생한 어떤 분쟁도 능히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국제정치 역사상의 큰 사건들이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초기 각국의 지도자들을 경악시킨 문제는 전투 현장에서의 인명 피해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8월 22일 독일군의 공격을 하루 정도 지연시킨 몽스 전투에서 영국군 전사자는 1600명이나 됐고 르카토 지역에서 행해진 방어 전투에서 영국군 제2군단이 단 며칠 동안 입은 인명 피해는 장교 및 병사 7182명에 이를 정도로 처절했다.

참고로 미국이 지난 2003년 3월 이후 2011년까지 거의 10년간 진행된 이라크 전쟁에서의 미군 인명 피해는 질병 사망자 961명 포함, 4488명이었다. 초기 전투에서 가장 혹심한 인명 피해를 당한 영국군은 1914년 10월 14일부터 11월 하순 사이 무려 8만6000명의 병력을 잃는다. 전쟁 방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남겨진 교훈

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어느 나라도 자신이 예상한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예상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초기의 전투들은 1차 세계대전을 ‘얼떨결에 발발한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게 했다. 인명 피해가 도를 넘자 각국은 병력이 이동하며 싸우는 ‘기동전’이 아니라 땅굴을 파놓고 서로 무한정 대치하고 있는 참호전으로 전쟁 방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낙엽이 지기 전에 끝날 것이라고 기대했던 이 전쟁은 앞으로 4년 이상 지속될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초전의 전투 상황들은 치밀한 전쟁계획, 전쟁을 지휘하는 장군들과 병사들의 의지,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지, 뚜렷한 전쟁 목표, 집중의 원칙이야말로 전쟁을 신속한 승리로 이끌 수 있는 필수 조건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손자병법은 ‘전쟁은 속전속결로 승리하는 데 가치가 있는 것이며 전쟁을 잘 아는 장수는 국민의 생명을 맡은 사람이요, 국가의 안위를 좌우하는 주인공이다’(故兵貴勝 不貴久 故知兵之將 民之司命 國家安危之主也. 作戰編)라고 가르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강대국들의 지도부는 이 같은 훌륭한 교훈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춘근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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