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비, 호른과 시진핑
고르비, 호른과 시진핑
  • 미래한국
  • 승인 2015.09.23 08:03
  • 댓글 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교분석] 독일과 남한의 통일외교

독일 통일 과정에서 콜 총리는 미국과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고르비, 독일의 연인 

1989년은 독일 현대사의 하이라이트이자 민족 최대의 시험대였다. 분단·통일을 가르는 역사의 전환기였으며 고르바초프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독일의 운명이 좌우되는 시기였다. 

▲ 박상봉 독일통일정보연구소 대표·미래한국 편집위원

1989년 10월 7일, 고르바초프는 동독 건국 40주년을 맞아 동베를린을 찾았다. 당시 동독은 주민들의 저항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시민들은 매주 월요일 거리로 몰려나와 “우리가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 “슈타지는 물러가라(Stasi raus!)”고 외쳤다.

9월 4일 불과 1000명으로 시작했던 월요 데모는 10월 16일 12만 명으로 급증했다. 월요 데모 7번만의 일이었다. 폭풍전야(暴風前夜), 호네커는 무력진압작전을 계획했고 이 와중에 고르바초프를 맞게 되었다. 건국절 열병식에 이어 군사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호네커는 고르바초프에 의지해 꺼져가는 공산당의 불씨를 되살릴 것을 기대했다. 연단에 오른 호네커는 사회주의 깃발을 더 높이 치켜들고 시위대와 동독 탈출자들을 향해서 “배신자는 조국을 떠나라”며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개혁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며 변화를 주문했다. 

고르바초프의 주문은 마법처럼 동독은 물론 국제사회를 큰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12월 3일, 당(SED)이 호네커를 제명한 것이다. 독일의 미래(통일독일)를 바라보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셈법도 복잡해졌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반발은 예상 외로 컸다. 독일의 미래를 독일 민족에게 맡기자고 했던 고르바초프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독일의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 이런 고르바초프에게 독일은 고르비라는 애칭을 붙여주었고, 아내 라이사가 암 투병할 때는 서독으로 모셔와 극진히 돌봐 주었다. 

가치 공유 vs 좋은 이웃 

동독의 전환기, 막연했지만 통일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읽은 사람은 헬무트 콜 서독 총리였다. 그는 8월부터 시작된 동독의 급변 상황을 매일 빠짐없이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공유했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힘과 영향력을 정확히 읽은 것은 물론, 미국과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미국은 서독의 진심 어린 외교적 노력에 무한 신뢰를 보내주었고 유럽 지역에 평화의 분위기를 연출해 주었다. 미소(美蘇) 정상이 1989년 12월 3일 몰타에서 군축회담을 개최한다고 발표하는 한편, 미국은 소련의 개혁 개방을 적극 지원키로 했다.  

이런 의미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전승절 중국 방문은 미국과 서방세계에 어떤 이미지를 전달했는지 걱정이다. ‘통일대박’이라는 경제적 이익만을 앞세워 서구 문명국가들이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가치들을 소홀히 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면 통일외교의 실패다. 

▲ 1989년 10월 7일 동독의 건국절 기념식에 초청된 고르바초프(左)가 “개혁에 동참하라”고 천명함으로써 이후 호네커가 실각하고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다.

기율라 호른,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준 은인 

기율라 호른 헝가리 외무상은 ‘철(鐵)의 장막’의 빗장을 열어젖힌 인물이다. 동독 혼란기, 해외 탈출도 이어졌다. 서독 대표부는 물론 체코, 폴란드 주재 서독 대사관에는 동독 탈출자들로 가득했다. 

이런 와중에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헝가리가 범유럽 유니온의 평화 축제 행사를 위해 오스트리아 국경을 서너 시간 개방하자 동독 청년 600여 명이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서독 정부의 외교 총력전이 벌어졌다. 서독은 국경을 상시 개방할 것을 요구한 반면, 동독은 1969년 헝가리와의 통행협정을 근거로 개방 불가를 원했다.

개방할 경우 사회주의 동맹과 외교관계는 단절될 것임을 상기시켰다. 체코, 폴란드 등 국경도 전면 폐쇄했다. 동서독 사이의 ‘외교전쟁’은 서독의 승리로 끝났고, 헝가리 정부는 9월 11일 국경 개방을 선포했다. 

개혁 개방의 바람이 불던 것과 막상 빗장을 열어젖히는 것은 전혀 달랐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용기가 독일 통일의 신호탄이 된 것이다. 이 결정이 있은 후 한 달여 만에 2만4000여 명의 동독 주민이 이 루트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시진핑, 제2의 고르비 & 호른 

지난 9월 3일 전승절 군사굴기(軍事@@起)의 모습과 달리 중국의 민낯은 딜레마로 얼룩져 있다. 왜곡된 투자로 유령도시가 생겨나고 성장률 하락으로 농민공의 시름과 불만은 가중되고 있다. G2라고 하지만 13억 인구 중 10억 인구는 하루 3~6달러로 살아가고 있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인구도 2억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신장 위구르, 티베트 등 55개 소수민족과의 갈등은 폭력과 테러를 양산하고 있으며,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14개 나라들은 모두 중국과 분쟁을 빚고 있다. 

20년 후 중국이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는 주장은 점점 그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다. 중국은 대국(大國), 남한은 소국(小國)이라는 패배주의적 사고는 끝났다. 우리가 중국을 필요로 하는 만큼 중국도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빨리 적응할 때다. 

올해 중국은 지난 30년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위기를 맞았다. 주가 급락에 마지노선으로 여기던 7%대 성장률 달성이 어려워졌다. 정부의 백약이 무효했다. 시진핑은 보다 과감한 정치 경제적 개혁과 개방 없이는 중국의 미래도 낙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이다. 1980년대 소련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이때가 우리가 중국의 좋은 이웃이 되어주고 G2에 걸맞는 역할을 유도해 나갈 절호의 순간이다. 독재자, 장기집권자, 학살자 등 그들만의 2부 리그를 끝내고 인권, 자유, 민주 등 인류 공동의 가치를 중시하는 G2로 탈바꿈하도록 도와주자.

선택은 시진핑 주석의 몫이다. 시진핑이 제2의 고르바초프, 제2의 호른으로 거듭난다면 한반도와 동북아는 21세기 기회의 땅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3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345 2016-07-06 11:59:50
기술배우는것도그래

2345 2016-07-06 11:58:35
이렇게잘먹으면 밥값해야하는데책보면졸고일시키면싫다하니
책보면잡념 순간집중해야하는데 시험치면떨어지고

2345 2016-06-01 13:37:15
지끼면뮈하나 지낀익나이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