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긍(自矜)의 어제와 오늘
자긍(自矜)의 어제와 오늘
  • 이승수 연세대 석삭 과정
  • 승인 2016.08.12 03: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년 발언대] 8·15 건국 특집

수많은 위기를 슬기롭게, 때로는 아프게 극복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온 자랑스러운 역사가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

겸손과 자기비하(自己卑下)는 다르다. 겸손한 사람에겐 존경을 표하지만 자기비하에 젖은 사람에겐 동정이 따른다. 국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로부터 ‘한강의 기적’이란 찬사를 받아온 대한민국을 그 국민 스스로가 ‘헬 조선’이라 비하함은 부끄러운 일이다. 

▲ 이승수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석사 과정

수저론과 헬조선으로 대표되는 자기비하의 국가관은 왜곡된 역사 인식과 오도된 현실 진단에 기초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란 이 한 마디는 지난날 대한민국이 일궈낸 성공을 전면 부정하는 좌익들의 패배주의적 역사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쉽게 접하는 교육과 문화 현실에는 이런 반(反)대한민국 사관이 깊숙이 침습해 있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한반도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정립한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교과서에 ‘독재자’란 낙인으로 등장하고, 500년 조선왕조가 한 번도 해결하지 못했던 기아(飢餓)를 극복한 박정희 대통령은 ‘인권유린과 유신독재’로 기록되고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저주하는 소위 민주화 세력은 그들이 자랑스레 말하는 ‘민주화’가 국부(國富) 이승만이 뿌리 씨앗으로부터 잉태되어, 박정희 정부의 경제성장을 밑거름 삼아 오늘날 만개했다는 역사적 진실에는 고개를 돌린다. 

민주화 세력만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일궈낸 주역이라는 소아적 선민 의식은 그들에겐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그러나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를 뿌리 내리고, 그것이 제도화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은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를 배격한 이승만과 중산층을 길러낸 박정희 두 지도자다. 그들이야말로 민주화의 참된 주역 아닌가? 

2차 대전 종전 후 신생독립국 가운데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로 출발한 국가들과 전체주의-공산주의로 시작한 국가들을 비교해보면, 후자는 수십 년의 정체(停滯)와 희생을 거쳐 결국 자유민주주의로 돌아섰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향유하는 국가들을 살펴보면 인도를 제외하곤 모두가 선(先) 산업화 후(後) 민주화의 경로를 걸어왔다. 

대한민국이 걸어온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선택(이승만), 민주화에 앞선 경제성장(박정희)이 보편타당한 역사의 발전 경로였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역사를 부정하고 타율(他律)에 의존한 비정상으로 매도하는 것은 외눈박이의 역사 인식에 불과하다. 

지난 68년의 대한민국 역사에서 과오(過誤)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외세의 개입이 존재했으며 우리 스스로의 오판과 실수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날의 과오들을 가지고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정당하지도 않고 현실에 맞지도 않다.

만약 진정으로 대한민국이 불의와 기회주의에 지배당해온 역사라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물질적·정신적 자유와 풍요는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잘못된 역사 인식이 초래한 국론 분열 

바늘구멍보다 좁다는 취업의 문에 오르기 위해 오늘도 스펙 쌓기와 ‘자소설’에 골몰하는 청년들이 어디에 있는지 보라. 자동냉방이 갖춰진 브랜드 커피숍에 앉아 얇은 노트북을 켜고 산뜻하게 커피를 마시며 입사지원서를 적고 있지 않은가. 배낭 하나 메고도 전국일주를 할 수 있는 철도와 도로가 전국 곳곳에 갖춰져 있고, 초고속 인터넷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필요한 지식을 찾으며 소통하고 있지 않은가. 

공공연히 국가 원수를 모욕적으로 희화화하며, 대한민국을 비정상국가로 비난하는 좌익 언론과 노조는 오늘날 언론의 자유(방종)를 누구보다 방만히 누리는 기득권이 아니던가.

자본가의 착취가 아닌 기득권 정규직 노조에 의해 생계를 위협받고 적은 임금마저 쥐어 짜이는 대한민국의 비정규직,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보면 죽은 마르크스가 무덤에서 놀라 벌떡 일어날 정도다. 억대 연봉에, 대기업 정규직을 신분 세습처럼 물려주는 이들을 과연 사회적 약자라 할 수 있는가. 

오늘날 대한민국에 불의와 기회주의 세력이 존재한다면 지난날 대한민국이 성취한 경제성장과 사회 발전에 무임승차하여 기득권을 누리는 좌익세력, 강성노조 바로 그들 자신이다. 국가로부터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리는 이들이 국가를 부정하는 역설적 현실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우울하게 만드는 풍경이다. 

오류의 역사 인식과 현실관은 한국 사회에 불필요한 국론 분열을 야기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드 배치 문제가 대표적이다. 학생들에게 역사의 공과(功過)를 균형 있게 가르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왜곡과 궤변을 통해 대한민국이 건국되어서는 아니 되었을 국가, 부정과 불의로 점철된 국가로 매도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국가 전복(顚覆) 음모이자 반역(反逆)이다. 

알려진 대로 현행 역사교과서에는 자기비하의 패배주의적 역사 인식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이러한 반(反)대한민국 사관이 그대로 학생들에게 전수될 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헬 조선’ 그 자체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부정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굴종(屈從)과 예속뿐이다. 자기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하는 국민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어렵게 발행된 교학사 역사교과서 채택을 강박·공갈로 무산시킨 좌익세력은 교과서 선택은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 앞에 ‘자유’란 말을 붙이는 데 그토록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좌익들이 자유 시장 질서를 운운함에 기가 찰 노릇이다. 

좌익들의 사대주의 근성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국가에 대한 자학적 수치심을 주입하는 교육은 좌익들의 반(反)대한민국 전사 양성 투쟁에 불과하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이러한 대한민국 파괴행위에 대한 정부의 정당한 방어적 조치였음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사드 배치도 정상국가에서 이해할 수 없는 갈등이다. 주적(북한)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국민과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사드를 배치하겠다는 것이 왜 논란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드 배치 결정에  유언비어가 먼저 도지는 것을 보면 한국 사회의 지력(知力)은 여전히 광우병 파동에서 한 걸음조차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자기비하가 몸에 밴 좌익들은 사드 배치에서도 사대주의적 기생(寄生) 근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미국을 향해선 대책 없는 전시작전권 환수, 주한미군 철수를 ‘자주’란 구호로 부르짖던 좌익들이 제주 해군기지 건설, 한미연합훈련, 사드 배치에서는 중국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다. 

중국이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켜줄 국가인가? 중국이 북핵 포기와 북한 체제 변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던가? 대체 왜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중국에게 내맡겨야만 하는가? 중국에 지극정성 사대(事大)한 조선이 그리워서인지, 좌익이 비빌 언덕은 이제 중공(中共)뿐이라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좌익들의 중국 눈치 보기는 그저 환멸과 조소만이 나올 뿐이다. 

불만 없는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상천국을 만들겠다던 사회주의의 역사적 대실패가 이를 분명히 보여줬다. 대한민국의 지난 68년은 수많은 질곡과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 위기를 슬기롭게 때로는 아프게 극복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온 자랑스러운 역사가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대한민국이라는 자랑스러운 유산을 더 나은 대한민국으로 멋지게 가꿔가는 일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