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미나리’, 정착하지 못하는 개척민의 노마드
[영화평] ‘미나리’, 정착하지 못하는 개척민의 노마드
  • 조희문 영화평론가
  • 승인 2021.05.0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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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를 보면서 머리에 떠도는 말은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한숨 섞인 푸념이다.

세상을 포기한다는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온통 희망만 있다는 뜻도 아니다, 살다 보면 별일을 다 겪게 되고, 세월이 지나다 보면 어찌어찌 넘어가고 해결된다는 뜻이다. 부모가 죽고 자식이 죽어도 산 사람은 살아서 견딘다.

슬퍼도 억지로 참고 견디다 보면 세월이 지나면 그럭저럭 견딜 만하거나 차츰 기억에서 지워나가기도 한다.

이민 가족 제이콥 일행은 미국 아칸소 주 시골에 터를 잡으려고 한다. 아내 모니카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들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도시에 살았으면 한다. 때때로 남편과 말싸움을 벌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엄마 모니카가 일자리를 구한 탓에 아이들 돌보는 일이 난감하다. 하는 수 없이 친정어머니에게 구원을 청한다. 친정어머니 순자는 전형적인 한국 할머니, 딸에게 준다며 고춧가루, 멸치볶음 같은 반찬거리를 담아왔는가 하면 적당한 개울을 찾아 미나리 씨를 잔뜩 뿌려 놓는다. 돌보지 않아도 잘 자란다며.

손자 데이비드는 할머니와 같은 방을 쓰는 것이 마땅치 않지만 엄마 모니카의 설득 덕분에 하는 수 없다.

아버지 제이콥은 가장으로서 뭔가를 보여주는 일에 골몰한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은 자기 힘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어야 한다, 가든을 만들겠다면서 머리 속으로 농장을 그리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할머니는 손자 손녀를 돌보는 일에 애쓰던 중 갑자기 뇌경색에 걸려 반신불수가 된다. 사위나 딸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더구나 할머니는 쓰레기를 태운다고 불을 피우다 창고를 홀랑 태워 버리고 만다. 사위 제이콥이 채소 납품계약을 막 마치고 오던 길이었다. 가장의 꿈은 그렇게 불길과 함께 사라진다.

하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주변 사람들은 생각할 때도 그는 잘 자라고 있는 미나리를 보면서 위안을 얻는다.

‘미나리’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 출신의 가족. 이민 과정이나 한국에서의 삶 같은 주변 이야기는 다루지 않는다. 미국 사회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한국인 가족, 그들이 세운 꿈을 향해 가는 모습만 그릴 뿐이다.

남편과 아내의 생각은 서로 다르지만 남편은 진심을 다해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고, 아내는 그런 남편을 결국 이해하고 동의한다. 할머니와 손자는 살아온 환경이 다른 만큼 서로를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지만 할머니의 진심은 손자 데이비드의 마음을 움직인다.

장모가 창고를 태웠을 때도 사위는 원망을 하는 대신 어쩔 수 없이 상황을 받아들인다. 실제 생활에서도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태연한 모습이다.

미나리 밭을 보면서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것은 고단한 삶에서 찾는 희망이다. 수확한 농작물이 불탔다고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속삭이듯이. 그러나 제이콥 가족이 그 곳에 정착했다는 것인지, 다른 어느 곳으로 또 떠나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나리’는 훗날 영화감독으로 성장한 데이비드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며 이 영화를 만든 정이삭 감독의 자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를 통해 흐르는 정서는 삶에 대한 낙관과 가족 간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화재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는 잔잔하다. 극적인 긴장감을 기대하고 왔던 관객이라면 실망할 정도로 클라이막스나 반전은 없다. 이는 정이삭 감독의 기억 속에 이런저런 일로 부모가 언성을 높이며 다툰 적은 있지만 심각하게 굴곡진 일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면 있었다 하더라도 이야기에서 빼버렸거나. 

가족이 자동차를 타고 아칸소의 시골을 향해 가는 첫머리는 서부영화의 컨벤션을 닮았다. 개척민을 태운 포장마차는 미지의 땅 서부를 향해 나아가고 그곳에 농장과 마을을 만든다.

제이콥의 가족이 도시를 뒤로 하고 한적한 시골 땅에 농장을 만들겠다는 구성은 서부를 향해 포장마차를 몰고 가는 개척민과 흡사하다. 개척민 중에서는 무사히 정착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제이콥 가족이 아칸소의 시골 마을 벌판에 무사히 정착했는지 아닌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개척민들을 괴롭히는 악당은 이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화재가 그 역할을 할 뿐이다. 제이콥의 힘든 결실을 모두 태워 버린 화재는 심각한 타격을 줬을 테지만 영화는 그것으로 인해 제이콥과 가족들의 생활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아들 데이비드와 함께 개울에 자란 미나리를 수확하는 모습으로 건너뛴다. 아무도 돌봐 주지 않아도 잘 자란 미나리처럼 제이콥 가족도 어쨌든 무사할 거라는 암시처럼.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는 부분은 또 있다. 제이콥 가족이 아칸소 시골로 가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제이콥이 가장으로서 번듯한 무언가를 성취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강박처럼 되뇌는 모습을 통해 이전의 삶에서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미뤄 헤아릴 뿐이다.

이 또한 개척민들의 삶과 겹쳐 있다. 개척민들은 어떤 이유로든 자신이 속해 있던 커뮤니티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경우들이다. 그들의 삶이 안락하고 풍족했다면 커뮤니티를 떠날 이유가 없다.

제이콥 가족이 스스로 떠났든 떠날 수밖에 없었든 어쨌든 그가 속해 있던 커뮤니티로부터 떠난 것이다,

제이콥은 두 번 이상의 떠남을 경험했다. 제이콥의 부모 세대가 이민을 결심한 것은 나름의 결단이었지만 그 배경이 가난 때문이었는지, 더 잘살아 보겠다는 희망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무슨 이유를 붙이든 자신의 커뮤니티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미국에서의 새로운 생활 역시 평탄치 않았던 듯하다.

제이콥의 생활 역시 원했던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칸소의 시골로 떠난 것은 또 한번 새로운 꿈을 찾기 위한 선택이다. 개척민들의 희망이 시대가 달라졌다고 달라진 것이 아니라 수백 년이 지난 뒤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현대화 되고 도시화 된 지금에도 개척민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메리칸 드림’이 모든 사람에게 성취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여전히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야 하는 것은 잔인한 현실이다.

제이콥 가족은 한국인 이민 가족이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떠나는 대다수의 미국인일 수도 있다. ‘미나리’가 한국인 이민 가족의 서글픈 정착기 같지만 평균적인 미국인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다만 그 꿈을 성취한 경우가 아니라 여전히 그것을 좇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징하는 것이다. ‘미나리’에 흐르는 정서가 애잔하고 슬퍼 보이기까지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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