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진단] 인민군보다 더 악독했던 인민위원회
[전문가 진단] 인민군보다 더 악독했던 인민위원회
  • 박명수 서울신학대 명예교수
  • 승인 2024.03.1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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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돌선교회 세미나

한국전쟁 전후 개신교의 피해와 사례

6.25전쟁 당시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있었던 충남 논산 병촌교회
6.25전쟁 당시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있었던 충남 논산 병촌교회

다른 민간인 피해와 같이 기독교인들의 가장 많은 피해는 역시 인민군의 퇴각 과정에서 일어났다. 처음에 파죽지세로 남한을 점령하던 인민군들이 낙동강 전선에서 제지 받자, 이것을 돌파하기 위해 북한은 모든 역량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다. 그 결과 중부지역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을 기회로 맥아더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세울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지금까지 낙동강 전선을 지키던 유엔군과 국군들은 여러 통로를 통해 북진했고 이런 상황에서 전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인민군은 각 지방당에 “1. 전세가 불리하면 퇴각한다. 2. 당을 비합법적인 지하당으로 개편할 것, 3. 유엔군 상륙 때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할 것, --- 5. 산간지대 부락을 접수하여 식량을 비축할 것, 6. ---입산시키고, 남 강원도로 퇴각하게 할 것”등을 지시하였다.

아울러 “적의 침입으로 위급한 경우와 적 앞에서 그들을 환영하여 반동을 감행하는 경우에 관하여는 체포하여 처리할 것”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따라 각 도당은 각 지역에 9월 26일 음력 추석 반동세력을 제거하고 퇴각할 것을 명령했다. 

명령에 따라 추석 다음 날부터 며칠 동안 전국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이뤄졌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학살도 이런 상황 가운데 이뤄졌다. 이런 학살의 근본적인 원인은 위의 명령에 있었다. 따라서 이런 학살을 지나치게 각 지역에서 일어난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 원인을 축소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인민군의 퇴각 과정은 각 지역에 따라 달랐다. 대부분의 경우는 9월 26일부터 퇴각하기 시작했지만 전라도 도서 지방은 여러 사정으로 곧바로 퇴각하지 못했다. 이들은 10월 4일 경에 퇴각했고 바로 그 직전에 신안군 도서지역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유엔군들이 인민군들을 공격하며 북상했지만 퇴로가 막힌 그들은 지역의 산간지대로 도피했다. 

이들은 유엔군이 지나간 뒤에 다시 마을로 내려가 우익세력을 공격해 그 지역을 좌익의 점령지대로 만들려 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전남 영광군이다. 그곳에서 가장 많이 살해됐는데 그것은 산속으로 숨어든 인민군이 다시 나타나 우익세력과 기독교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전국 많은 산간지역이 여전히 미수복지역으로 남아 있어,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지냈다. 이들 지역에 계엄이 해제된 것은 1952년 봄이었다. 

66명의 순교 희생자를 위한 추모 기념탑
66명의 순교 희생자를 위한 추모 기념탑

논산군 성동면 병촌교회 피해 … 인민위원회 교인 학살

충남 논산 병촌교회는 9월 27일에서 28일 사이에 이 교회 신자 66명이 살해되었다. 병촌교회는 원래부터 반공의식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병촌교회는 강경성결교회가 지교회로 세웠는데 최초의 제안자는 윤판석이었다. 그는 해방 후 우익활동을 한 교회 집사였다. 그 다음에 이 교회를 실질적으로 세운 사람은 강경교회의 이태석 전도사였다.

그는 그후 북한에서 목회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는데 1950년 10월 11일 북한에서 패주하던 인민군에게 살해되었다. 성결교회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있었는데, 공산주의를 말세에 등장하는 ‘붉은 용’, 곧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했다. 이 지역에 독촉국민회 논산지부가 조직되었고 지부장은 기독교인 윤형중이었다.

윤형중은 당시 중졸자로서 논산금융조합장과 논산읍장을 지낸 인물로 기독교 장로였다.

당시 충청남도 독촉지부장은 감리교의 남천우 목사였고, 대전지부장은 성결교회의 김창근 목사였다. 윤판석은 중앙에서 반공적인 기독교 청년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필자는 이런 것들이 병촌교회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이 같은 상황에서 논산군 성동면에 좌우의 갈등이 있었다. 아마도 좌익의 진원지는 이곳 성동면 병촌리에 사는 여씨 문중이었던 것 같다. 그 지역은 여운형과 친척 간으로 좌익 사상을 추종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성동면 원남리의 윤성병의 아들 윤해중이 여운형과 접촉을 하면서 좌익이 강화되었으며, 그는 좌익활동을 하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윤성병은 아들의 불행에 우익에 큰 적개심을 품고, 한국전쟁 시기에 성동면 인민위원장이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그 지역은 남한의 모스크바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원남리 3구(댁개)는 오랫동안 윤씨 양반마을을 자처했고, 이들 가운데는 금융조합에 근무하는 사람들(윤철중, 윤수중)도 있었다. 아마도 이들은 논산 금융조합장 윤형중과 함께 독촉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아래에는 이들에게 소작을 하거나 머슴을 살던 마을이 있었다. 이들이 윤성병과 함께 좌익활동을 주도했다. 따라서 해방 이후 원남리는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이 좌우 갈등과 겹쳐 형성되었다.

좌익의 세력이 강한 병촌지역에 반공을 강조하는 성결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좌우의 대립을 예견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윤성병과 여씨 문중은 합세하여 윤씨 문중의 지주들을 공격하였다. 성동면에는 서북청년단 산하의 연락사무소가 있었다. 

당시 서북청년단은 좌익이 강한 지역에 우익단체들의 요청으로 지역에 파견되어 좌익 적발에 앞장섰다. 미군정 보고서에 1947년 6월 30일에는 이곳에 와 있던 서북청년단원 소속 3명을 신원 미상의 30명의 괴한이 습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이 지역에서 좌우 갈등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부가 수립되고 보도연맹이 창설되었을 때, 이 지역의 좌익들이 얼마나 많이 여기에 가담했으며, 전쟁 직후에 얼마나 피해를 받았는지 알 수 없다.

‘종합보고서 III: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는 논산지역에서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1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성동면 학살 사건을 보도연맹 사건과 관련해서 설명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이런 갈등 때문에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 지역의 우익인사들은 강경경찰서의 지시에 따라서 7월 17일 구자곡 지역으로 피란을 떠났고, 이때 강경성결교회 신자들도 함께 떠났다. 그러나 5일 후 강경이 완전히 인민군에 의해서 점령이 되면서 피란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성동면 반공 인사를 비롯하여 경찰 가족, 우익인사, 기독교인들이 잡혀갔다. 피란에서 돌아온 우익과 기독교인들은 반동세력으로 분류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 당시 성동면 원남리의 지주 계층을 비롯하여 일단의 윤씨 집안이 집단으로 학살되었다. 피해자의 유족들은 인민위원장이 지주들의 토지를 빼앗으려고 했다고 증언한다. 이것은 인민위원회로 권력이 재편되는 과정 가운데 행해진 공산당식 토지개혁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가운데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남쪽에서 유엔군과 국군의 북상으로 도당은 9월 26일 반동 세력을 제거하고,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적대세력들은 9월 27일과 28일 양일간 병촌교회 66명을 포함해서 성동지역에서 120명을 사살했다. 특별히 병촌교회 신자들은 특별하게 우익의 정치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민군의 병촌교회 학살은 이 지역 좌익의 중심세력이 교회 자체를 적대세력으로 간주해서 이들을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성동지역에서 다른 기독교인들도 병촌교회와 비슷한 희생을 당했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교회 내의 좌우의 갈등으로 이것을 공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성동과 가까운 강경에서는 동아기독교의 최초의 목사이며, 최초의 감독이자 해방 후 침례교회의 초대 총회장을 지낸 이종덕 목사도 9월 말 인민군이 퇴각하는 가운데 살해당했다.

수복 후에 이 지역에서 우익에 의한 부역자 처벌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자세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최태육은 수복 후에 약 700명의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들이 집단 학살되었다고 주장한다. 700명이 어느 범위를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종합보고서 III: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서는 금산, 논산, 보령, 부여, 서천, 연기, 천안 지역의 부역자 희생자가 모두 109명에 이른다고 언급한다. 원남리의 유족들은 자신들은 보복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병촌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이 괴롭힌 세력들을 용서했다고 주장한다.

같은 해 11월 20일 동아일보에는 합동수사본부가 성동면 학살 주동자를 체포했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여기에 의하면 9월 하순 도끼로 양민 72명을 죽인 이상태가 체포되었다.

이상태는 원래 성동면 우근리 사람으로 한국전쟁 전까지 여의도비행장 정비계 문관으로 활동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남로당에 입당하고자 9월 28일에 우익진영 군경 가족 암살단을 조직하여 최봉근(30)외 18명의 대원을 확보하고, 경찰관 박병구(39)를 비롯하여 이관오(49)와 부락의 우익인물 조창수(73) 씨 등 도합 72명을 죽였다. 이상태는 그후 도망하여 영등포 모 기관에서 문관으로 있으면서 월북을 꿈꾸다가 11월 18일 체포되었다. 

좌익의 인민위원회에 의해 학살된 양민 66명의 발굴 모습을 전하는 안내판.
좌익의 인민위원회에 의해 학살된 양민 66명의 발굴 모습을 전하는 안내판.

완주지역과 동상면의 개신교 피해 … 예배당, 선동장 사용 반대 이유 학살

전라북도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보게 된다. 전북 완주군 동상면 학동교회, 신월교회, 수만교회의 기독교인들이 한국전쟁 기간에 집단 학살당했다. 이 지역의 기독교는 인근의 위봉교회에서부터 시작된다. 

1900년대 초 전주에 온 남장로교 선교사 마로덕(Luther O. McCuchen)은 완주군 소양면 위봉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이곳에서 멀지 않은 동상면 학동사람들이 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마로덕 선교사의 도움으로 1905년에 학동교회, 1906년에 단지동교회, 1907년에 마재교회(현 신월교회)를 세워졌다.

이 교회들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고 산골 마을에 신문명을 전달의 통로가 되었다. 이런 산촌에 시련이 닥치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 좌우익의 갈등과 그 후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이미 위에서 살펴봤지만 완주군 삼례 구와리를 중심으로 좌익이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들은 해방 이후 계속 대한민국의 수립을 반대했다. 인민군이 전북지역에 오기 전부터 반동분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특별히 기독교 세력을 적대시했다. 이들은 기독교를 우익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인식을 가졌던 좌익세력은 전북 완주지역에서 기독교 우익세력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삼례 옆의 봉동에는 역시 마로덕 선교사에 의해 1908년에 제내교회가 설립되고, 영성학원을 세워져 지역사회 문명개화에 이바지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이곳을 점령한 인민군은 미제국주의자들에게 아부한 것을 회개하는 자백서를 강요하였으며, 결국 이 교회의 중심인물인 장로 3명과 여러 신자들을 소방서에 구금했다가 9월 27일 이들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총격을 난사했는데, 여기에 김상천, 김현경 장로가 사망했다. 

바로 같은 면의 봉상교회도 마로덕 선교사에 의해서 비슷한 시기에 설립되었는데 이 교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오기영 장로는 독립촉성국민회에서 활동했고, 이것으로 전주 형무소에 체포되었다가 인민군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형무소를 소각할 때 겨우 살아났다. 그러나 완주군에서 공산주의에 의한 가장 심각한 기독교 박해는 완주군 가운데 가장 오지인 동상면에서 일어났다. 동상면에서 해방 직후에 어떤 좌우갈등이 일어났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지역에는 이미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우익세력이 형성되었지만, 좌익도 활동하기 시작한 곳이다. 1948년 동상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조한봉이 남로당 동상면 총책이 되었고, 사람들을 포섭해 활동하려다가 발각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기독교 인사들은 조한봉 석방을 위해 노력했고 결국 석방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이 동상면을 점령한 것은 7월 25일이었고, 그 즉시 조한봉은 분주소장이 되어 나타났고, 그의 지휘하에 인민위원회, 노동당, 여성동맹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인민위원회와 기독교 간의 갈등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갈등의 출발점은 인민위원회의 예배당 사용문제였던 것 같다. 

인민위원회는 각종 선전과 군중집회를 주도했고, 그 장소를 마재교회로 삼았다. 그러나 예배당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으로만 이해했던 신자들은 여기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성녀 집사였다. 그녀는 마로덕 선교사의 도움으로 교회를 시작하는 데 이바지한 인물이었다. 결국 김성녀는 미제의 앞잡이로 낙인을 찍혔고, 결국 살해당했다. 이 지역에서 살해된 사람들은 세 교회 합하여 14명이다. 

이들 가운데 김태환(면장), 박용순(소방대장, 교사) 등을 제외하고는 공직에 있었던 사람은 없었고, 독촉이나 대한청년단에 가담한 사람도 없었다. 이들은 평범한 신자였다. 이들은 조한봉을 사랑으로 대했으나 그들은 기독교를 적대세력으로 간주한 것이다. 당시 동상면에는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약 50여 명이 끌려왔고, 이곳에서 대부분 희생되었다. 

이들이 살해된 것은 9월 27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는 내용은 살해자 외에 납북자도 있다는 사실이다. 조한봉은 한편으로는 우익과 기독교인들을 살해하면서 가능한 대로 많은 젊은이를 납북시켜 함께 도피하고자 했다. 현재 납북자단체에서 작성한 명단에 전도사 이경천, 집사 박종봉, 최순임, 장장순이 등장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들에 대한 조사는 없는 것으로 안다.
원래 이들은 불온 세력을 제거하고 동상면에 위치한 운장산 산맥을 통해 북쪽으로 퇴각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미 연합군과 국군이 대전을 점령한 상황에서 이들은 북쪽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이들은 다시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인민위원회가 운장산으로 들어오게 되어 그것이 빨치산의 중요 활동무대가 되었다. 

당시 정부가 실시한 화폐교환도 이 지역에서는 실시할 수 없어 치안이 회복될 때까지 유예한다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조한봉은 이 지역의 빨치산 대장으로 52년 봄에 체포되어 사살됐다. 

이 지역에서 계엄이 해제된 것은 1952년 4월 7일 0시를 기해서 이뤄졌다. 그리하여 사실 동상면은 약 1년 반 이상을 인민공화국 체제로 지냈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에 부역자 처리 문제를 낳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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