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제자, 그는 선각자였다
나의 제자, 그는 선각자였다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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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서울법대 명예교수
김상철 회장은 서울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사법연수원 수료 후 서울형사지법 판사로 임관됐다. 재직하면서도 바쁜 시간을 쪼개어 서울대 대학원에서 1977년 법학석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은 ‘신체의 자유의 절차적 보장–인신구속제도를 중심으로’였고 129면에 달하는 좋은 논문이었다. 이 논문은 논자의 판사 경험을 살린 실증적 연구였으며 인신구속이 남발됐던 당시에 인신구속제도의 적법절차를 확립하기 위한 것으로 높이 평가됐다.
 
1998년에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재판청구권의 헌법적 실현을 위한 연구’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그동안 판사와 변호사를 하면서 경험한 것을 살려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확보하기 위한 사법제도를 논한 것이 특색이다. 이 논문들의 지도교수는 나로 돼 있으나 실제로 크게 지도를 하지 못했고 실무에 밝은 논자가 독창적으로 쓴 논문이었다.
 
김 회장은 학부 시절부터 국민의 기본권에 관심이 많아서 판사로 임관된 뒤에도 인권 판사로 유명했으며 변호사로 있으면서도 국민의 인권 신장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젊은 판사 시절에는 황석연 부장의 배석으로 김대중 긴급조치사건을 맡아 고민하기도 했는데 그런 것 때문에 나중에 원주지원 판사로 전임됐고 이것이 변호사 개업의 동기가 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는 변호사 개업 후에도 인권 변호사로 큰 시국사건의 변호를 맡았다. 특히 북한인의 인권보장에도 관심을 가지고 탈북난민보호운동을 창시해 본부장을 맡아 유엔에 북한인권의 참상을 알리고 북한인의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김 회장은 1993년 약관 46세로 서울시장에 임명됐다. 김 시장은 젊은 패기로 서울시의 적폐를 해소하기 위해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젊은 시장의 개혁 드라이브에 기득권을 가진 고위직 시청 직원들의 반발이 심했다. 당시 김 시장은 중견 언론인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 이유는 과거 진보진영에서 공생하다가 우파진영으로 옮긴 김 시장에 대한 반발도 있었던 것 같다. 이들 기자들이 보통 주택을 마치 대저택인 것처럼 사진을 찍었고 농장에 있는 작은 정자를 불법 건물로 낙인찍어 대서특필한 바람에 7일 만에 시장직을 사임하게 됐다.
김 시장이 노회한 공무원이나 철부지 기자들의 농간에 따라 사임하지 않았다면 서울시의 부정부패는 발본색원됐을 것이고 서울시민의 생활은 훨씬 좋았을 텐데 아쉽다.
 
언제나 새 길을 열었던 선각자
 
김 회장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법학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일념으로 고시계사를 인수했다. 그는 당시 법학에 관한 학술지가 전무했던 것을 한탄하면서 수험지 고시계를 학술발표지로 겸하도록 성격 변화를 기획했다. 그는 많은 교수들을 편집자문위원으로 모시고 월 1회 편집회의를 개최했다.
 
김 회장은 당시 태평양아시아협회 회장, 한미우호협회 회장 등의 바쁜 일과 중에도 편집회의에는 꼭 참석해 법학 발전과 시험개혁활동 등을 지도했다. 나도 김 회장의 요청으로 10년간 편집자문위원을 맡아 회의 때마다 김 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때 젊은 학자들에게 발표의 기회를 주도록 했고 1월호에는 반드시 1년간의 연간 학회 회고와 판례 회고를 게재케 해서 학문과 법조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고시계사에서는 김 회장의 뜻에 따라 학문서적과 수험서적을 발간해 학자들과 수험생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유명한 교과서들이 출판됐고 아직도 속간돼 있어 법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됐다.
 
김 회장은 좌파정권이 성립된 뒤 정치가 편향돼 가고 사회가 분열되는 것을 걱정해 2002년에는 미래한국신문이라는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과거 진보진영의 문제점을 경험한 김 회장이 남북관계나 세계평화문제를 걱정하는 우국지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진보진영의 필자는 수두룩했으나 보수진영의 논객이 드물었던 당시에 미래한국의 발행은 큰 모험이었다. 나는 김 회장의 요구에 따라 몇 편의 논설을 쓰기는 했으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김 회장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병마에 시달리고 타계했으나 그의 유지는 그대로 후대에게 이어져 미래한국이 계속 발간되고 있어 마음 흐뭇하다.
 
김 회장은 두뇌가 명석하고 사회적인 지도력이 있어 우리나라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인생 90년의 수명을 다했더라면 국가에 더 큰 공헌을 했을 텐데 그 큰 꿈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영면하게 돼 아쉽기 짝이 없다. 김 회장의 자녀들이 그 사업들을 잘 이어가고 있으니 저승에서라도 안심하고 가족과 국가의 장래를 이끌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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