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란과 구국기도
6·25 전란과 구국기도
  • 미래한국
  • 승인 2009.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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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움직인 기도
▲ 6.25동란 당시 국란극복을 위한 전국 목사, 장로 구국기도회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을 가해왔다. 무방비 상태로 일격을 당한 남한은 제대로 반격도 하지 못한 채, 국군은 남하하고 국민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인민군의 침략은 거칠 것이 없었고 우리 군은 낙동강에서 최후의 전투를 치러야 했다. 국가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고 고향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던 국민들은 좌절과 절망 속에 비참한 생활을 꾸려나갔다.

이 전쟁으로 한국군 28만, 남쪽 민간인 67만명, 북한군 30만 명, 북쪽 민간인 109만명, 중국인 100만 명, 미국인 5만4,000명 등 약 400만 명이 사망했으며 이는 인류 역사상 네번째로 많은 전쟁 피해자로 기록된다. 또 남한의 경우 산업시설의 43%, 주택의 33%가 파괴됐으며 북한은 공업생산력의 60%, 농업생산력의 78%가 감소되는 등 한반도는 초토화되고 말았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거나 실종, 북으로 압송된 인원만도 15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한구국회와 초량교회의 회개기도운동
우리민족에게 있어 6·25 동란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그 중 기독교인들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남다르다. 마치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기독교의 특성과도 같이 피난길 속에서도 국난극복을 위한 기도는 끊이지 않았다.

먼저 대표적인 예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를 들 수 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어떠한 불행이라도 의로운 사람에게는 그것이 행복으로 바뀌도록 하실 것입니다. 지금 38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행도 우리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더 큰 영광의 결과가 되도록 하실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설교로 피난길에 올랐던 한목사는 대전에서 대한기독교구국회(?韓基督敎救國會)를 결성, 김창근·황치헌 ·황종률의 노력 아래, 구국기도집회를 가졌다.

그들은 국난극복을 위한 기도회를 열고 피난중에 있는 교역자들에게 집회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피난중에 목숨을 걸고 드린 기독인들의 예배는 뜨거웠고 기도는 간절했다. 또 선무(宣撫), 구호, 방송, 의용대 모집에도 힘을 써 기도와 실질적인 행함을 병행했다. 이후 수백명의 교역자가 모여든 부산에서 한목사는, 노진헌 목사가 시무하는 중앙교회에 참석해 위기에 놓인 나라를 위해 기도했으며 밥 피얼스(Bob Pierce)목사와 협력하여 부산송도에서 4백명이 모인 가운데 특별 부흥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미국정부는 중공과 소련이 개입할 것이라는 위험을 알면서도 참전을 결정했다. 이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7월 7일 김일성의 남한 침공을 규탄하고 공산당을 격퇴할 사령부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고 총사령관에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을 임명했다.


맥아더 장군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제8군을 한국에 배치했다. 하지만 국군의 병력과 무기는 너무나 부족했고 유엔의 지원이 결정된 후 투입까지의 시간차로 국군과 일부 미군은 계속 후퇴해 낙동강에 최후의 전선을 만들고 저항했다.

대구와 경남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토가 공산당의 수중에 들어가자 피난민들은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경상남도 지사는 초량교회 양성봉 장로였다. 양 장로는 피난민들 중 약 250명의 교역자들을 초량교회에서 거처할 수 있도록 주선했고 자연스럽게 초량교회가 교역자를 중심으로 한 기도의 중심처가 되었다.

이렇게 모여진 전국의 목회자와 장로들은 초량교회의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8월말에서 9월 중순까지 2주간의 구국집회를 시작했다. 설교와 기도로 이루어진 1주간의 집회 후 첫 예배가운데 그들의 마음속에는 회개의 마음이 불일 듯 일었다.

이 예배에서 한상동 목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켜야 축복을 받아 강성하여 국민이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면한다”는 신명기 11장을 중심으로 설교하였다.

이날 한상동 목사의 설교는 신사참배와 이와 관계된 교계의 교권 다툼으로 언성이 높았던 해방 후 한국교회가 범한 잘못을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 예배에서 시작된 회개기도는 1주일 밤낮으로 계속됐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다. 먼저 신사참배를 통해 우상숭배 범죄한 것을 회개했으며 “성도들과의 간음죄와 양떼를 버리고 먼저 도망 나온 비겁한 마음들을 회개하오니 부디 나라와 민족을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통곡했다.

이 회개기도에 참가했던 당시 초량교회 강월남 집사(91)는 당시 목사와 장로들의 회개는 참으로 진지했고 그 기도회가 얼마나 뜨거웠던지 기도회가 끝날 무렵엔 모두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고 증언했다.

부산 초량교회의 회개기도운동은 부산 전지역은 물론이고 제주도에 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맥아더 장군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고 졸지에 보급로가 차단된 인민군은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했다.

회개기도와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은 7일간의 밤낮없는 회개기도가 있은 후 3일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연이어 낙동강 전선에서의 공산군이 밀려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전세는 역전됐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수복하기에 이르렀다.

초량교회에서 있었던 간절한 회개기도의 영향은 이후 동란이 끝날 무렵 나라 전체에 미쳤다. 1952년 당시 부산시동회 연합회장과 기독교단체의 대표를 지냈던 김치선 씨가 매월 6월 25일을 국난극복일로 정해 줄 것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의한 것도 회개기도운동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그 내용은 전 국민이 술을 금하고 점심을 절식하며 직장에서나 교회에서 특별집회를 개최하여 국난극복에 대한 새로운 각오를 새롭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나라를 구원해 주셨고 회개운동을 통한 신앙회복으로 국난을 극복했다는 역사를 잊지 말자는 취지를 담고 있었다.

이렇듯 6·25 동란은 비극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우리 민족의 기독정신과 고난 가운데서도 회개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코자 했던 산 체험의 증거이다.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은 역사에는 주관자가 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

오진석 기자 ojkings@futurekorea.co.kr
/미래한국 5호 (200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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