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는 중국에 동화되지 않는다”
“티베트는 중국에 동화되지 않는다”
  • 미래한국
  • 승인 2009.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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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예춘추사 <제군> 5월호
▲ 제군 5월호 표지
다나카나미 (田中奐美) 르포작가

티베트의 영웅 ‘푼완’이 말하는 중국의 핫이슈

베이징 올림픽 개최를 목전에 둔 작년 3월 라사를 중심으로 소요가 발생한 지 1년이 됐다. 올해는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로 망명한 ‘라사 동란’ 이후 50년째 되는 해이다. 중국 국내에서 티베트 문제는 계속 가장 민감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도 수도 베이징에 살면서 티베트족에게 한족화를 강요하는 정책을 비판하고 이를 바꿀 것을 주장하는 티베트인이 있다.

18년간 정치범수용소 수감
올해 나이가 87세인 푼초크 완걀, 통칭 푼완이 그 사람이다. 단단한 체구, 주름이 없어 보이는 온화한 얼굴, 60세 정도 밖에 안 보인다. 일어서면 연륜을 쌓은 거목과 같은 존재감을 갖게 한다. 베이징의 아파트에서 같은 티베트인 처와 함께 살면서 미수(米壽)를 앞둔 지금도 평일에는 인민대회당 옆의 퇴직 간부 사무실에 출근하고 있다.

민족정책을 비판한다지만 그는 민주화를 주장하는 급진파는 아니다. 그는 중국 건국 전부터 공산당원이다. 푼완은 중국 공산당의 초기 티베트정책 때부터 직접 관련이 있다.

1950년 중국이 말하는 티베트 ‘해방’ 때 푼완은 해방군 제18군 남로(南路) 부대의 당위원회 부서기로 참가했다. 그러나 1958년 반우파 투쟁 중 사문(査問)을 받고 1960년 투옥된다. 그후 18년 동안 정치범 수용소로 악명 높은 진성(秦城) 감옥 1호 독방에서 지낸다. 가로 3보, 세로 7보 이상은 움직일 수 없는 좁은 공간이다.

오랜 시간 말을 하지 못하고 살아 출소할 무렵에는 성대가 퇴화돼 제대로 소리를 되찾는 데 2년이 걸렸다고 한다. 석방 후에는 명예 회복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위원 및 민족위원회 부주임 위원으로 일했고 당내에 이름 난 티베트인 정치가로서 지위를 누려왔다.

이런 독특한 경력을 가진 노혁명가인 그가 지금도 중국 정부에 대해 티베트 정치가로서의 주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작년 3월 후에도 후진타오 국가주석에게 편지를 보냈지요”라고 내가 자택을 방문했을 때 푼완은 말했다. 그 편지 내용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아직도 긴장이 계속되는 작년 3월 문제에 대해 그는 해외 언론에 발언을 자제하고 있다.

다만 티베트가 안고 있는 근본적 문제에 대한 입장은 흔들림이 없다. 2004년에도 후진타오 국가주석에게 서한을 보낸 바 있다. 한자교육 등의 티베트에 대한 ‘한화(漢化)’ 정책의 잘못을 비롯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티베트족 자신에 의한 ‘참된 자유’와 이에 따르는 1국2제도의 적용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달라이 라마 14세의 귀환이 관건이 된다는 것, 더 나아가 달라이 라마 14세가 요구하는 것은 티베트족에 의한 자치이고 독립은 결코 아니라는 것, 문제는 앞으로 미루어지기만 하다가 달라이 라마 14세가 사망했을 경우 불만을 가진 해외 젊은 티베트인이 보다 과격한 수단을 들고 나오게 된다는 것 등이다.

티베트 지역의 현상에 대해 물었더니 푼완은 다소 야유하듯이 대답했다. “한족 사회에서 부와 지위를 얻은 티베트인 중에는 ‘반분열’로 모이는 이익 집단이 있다. ‘반분열적 밥, 반분열적 재산, 반분열적 감투에 모이는 무리들’ 말이다.”

티베트인 중에도 정부 간부나 공안 등의 요직에 있는 사람은 ‘반분열’을 외쳐 집이 주어지고 차를 굴리게 되고 고액의 급료를 받는다. 그들은 달라이 라마 14세가 돌아오면 이미 누리고 있는 혜택을 잃게 돼 ‘반독립 분열’ 활동에 열을 올린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후진타오 국가주석에게 보낸 서한에는 자료를 변조해 중앙 정부에 보고를 날조하는 지방 관료나 ‘티베트어 교육 요구는 독립을 획책하는 것이니 저지해야 한다’ 는 등의 위협을 되풀이해 중앙 정부로부터 ‘반분열 활동’을 위한 예산을 타내는 지방 정부 관료의 부패상도 소상히 적고 있다.

작년 3월의 라사 소요도 중국 언론은 ‘불법 독립분자’에 의한 폭동이라고 보도했다. 민족정책 실패 등 티베트인 폭발의 배경에 있는 문제는 밝혀진 적이 없다. 이런 중국 정부의 입장은 티베트 지역에서의 부패를 더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그는 그 나름대로의 입장에서 중앙 정부에 호소를 계속하고 있다.

소요 1주년의 현지에서
실제 현지에 가보면 소요가 있었던 사천성 티베트 지역에서는 작년까지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무장경찰이 자주 눈에 띄고 거리에서 인민해방군의 트럭 대열과 스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티베트 민족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는 ‘개혁개방 30주년’을 구가하는 선전용 현수막이 화려하게 나부끼고 있다.

중국 정부가 하는 것, 내거는 것 모두가 원한의 대상은 아니다. 지면이 있는 한 티베트인은 “올림픽 개막식 당일은 대낮부터 TV 앞에서 서성댔다”라고 웃는다. 오락거리가 적은 산골에 살며 정치와는 무관한 일반 티베트인들로서는 올림픽 개막식은 분명 작은 위락거리이기도 했다. 티베트인 모두가 올림픽을 적대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리에서는 ‘3월의 이야기’는 여전히 터부였다.
‘베이징 올림픽 때는 티베트의 자유와 영예를 위해 천안문에서 자살해 보이겠다.’ 1년 전 그렇게 기염을 토했던 청년이 있었다. 지금 그에게 3월의 일에 대해 물었더니 “회상하기조차 싫다”며 더 이상 말하기를 거부했다. 그의 일족에게는 1950년대 티베트 지역에서 행해진 ‘민주개혁’ 혼란 중 해방군에 의해 죽은 사람이 있었다. 그런 과거를 지닌 그는 자살은 하지 못했지만 3월 이후 사원에서 국기(오성기) 게양이 의무화되니까 항의 차원에서 그 깃발을 끌어내리려 했었다고 한다.

한편 티베트 거리에서 사는 한족은 “나는 마음으로부터 그들을 좋아할 수 없다”며 “티베트 지역만큼 정부가 돈을 퍼부은 곳이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감사하기는커녕 소란을 피운다. 티베트와 접촉이 없는 한족은 ‘독립 단호 반대’라고 하지만 나는 차라리 그들이 떨어져 나갔으면 시원하겠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투덜댔다.

올림픽에서 민족 융화를 구가했던 중국 정부이지만 일은 그리 간단하게 진전되지 않는 모양이다.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르지만.

‘티베트 해방’에 참여
현재 티베트 문제를 원점에서 생각하면 당연히 푼완 씨가 관여했던 1950년의 ‘티베트 해방’에 이른다. ‘티베트 해방’에서 푼완 씨 등 티베트인 공산당원이 수행한 역할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푼완과 그 동료들은 인민해방군의 진군 루트 각지의 유력자들을 설득해 식료품이나 화물 운반용 야쿠(소와 비슷한 야생 초식동물)를 조달했다. 티베트어를 알고 고산지대의 기압에 적응하고 토지 성향을 잘 알고 현지인의 생활 습관이나 문화를 잘 아는 푼완 씨 등이 없었던들 ‘티베트 해방’이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푼완 씨에게 그 공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결과는 어차피 마찬가지이다”라고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중국 공산당은 몽골을 해방하고 동티베트의 캄도, 아므도도 해방했고 다음 차례가 중앙 티베트 해방이었다.” “그래서요”라며 되풀이해 묻는 나에게 그는 정중한 어조로 “그들은 그렇게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거듭 말했다.

인민공화국 건국 전 푼완 씨가 출생한 고향 동티베트 등 일부 티베트 지역은 국민당의 지배 하에 있었다. 학생 시절 코뮤니즘에 빠져 있었던 푼완 씨는 국민당 지배를 타파하기 위해 티베트 공산당을 결성, 티베트 혁명을 계획했었다. 중국 공산당이 지하조직이었던 시절 ‘티베트인의 손으로 국민당 지배를 타도해 중앙 티베트와 기타의 티베트 지역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사회를 만들자’라는 것이 푼완의 혁명 구상이었다.

20세 때의 푼완이 신 티베트 건설을 지향했던 배경에는 구태의연한 현상도 있었다. 서민은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 생활이 힘들었고 규율이 흐트러진 티베트 군인들은 약탈자와도 같았다. 귀족이나 승려는 이권에 빠져 정치 부패가 심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크게 흔들리는 국제 정세 속에 그런 상황의 티베트 정부 안에서 강한 위기의식을 가진 사람은 소수였다. ‘티베트 공산당’을 독자적으로 조직한 푼완 씨는 1940년대 지하조직이었던 중국 공산당, 소련이나 인도의 공산당 지원을 얻기 위해 분주했지만 최종적으로는 1949년 국민당을 타파한 중국 공산당 하에서 티베트 개혁을 지향했다.

1978년 수용소에서 풀려난 푼완은 다음해부터 친교가 두터웠던 판첸 라마 10세에게 티베트인 자치 구상을 제안해 티베트와 중국의 미래를 위한 정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1989년 판첸 라마 10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푼완의 구상은 또다시 좌절되고 만다.

현재 중국 내에서 정부 방침에 이의(異議)를 주창해 나가는 생존 방식은 해외에서 인권이나 언론의 자유를 호소하는 일보다 훨씬 힘들고 강한 정신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 그는 계속 발언하는가. 다시 체포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내가 발언을 계속하는 것은 역사를 보아온 사람으로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에게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게다가 중국도 예전과는 달리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변하고 있다”라며 미소 짓는다.

“푼완도 고인인 판첸 라마 10세도 저토록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발언을 계속하니 용감하다” 망명 티베트인으로서 요코하마 대학 교수인 페마 걀포는 이렇게 말한다. 푼완의 출생지에서 북쪽으로 약 3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페마 교수의 고향이 있다. 티베트의 역사를 걸머지고 온 푼완을 주위의 티베트 사람들은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페마 씨는 말한다.

마오쩌뚱 - 달라이 라마 회담 통역 인연
“시대가 그에게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푼완 만큼 중요한 인물은 없다. 달라이 라마 14세의 신뢰도 두텁다. 푼완이 감옥에 있을 때 달라이 라마 14세가 푼완의 공적에 대해 코멘트를 냈다. 이후 푼완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푼완은 1954년 마오쩌뚱이 달라이 라마 14세 및 판첸 라마 10세와 회담했을 때 동석해 임시 통역을 맡았던 것이 계기가 돼 달라이 라마 14세와 개인적으로도 친한 관계가 됐다. 1979년 달라이 라마 14세의 형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맨 먼저 찾은 것이 푼완의 행방이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예전 나의 티베트인 지인에게 푼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다. 같은 민족이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억압자의 편’에 선 푼완이다. 복잡한 생각이 있음에 틀림없을 것으로 짐작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 티베트 지인의 대답은 한점의 그늘도 없었다. “그는 티베트를 위해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라며 깊이 긍정하는 표정이었다.

열두 살에 ‘티베트 해방’에 참전했던 티베트인 잔펜 갓트오 씨는 말한다. “나 자신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으며 지지한 적도 없지만 중국 정부의 티베트 정책은 잘못돼 있다. 상황은 1950년대부터 자꾸 나빠지고 있다. 티베트 해방으로 도로를 만들고 생활도 현대화되고 무엇이든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티베트 정책은 티베트의 전통, 문화,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라고 할진대 자국민의 문화나 생활을 존중하고 지켜나가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평소에는 온화한 미소를 띄우고 감정 노출을 잘 하지 않는 푼완 씨이지만 화제가 지금의 부인에 이르자 갑자기 표정이 풀어진다.
“1985년 알게 됐고 의기투합해 1986년 결혼을 했다.”

전처는 문화대혁명 와중에 구속된 시설에서 사망했다. ‘자살’로 얘기했지만 진상은 알지 못한다. 전 부인과의 사이에 난 아이들은 성장, 독립해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금년 61세인 현재의 부인은 명랑하고 총명한 미인이다.

“그녀는 티베트 자치구 문화청의 간부로 있으며 자치구의 정치협상회의 위원이기도 하다. 나의 변증법 연구를 위해 자료를 수집해 줬고 그녀가 없었다면 나의 저작은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안정’ 우선정책은 언제까지인가
변증법 연구는 18년 동안의 독방생활 속에서 시작된 것으로 그는 옥중에서 휴지를 메모 용지로 썼고 쇠줄을 펜 대용으로 써서 사색을 기록했다. 1990년에 그것을 총정리해 대저서 ‘변증법 신탐’을 상신했고 이어서 달에 액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 저서 ‘달에는 액체가 존재한다’도 출간했다. 이것은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우연히 2년 뒤에는 NASA에 의해 달 속에 남아 있는 얼음의 존재가 발표됐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회고할 때 가장 아름다운 일은 무엇인지”라는 질문을 했더니 푼완은 잠시 생각을 한 후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변증법으로 풀이한 세계 변화의 법칙은 잘만 활용하면 향후 인류를 위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티베트의 미래에 대한 노혁명가의 소망은 명확하다. “민족 분열은 민족의 압박정책에서 생기며 민족 단결은 평등 하에서 생긴다.”

푼완은 그의 저서에서 그의 말을 다음과 같이 잇고 있다. ‘민족 평등이란 근본적으로는 민족 주권의 평등을 의미한다. 민족의 억압이나 착취.차별의 통치 특히 민족 동화정책은 참된 사회주의나 민주국가의 사회성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가 주장하는 ‘민족 평등 하에서의 단결’과 거리가 먼 상태이다.
“1979년 달라이 라마의 형이 베이징에 왔을 때 덩샤오핑은 ‘독립 이외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말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후 문제는 줄곧 미뤄지기만 했다. 20년 이상 미뤘다.” 푼완은 쓴 웃음을 지었다. ‘非我族類 其心必異’(민족이 다르면 그 마음도 다르다) 문제의 원인에 대해 질문했을 때 푼완 씨는 종이에 이 말을 써서 보여주었다.

공산당 정권이 민족문제에 대해 경직성을 벗어나는 것은 앞으로 당분간 미루어질지 모른다. #

번역/이영훈 객원해설위원·교포교육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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