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평]② ‘강만길 역사학’이 죽어야 대한민국이 산다
[역사비평]② ‘강만길 역사학’이 죽어야 대한민국이 산다
  • 이주천  미래한국 10기 편집위원·전 원광대 교수
  • 승인 2023.07.26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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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3일 강만길 교수(전 고려대 명예교수)는 만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필자의 마음은 착잡했다. 필자에게 잊을 수 없는 두 스승 중 한 분이다. 한 분은 어린 필자에게 큰 기대를 걸고 격려해준 국민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변00)이고, 또 한 분은 필자에게 역사학이란 학문의 길에 동기부여해 준 강만길 교수였다. 

강 교수의 민족주의에 심취한 필자는 독일로 유학 가서 독일 민족주의를 공부하려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강 교수는 거의 휴강이 없었고, 강의실은 초만원이었다. 제자들에게 너그럽고 인정이 많아, 많이 베풀었으며 추종하는 제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학자로서 되돌아보면, 마냥 ‘姜비어천가’를 부를 수 없다. 그는 한국역사학에 주사파 운동권의 놀이터가 되도록 빗장을 열어줬으며, 역사학의 방향을 오도(誤導)한 장본인이다. 그 결과 건국-산업화를 주도한 우익이 오늘날 역사전쟁에서 좌익에게 패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70년대 유신체제 시절 강의 내용을 정리한다면, ①강의를 ‘우리민족으로’ 시작하여, 정체성론과 타율성 등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민족사관을 정립하자고 강조하고, ‘우리민족의 과제’를 지적한다. ②조선은 일제가 식민통치를 안했으면 자생적 상업자본주의 발달로 산업화(근대화)되었을 것이다. ③반일, 항일의식을 심어주고 친일청산이 숙제다. ④항일운동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독립운동 업적도 인정해야 한다. ⑤건국의 정통성은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의 중경임정에 있으며, 통일정부안을 거부한 이승만의 단정 수립은 반쪽 정부로 잘못되었다. ⑥이승만은 문민독재자이고, 친일파 청산에 미온적이다. ⑦박정희는 만주괴뢰국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출신의 친일경력의 장교로 5.16쿠데타로 집권하여 문민통치의 오랜 전통을 파괴했다. 

필자는 학부 시절 강 교수 강좌를 전부 수강했었다. 강 교수는 분단으로 인한 민중의 고통과 분단체제에서 건국-단정 과정의 정통성 문제에 대해 자주 언급하면서도, 북한 체제와 공산주의 이념 문제에 대해서는 ‘노코멘트’로 일관했었다. 중국 공산주의 문제도 침묵했다. 
이승만 정부 시절의 친일파 청산이 미온적이라고 자주 비판했지만, 북한의 친일청산에 대해서는 남한과 비교하여 어떻게 진척되었는지 뚜렷한 근거나 자료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답답했던 강 교수는 후일 김대중 정부 이후 남북한의 역사학자들이 한때 교류가 활발했을 때, 북한 학자에게 북측의 친일파 청산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그에 대한 자료를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한 적이 있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6월 23일 별세한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6월 23일 별세한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강만길의 역사인식론은 민족, 민중, 통일이 키워드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이, 강만길의 역사인식론은 민족, 민중, 통일이 키워드다. 이런 키워드는 국제정세의 평화무드와 한반도 내부의 구심력이 외세의 원심력에 저항할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할 때 유용한 것이다. 

이것은 2006년부터 2017년까지 6차에 걸쳐 핵실험을 한 북한의 핵위협으로 인해 한국이 처한 심각한 안보위기와 트럼프 행정부 이후 한층 격화되는 미중패권경쟁, 그리고 2022년 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신냉전 질서와는 적합성이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신냉전 기류로 남북의 건설적 대화나 협상은 더 어렵게 되었다. 당연히 강만길의 역사인식(민족, 민중, 통일)은 시대적 적응력을 상실하여, 시대착오적 ‘낡은 레코드판’이 되었다. 

강 교수는 친일청산과 통일정부라는 대의명분에 광적으로 집착하다 보니 역사가로서 필요한 덕목과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특히 지도자의 결단과 역할을 의도적으로 도외시되는 측면이 강하다. 이것은 민중사학자들의 공통적 결점이다. 탁월한 역사가의 반열에 등재하려는 야심을 품었다면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피투성이 난산(難産) 끝에 간신히 탄생한 옥동자처럼 건국된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고뇌하는 내면 세계의 흉중(胸中)을 그려내려고 몸부림쳤을 것이다. 결국 인품과 그릇의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남한만이라도 단정(單政)을 세워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건국을 추진한 것이나, 6·25전쟁 막바지 휴전협정시 미군철수(49.6)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미국을 한반도에 묶어둠으로써 훗날 한국의 지속적 경제성장을 이뤄내는 버팀목이 된 이승만의 ‘고독한 결단’을 평가하는 데 아주 인색하다. 고집불통의 강 교수에게는 세월이 흘러도 건국세력과의 화해는 없었다. 

4·19세대가 “이제는 이승만 대통령과 화해하자”고 현충원을 참배했지만. 그에게 이승만은 단지 ‘문민독재자’로 항존(恒存)할 뿐이었다. 남북한을 수십 차례 자가용으로 왕래하면서 북한 체제에 한없이 너그러웠기에 김일성-김정일의 흉중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강만길이 아니었던가? 

강 교수는 마산에서 중학교 5학년 시절 6·25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6·25동란에 대한 전쟁관은 불투명하다. 마산 외각까지 북한군이 침투하여 나라가 그야말로 풍전등화에 처했지만, 공산침략자들에 대한 인식은 이은하의 노래 제목처럼, ‘아리송해’를 연상케 한다. 6·25를 북한의 김일성에게 강한 책임을 묻는 남침전쟁이 아니라 책임 소재가 애매한 ‘남북전쟁’과 ‘동족상잔’, 등가식으로 묘사했다. 
김일성의 남침 야욕에 대한 비판보다 “내일은 평양에서 모래는 신의주에서”라고 읊었던 신성모 국방장관의 ‘북진통일’ 허장성세를 힘줘 비판한다. 그는 마산에서 북한 인민군 포로와 사상자를 목격했는데 인민군 병사가 중학생 나이로 매우 어려서 (동정심에 어린) 충격을 받았다고 진술한다. 

그러다보니 김일성의 전쟁책임론이나 전쟁 발발 주체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고, 북한 인민군과 남로당 좌익들의 양민 학살 만행에 대한 인식이 실종된다. 강정구 교수의 ‘김일성의 통일전쟁론’이란 도발적 발언(2005)으로 겪은 곤욕을 목격하여, “6·25전쟁은 실제로 무력통일을 위한 ‘남침’으로 시작되었고,..북쪽에 의해 통일될 뻔했다.”(‘역사가의 시간’, p.115)고 마지못해 기술하여 우익의 공세를 피하려 한다. 

강만길 교수의 저서 ‘역사가의 시간’
강만길 교수의 저서 ‘역사가의 시간’

6·25에 대한 전쟁관 불투명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남침을 사주한 남로당의 박헌영과 남침을 주도한 북한노동당의 김일성이란 주체가 생략되어 있고, 대한민국의 ‘공산화(적화)’라는 용어보다는 ‘통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이다. 6·25동란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막강한 군사력 지원과 이 두 독재자들의 승낙으로 김일성이 무력에 의한 통일을 달성하려고 했던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에는 ‘이 잡듯이’ 찾아봐도 김일성의 전쟁에 대한 책임을 통렬하게 지적하는 분노나 비판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크리스천이 아닌데도, 마치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모습이다. 향후 협상에 의한 평화통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지난 과거를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대북적개심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6·25전쟁을 침략전쟁으로 보면 전후 상당 기간 그랬던 것처럼 남침이냐 북침이냐가 문제의 초점이 되고, 그 뒤에는 침략한 쪽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과 복수심이 항상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원한, 적개심, 복수심을 가지고는 평화통일을 할 수 없다.“ (p.114). 
평생 동안 일본에 36년 식민통치에 대해 ”철저하게 사과하고 반성하라“고 촉구하고, 이승만 정부를 향해 친일청산을 요구한 반일노선과는 달리,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북한에 대해서는 무한한 민족애를 과시한다. 

 중학생 강만길은 마산에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거기에서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미군부대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술과 담배를 배웠지만,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에 대해 덤덤하게 서술하면서 고마움이 거의 배어 있지 않다. 하기야 미군정이 김구가 아니라 이승만에게 권력을 이양한 점에 불만이 많았던 강 교수는 6·25동란에서도 미국의 참전에 대해 냉정한 태도를 견지한다. 왜 그런 태도를? 강 교수는 미군이 참전한 이유를 한국방어가 주목적이 아니고, 일본의 공산화 방지를 위해 할 수 없이 참전했을 것이라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6·25전쟁의 참화를 몸소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강 교수는 부국강병책을 부르짖은 통상적 지식인과는 달리 반군(反軍) 평화사상을 발전시킨다. 그는 국군을 강군(强軍)으로 거듭날 것을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군대를 ‘제국주의 시대의 산물’이라고 경멸한다. 

군대는 “인간사회가 미개해서 전쟁이 문제 해결의 최고 수단이던 시대나 약육강식의 제국주의가 활개치던 시대의 산물이다.” “군대조직은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이기에 궁극적으로 폐지되어야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전쟁이 그치지 않는 한 군대가 필요악(必要惡)이라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논리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조직 중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것의 하나가 군대라는 생각이다...군대가 필요 없는 세상, 그것이 곧 인류사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상,”(p.133). 

즉 인류가 하나의 평화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최종 지향점이라고 하여 영구평화론을 제창한 독일 철학자 칸트의 제자인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사적으로는 군대를 가기 싫어하는 젊은 층으로부터 인기와 존경을 얻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는 분단체제에서 안보에 대한 경각심과 국방력의 약화를 선전선동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말았다. 

강 교수는 유명세를 타고 자신의 전공도 아닌 안보 및 국방 분야에까지 거침없이 발언한다. 한국이 차츰 병력을 감축해야 하고, “의무병제를 폐지”하라고 역설한다. 명분은 대한민국의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또 후진국 딱지를 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p.134). 한국이 의무병제를 버린다면, 국방비에 대한 국가의 재정부담이 가중되고 지상병력의 약화를 초래할 자충수가 된다. 의무병제 존속은 문화 수준 문제 이전에 안보 문제이고 생존의 문제임을 간과하고 있다. 

현재 한국은 북한, 중국, 러시아 등 3개 전체주의국가의 위협과 더불어 북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하는 위중한 안보 상황에 처해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교훈은 재래식 전쟁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은 0.78의 세계 최저 출산율로 향후 인구절벽의 위기에서 재래식 병력의 급감을 초래하는 사태에 직면한다. 오히려 의무병제의 개선안을 마련하고 여군 비율도 높여야 한다. 

‘우리끼리 민족주의’를 우상처럼 섬기면서, 거기에 매몰되어 안보의식이 결여된 일그러진 지식인의 초상화를 발견하게 된다. 분단시대에 안보를 더 튼튼히 하라고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뒤흔들면서 반군평화사상을 선전선동, 무장해제를 역설한 꼴이 되고 말았다. 

레닌이 제정러시아를 전복하기 위해 이용한 얼치기 지식인들, ‘쓸모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이 자꾸만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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