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은의 서울 나들이] 자연재해를 기억하는 문화재
[김경은의 서울 나들이] 자연재해를 기억하는 문화재
  • 김경은  여행작가
  • 승인 2023.09.04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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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매력적이다. ‘매력특별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매력은 서울의 강과 산에서 나온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한강은 수도 서울을 관통한다. 한강 수계에는 무려 40여 개의 지류가 있다. 서울의 안팎에는 20여 개의 산이 있다. 

서울의 강산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을 더 빛내는 게 있다. 서울 강산에 사람의 삶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한국의 멋과 맛이 숨쉬고 있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게 있다. 그것은 역사, 전통, 문화 그리고 풍류가 되어 실핏줄처럼 엮여 있다. 그만이 아니다.

유구한 역사를 품은 도시로 선사시대부터 현재를 망라한 시대별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한양도성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흔적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서울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데 있다. 너무 가까운 데 있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곳을 찾아간다. 

풍납토성 산책로 안내도
풍납토성 산책로 안내도


문화재가 기억한 재난, 최장·최다·최대 역대급 대홍수

장마는 끝났다. 지독했다. 역대 최고의 폭우였다. 5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재산 손실이 짐작이 되지 않는다. 100년 전에도 올해만큼 많은 비가 왔다. 을축년 대홍수(1925년)다. 
정확히 98년 전 한여름, 한반도는 물바다가 됐다.

금강, 낙동강, 만경강이 범람했다. 용산 제방이 무너졌다. 사람과 가축은 물에 떠내려갔다. 논밭은 물에 잠겼다. 산은 흘러내렸다. 건물은 무너졌다. 당시 수도인 경성 전체가 진흙 벌이 됐다. 백성의 삶은 허물어졌다. 당시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647명이 사망했다. 재산 피해는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절반이 넘었다. 1억300만 원이란다.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수 조 원은 될 듯하다.  

을축년 대홍수비
을축년 대홍수비

재난 역사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 재난은 문화재가 되어 후손의 기억을 되살린다. ‘김경은 여행작가의 서울 나들이’를 시작하면서 을축년 대홍수가 남긴 기억을 찾아간다. 

먼저 들른 곳은 강남 봉은사다. 일주문 격인 진여문에 도착했다. 진여문 오른편에 부도가 있다. 부도는 어느 절에나 있다. 부도는 불도를 실천한 고승의 사리를 모신 탑이다.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여기에는 부도와 함께 공적비가 하나 있다. ‘나청호 대선사 수해구제 공덕비’다. 이 공덕비는 나청호 대선사 부도와 나란히 있다. 공적비는 1925년 대홍수 때 청호 스님에 의해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용산 제방이 무너졌다. 잠실 일대는 일순간 물에 잠겼다. 다행히 봉은사는 높은 곳에 있다. 물에 잠기지 않았다. 사하촌(사찰에 예속된 사람들이 어우러져 전통 마을)은 사정이 달랐다. 마을 전체가 침수됐다.

물 위로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거기에 수백 명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들을 본 청호 스님(봉은사 주지)은 사찰의 돈을 모두 챙겼다. 배 두 척을 샀다. 일종의 ‘구조선’이었다. 모든 사람을 배에 옮겨 실었다. 그때 나무 하나가 부러졌다. 구조선은 또 봉은사 옆 마을인 부리, 잠실리, 선리(하남) 일대에서 물에 떠내려오는 사람, 수몰 직전의 집 지붕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 나무에 매달린 사람 등 귀중한 생명, 수백 명을 구했다. 모두 708명이었다. 그들을 봉은사에 수용했다. 

나청호대선사 수해공덕비
나청호대선사 수해공덕비

만일 청호 스님의 구제 활동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추가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공덕비에는 그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청호 스님은 이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절에 가서는 대중을 독려하고 강가에 이르러서는 뱃사공을 불러 혹은 의(義)로써 권하고 혹은 이(利)로써 유도하며 혹은 눈물로써 슬피 호소하고 혹은 성난 표정으로 힐난하면서 구제선(救濟船)을 띄워…죽음의 위기로부터 708명의 인명을 구했다.” 

당시 이 영웅적 사건은 많은 사람에게 회자됐다. 수많은 작가가 청호 스님의 영웅담을 소개했다. 공적을 기리는 글도 남겼다. 그것을 모은 서첩이 발간됐다. 바로 ‘불괴비첩(不壞碑帖)’이다. 
하늘의 일을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잠실’의 운명을 바꾼 대사건이 바로 을축년 대홍수다. 홍수피해를 입기 전 잠실 일대를 통과하던 한강은 두 갈래였다. 본류는 송파강이었다. 송파강은 지금의 석촌호수가 있는 곳으로 흘렀다. 또 다른 물길은 신천이다. 송파강에 비하면 샛강에 지나지 않았다. 두 갈래의 강 사이에 잠실도와 부리도가 있었다. 잠실도는 여의도보다 조금 컸다. 

한성백제박물관 벽면에 재연해 놓은 풍납토성 단면
한성백제박물관 벽면에 재연해 놓은 풍납토성 단면

구제받은 수재민들, 청호 스님에게 공적비를 바치다

당시 두 섬은 한강의 본류인 송파강 북쪽에 있었다. 강북인 셈이다. 그런데 대홍수는 한강 물길을 바꿨다. 본류가 송파강에서 신천으로 바뀌었다. 잠실도와 부이도가 강남이 됐다. 1970년대 강남개발을 하면서 샛강인 송파강은 메워졌다. 잠실섬이 육지가 됐다.

그 과정에서 석촌호수가 생겼다. 을축년 대홍수는 서울의 지도를 바꾼 셈이다. 잠실의 운명도 바뀌었다. 

2015년 7월 18일 한강대교 수위 11.76m(해발 14.23m)까지 올라왔다. 한강 수위 측정 이래 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기록적 물난리 흔적이 남아 있다. 서울시 송파구 송파 근린공원에 ‘을축년 대홍수비’가 그것이다. 을축년 대홍수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은 지금 송파동 일대였다. 마을 하나가 몽땅 사라졌다.

수재민이 홍수 피해의 아픔을 가장 잘 안다. 이들이 홍수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싶었다. 그런 이유에서 세운 비석이다. 대홍수 이듬해인 1926년 세워진 이 비석은 원래 광주군 중대면사무소(현재 송파동 95번지) 앞에 있었다. 약 1.7m의 비석에는 그 당시의 피해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비양(碑陽·비석 전면)에는 ‘乙丑七月十八日大洪水紀念(을축7월18일대홍수기념)’, 비음(碑陰·비석 측면)에는 ‘增水四十八尺(증수사십팔척·물 높이가 48척, 약14.5m), 流失二七三戶(유실이칠삼호·가옥 273호 유실)’라고 적혀 있다. 

기념비 옆에는 ‘암행어사 이건창 영세불망비’도 있다. 이 비석 역시 대홍수 때 휩쓸려 사라졌다. 다행히 1979년 한 사학자에 의해 발견됐다. 대홍수를 기억하기 위해 ‘을축년 대홍수비’ 옆에 뒀단다. 

홍수 피해자의 바람은 헛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하천에 대해 지속적으로 투자했다. 홍수방어 능력을 키워왔다. 을축년 대홍수는 국가 차원의 홍수 예방 대책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현대적인 하수관 시설과 배수시설을 꾸준히 갖춰나갔다. 올해 1925년에 못지않은 대홍수를 당했다.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다만 정부의 안일한 대응이 매우 아쉽다. 청주 오송터널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사상 최대의 물난리였던 을축년 대홍수. 그것은 슬픔만 준 게 아니다. 역사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인가. 국가적 재난이란 ‘우연’이 한성백제의 실체를 들춰냈다. 그 이전까지 고대국가 삼국 중 가장 번성했던 한성백제는 우리에게 숨겨진 비밀이었다. 

그 비밀의 열쇠는 을축년 대홍수였다. 한강에 접해 있던 ‘제방’이 무너졌다. 백제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유물이 지목하고 있었다. ‘왕성’이었다. 특히 모래 속에 숨어 있던 청동 초두(주전자)가 하남위례성의 존재 근거로 주목받았다. 청동 초두는 술을 데워 잔에 따르는 일종의 제사 용기였다.

그동안 ‘제방’으로 알고 있던, 무너진 벽이 바로 풍납토성 서성벽이었다. 잃어버린 한성백제 도읍지 하남위례성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전까지는 하남위례성 위치가 어디인지조차 특정하지 못했다. 그저 논쟁거리였을 뿐이다.

을축년 대홍수는 선사유적지와 한성백제를 찾아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얘기다. 이는 고고학회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큰 경사가 없다. 쾌거다.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의 말이 맞다. ‘우연’이 역사의 감독이다. 

고대국가 한성백제의 찬란한 위용을 보여주는 풍납토성 

하지만 우연이 역사적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 한성백제 역사는 곧 일본 고대사의 열쇠다. 일본 정부는 굳이 이것을 들출 이유가 없었다. 풍납토성은 다시 흙 속으로 묻히게 됐다. 

광복 후 우리 정부는 문화재에 관심을 둘 여력도 실력도 없었다. 풍납토성이 유적지로 지정된 게 1963년이다. 그것도 토성 성벽만을 문화재로 지정했다. 성벽 안의 왕성은 방치됐다. 왕성은 주택지가 됐다. 400년 동안 도성이었던 그 터가 주택지로는 최고의 입지였을 것이다. 토성 내부에는 8000세대 4만8000명이 살고 있다. 

당시 왕성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어떻든 한성백제 도읍지는 육중한 콘크리트 바닥 밑에 묻히게 됐다. 풍납토성이 다시 주목받은 것은 1997년 일이다. 아파트를 짓기 위해 땅을 팠다. 고층아파트의 기초 공사를 위해서는 적어도 10m는 파야 한다.

백제의 유물과 유구가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다시 본격적인 하남위례성 발굴이 시작됐다. 급기야 토성이 왕성임이 밝혀졌고 한성백제의 혼이 다시 살아났다. 자동차로 풍납토성에 왔다. 

풍납근린공원을 지나쳐 풍납전통시장길로 들어섰다. 토성산책로는 성벽을 따라 펼쳐진 잔디밭 한 가운데 긴 줄처럼 뻗어 있다. 북성벽~동성벽~남성벽~서성벽을 따라 걸었다. 원래 풍납토성의 길이는 3.5km에 이른다. 지금은 군데군데 무너지고 헐려 2.1km만 남아 있다. 풍납토성의 높이가 무려 15m에 이른다. 넓고 평평한 구릉이 길게 뻗어 있다. 마치 평야에 솟은 작은 언덕 같은 토성이다. 

1500여 년의 길고 긴 세월, 얼마나 많은 풍파와 시련을 겪었을까. 비바람 맞은 성벽에 흙이 쌓였다. 날카롭던 성벽이 무뎌진 모양이다. 그래도 토성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는 게 놀랍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토성 밑으로 5~6m는 내려가야 그 뿌리를 볼 수 있다. 동성벽 구간은 토성이 그런대로 잘 보전되어 있다. 

토성의 진정한 가치는 그 형태에 있다. 어떻게 토성이 소실되지 않고 1500년 이상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일까. 토성의 축조법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 풍납토성은 판축기법으로 쌓았다. 판축기법은 오늘날 제방 축조 때도 이용하는 고급 토목 기술 중 하나이다. 사각형 틀에 흙을 넣어 막대기로 다진다. 거기다가 나뭇잎, 볏짚, 풀, 나뭇가지 등을 10cm 간격으로 얇게 깔고 진흙을 덮는다. 

이런 일을 몇 번 반복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흙을 층층이 다져 쌓았다. 이런 작업을 ‘달고리’라고 한다. 달고리를 마치면 벽돌 모양의 흙덩어리가 된다. 이것을 쌓으면 토장이 된다. 이렇게 만든 토성은 돌로 쌓은 석성보다 더 견고하다고 한다.

이렇게 긴 토성을 쌓기 위해 적어도 100만 명 이상이 동원됐을 것이라는 학계의 추정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풍납토성이 축성될 당시 한성백제는 강력한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다. 

우리는 그동안 한성백제를 망각하고 있었다. 오직 웅진과 사비만을 백제 역사로 알고 있었다. 어쩌면 풍납토성을 보면서 3국 시대의 최전성기는 백제부터 시작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성벽의 끝에 도착했다. 남성벽과 이어지는 곳이다. 그곳에 남성벽 전망대가 있다. 높이가 불과 3m도 되지 않는 ‘성루’인 셈이다.

풍납토성의 축성법과 출토 유물과 유구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는 안내판이 성루를 지키고 있었다. 전망대에 오르니 풍납토성의 규모와 형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배 모양의 긴 타원형을 그린 듯한 곡선 토성이 또렷하게 보였다. 마치 한강 강변에 정박한 배에 탄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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