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명재상을 찾아서]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려 했던 ‘민생 재상’ 김육(金堉)
[조선시대 명재상을 찾아서]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려 했던 ‘민생 재상’ 김육(金堉)
  • 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 교장
  • 승인 2018.06.1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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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金堉 1580~1658년)은 조광조와 더불어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이 고조할아버지이긴 하지만 할아버지는 군자감판관, 아버지는 참봉이었으니 그다지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다.

육(堉)은 당색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서인(西人)에 속한다. 그것은 아버지 김흥우(金興宇)가 파주의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업한 때문이다. 이경석(李景奭)이 쓴 비명(碑銘)이 짧게 전하는 젊은 시절 육의 모습이다.

“임진왜란 때 산골짜기로 피난 가 살면서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고 문장이 성대하게 극치를 이루었으므로 우계 선생(-성혼)이 매우 칭찬했다.”

25살 청년 육은 1605년(선조 38년)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으로 들어가 문과 준비를 했는데 1609년(광해군 1년)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5인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소를 올린 것이 문제가 돼 문과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자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 청덕동에 은거했다. 이 때부터 스스로 호를 잠곡(潛谷)이라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

김육(金堉)

10여년이 지난 1623년(인조 원년) 반정(反正)이 일어나 서인의 시대가 활짝 열리자 재야의 현인으로 추천받아 의금부 도사에 임명됐다. 이듬해 봄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인조가 공주(公州)로 피난 갔을 때 행궁(行宮)으로 달려가 문안 인사를 올리니 인조가 불러 만나보고는 음성 현감(陰城縣監)으로 발탁했다. 그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것은 이 해였는데 이미 44살이었다.

늦은 출발이었으나 진급은 빨랐다. 서인들이 대체로 주자학의 관념에 빠져 있었지만 육은 민생과 실질에 큰 관심을 쏟았다. 관직 생활 15년만인 1638년 6월 충청도 관찰사에 올랐는데 이때 육은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한편, 수차(水車-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했고 <구황촬요(救荒撮要)>와 <벽온방(瘟方)> 등을 편찬, 간행했다.

이후 인조의 총애를 받아 조정으로 불려 올라와 형조참의 겸 대사성, 대제학. 대사간, 도승지 겸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 이조참판 겸 비변사유사제조, 형조판서 겸 선혜청제조, 우참찬, 대사헌, 예조판서, 도총부도총관, 개성부유수 등의 눈부신 승진을 거듭했다. 또 중국에 여러 차례 다녀왔는데 이 때도 현장에서 눈여겨 봤던 문물들에 착안해 화폐의 주조와 유통, 수레의 제조 보급 및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 등을 주장했다.
육의 이력 중에서 특이한 점은 그가 병자호란을 조선이 아닌 명나라에서 맞았다는 점이다. 당시 육의 모습을 비명은 이렇게 전한다.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나가 학문을 권장하고 군사를 격려하고 밀린 세금을 탕감하고 노인을 우대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임기가 차자 하지사(賀至使)로 차출되었는데,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가는 것을 꺼리었으나 공은 태연히 길을 나서 8월에 남신구(南口)에 정박했다. 그때 청(淸)나라 군사가 이미 명(明)나라 수도 연경(燕京)을 육박하는데도 도독(都督) 진홍범(陳洪範)은 군사를 거느리고 관문(關門) 밖에 있는지라 공이 서찰을 보내어 대의(大義)로 격동시키니, 진홍범이 부끄럽게 여기어 그 군졸이 11월에 연경에 도착하였다.

그때 천하가 전란에 빠졌는데, 공만 일찍 하례(賀禮)의 사절로 도착하였으므로 예부 상서(禮部尙書) 강봉원(姜逢元)이 위로하고 절일(節日)에는 함께 참례(參禮)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대우였다. 예부(禮部)에서 서적을 사는 것을 금지하였으므로 공이 극력 변명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 2월에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기 앞서 명나라에서 관례에 따라 연회를 베풀어 주려고 하자 공이 국모(國母-인열 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의 상중(喪中)이라고 하여 사양하고 또 은(銀) 값을 쳐서 주는 것을 사양하였다. 공이 우리나라가 전란에 휩싸였다는 소식을 듣고 동쪽을 향해 통곡하니, 중국 사람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었다.”

중용(中庸)을 추구한 르네상스적 인물

1649년 5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9월에 마침내 우의정이 됐다. 이에 육은 대동법의 확장 시행에 적극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서인 내에서 송시열의 산당(山黨)에 맞서 한당(漢黨)의 수장이었던 육은 송시열과 노선을 함께 하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의 반대로 충돌해 중추부 영사로 물러난다. 그러나 이듬해 봄에 청(淸)나라에서 사신 네 명이 왔는데 영의정 이경여(李敬輿)가 그들의 견책으로 인해 사직하자 일단 육이 대신 맡았고 훈련원 도제조와 군자감 도제조를 겸임했다. 겨울에 원임(原任) 정태화가 영의정이 되고 육은 그 다음으로 좌의정이 됐다.

육은 효종 6년까지 세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다. 그는 힘이 있는 자리에 갈 때마다 대동법 실시를 추구했다. 1654년 6월에 다시 영의정에 오르자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쳐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건의했다. 그러나 이 건의에 대한 찬반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죽어 이 사업은 유언에 따라 서필원(徐必遠)에 의해 뒷날 성취된다. 육은 서인이면서도 강한 당파를 추구하지 않고 정쟁에도 휘말리지 않으면서 오히려 대동법과 저술에 전념한 르네상스적인 인물이다. 이는 그가 지은 저서들의 내용을 통해 확인된다.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미 앞서 말한  <구황촬요(救荒撮要)>와 <벽온방(瘟方)>을 간행하여 여러 도에 반포할 것을 요청하였고 <기묘팔현전(己卯八賢傳)> 및 <당적(黨籍)>과 안팎의 세보(世譜)를 간행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 있을 때에도 조석의 여가에 책을 가까이하였으므로 지지(地志), 병략(兵略), 복서(卜筮)의 방면에까지 두루 통달하였다. 일찍이 서양(西洋)의 역법(曆法)을 논하여 역대를 거슬러 올라가 역서(曆書)의 원류(源流)를 고치는 등 그 지식이 전문가 수준에 이르렀다. 나이가 고령(高齡)에 이르러서도 과정을 정해 쉬지 않고 글을 읽었고 글짓기를 좋아했다
고 한다. 그밖에 <황명기략(皇明紀略)>, <유원총보(類苑叢寶)>, <종덕신편(種德新編)>,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기묘록(己卯錄)>, <송도지(松都志)> 등을 저술해 당시에 이미 널리 읽혔다.

한때 미미했던 그의 집안은 김육으로 인해 조선 후기에는 김장생 집안 다음 가는 벌열로 성장하게 된다. 큰아들 김좌명(金佐明)은 문과에 합격해 지금 병조판서가 되었고, 막내아들 김우명(金佑明)은 국구(國舅-현종의 장인)로서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지고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 이경석이 묘비를 마치며 쓴 글은 지금도 울림이 있다.

“아! 태어나 선비가 되어 정말로 뜻이 있는 자라면 그 누가 임금을 만나 세상을 구제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때를 얻기가 어렵고 때를 얻어도 시무(時務)에 통달하기가 어렵다. 공은 조년(早年)에는 독서하는 착한 선비가 되었고 만년(晩年)에는 백성에게 은택을 입히는 어진 정승이 되어 두 조정을 만나 시종 한결같은 정성으로 섬겼으니, 공은 비록 고인(古人)에게 비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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