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은 경쟁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등산은 경쟁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 미래한국
  • 승인 2009.07.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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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계 원로에게 듣는 故 고미영 씨 이야기
▲ 대한산악연맹 고문으로 ‘산악계의 원로 중의 원로’로 꼽히는 김영도 씨
대한산악연맹 고문으로 ‘산악계의 원로 중의 원로’로 꼽히는 김영도 씨. 김영도 한국등산연구소 소장은 1977년 한국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을 이끌어냈던 에베레스트 원정대장 출신이다. 그는 1977년에 대한산악연맹 회장에 취임했으며, 1978년에 북극 탐험에 나서는 등 지구상의 고지와 평지를 두루 탐험했다. 해외 산서(山書) 번역과 개인 수필집 발간을 통해 산악인들에게 ‘왜 산에 오르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 온 김영도 소장을 만나 지난 7월 11일 히말라야의 고봉 낭가파르밧을 오른 뒤 하산하던 중 추락사한 고미영 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올해 86세인 김영도 소장은 고미영 씨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번 고미영 씨 사고는 보통 산악인들이 히말라야에 가서 사고 난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고산을 등반하다가 사고 나는 것은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고미영 씨 문제는 산악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에요. 근본적으로 이 문제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김 소장은 이번 고미영 씨 추락사가 히말라야 8,000미터 급 14개 고봉 등정을 놓고 고 씨와 오은선 씨가 펼친 과열 경쟁 때문이라는 최근 언론의 보도와 관련해 ‘사실 그렇다고 볼 수 있다’고 수긍했다. 김 소장은 고미영 씨의 히말라야 14개 고봉 등정이 시작부터 잘못됐다고 말했다.

“등산은 명예욕이나 경쟁심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등산은 등산 자체가 목적이에요. 히말라야 14개 고봉 정복 경쟁은 국내외적으로 붙었습니다. 외국에 두 여성이 달리고 있고, 여기에 바짝 붙어 따라가는 것이 우리 나라입니다. 고미영 씨는 산악계에서 늦게 출발한 사람입니다. 원래부터 등산가가 아니라 스포츠 클라이밍 챔피언 출신이에요. 그런데 그가 2006년에 갑작스럽게 방향 전환을 해서 금년까지 11개를 올라갔어요. 이러한 예는 세계 등산 역사상 없어요.”

고미영 씨는 5월 1일 마칼루, 5월 18일 칸첸중가, 6월 8일에 다울라기리에 오르는 등 한 달여 만에 8,000미터 급 고봉 3개 등정에 성공했다. 김 소장은 고미영 씨가 다울라기리 등정 이후 일단 국내에 들어갔다가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출발하는 것이 옳았지만 무리를 해서 낭가파르밧에 올랐고, 하산하는 도중 변을 당했다고 말했다. 고미영 씨가 낭가파르밧에 갔을 때는 산악인 오은선 씨가 히말라야 14개 고봉 경쟁에서 2개를 앞서 있던 시점이었다.

“등산은 경쟁이 아니다”

“산악인으로서 목표를 가지고 나서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산에 오르는 동기가 경쟁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무리가 있었고, 무리는 과로를 가져왔습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시작이었던 거죠. 과로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했는데 눈앞에 다다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서두른 거죠. 낭가파르밧에 간 건 불구덩이에 뛰어든 것과 다름없어요.”

김 소장은 고미영 씨 개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등산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은 국제무대에서 제대로 평가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일이 한국이 ‘산악 강국’으로 입지가 올라가고 있는 상황에서 큰 오점을 남긴 사건이며, 한국 산악계의 ‘창피한 치부’라고 평가했다.

김 소장은 또한 자일 파트너(등반을 보조해 주는 파트너)였던 김재수 씨에게도 책임 소재가 있다고 설명했다.

“2006년에 시작해 3년 동안 10개 고봉을 함께 올랐는데, 자기 파트너를 알고도 남았어야 합니다. 한 달 사이에 3개 고봉에 올랐어요. 얼마나 지쳤는지 알았어야 했고, 견제가 되었어야 합니다.”

김 소장은 고 씨가 낭가파르밧에 오른 뒤 하산하는 과정에 들른 최종 캠프에는 아무도 없었고, 고 씨가 이 캠프에서 7시간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전했다. 추운데 아무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상황에서 허둥지둥 내려오다가 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김 소장은 후원사의 상업 경쟁이 이번 참사를 불러왔다는 주장에 관해서도 설사 스폰서가 무리하게 기록 경쟁을 부추겼다 할지라도 일차적 책임은 속도를 미리 조절했어야 할 고 씨 자신에게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김 소장은 제일 높은 산이 2,000미터가 채 안 돼는 국내에서 태어난 젊은이가 히말라야까지 간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는 등산이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나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등산은 인간의 의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위이기 때문에 외국에서는 ‘알피니스트’(고봉 등정 산악인)라고 하면 일어나서 악수를 청한다고 했다.

▲ 故 고미영 씨
영원한 에베레스트 원장 대장

김 소장은 1973년부터 1979년까지 6년간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70년대 공화당 선전부장 시절, 국민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전국 35개 명산에 산장을 지은 것이 인연이 돼 산악계에서 일약 유명 인사가 됐다. 이후 김 소장은 에베레스트 원정대장으로, 대한산악연맹 회장으로, 산악계에서는 드물게 영어·독어·일어에 능통한 실력을 토대로 해외 유명 산서(山書)를 번역하는 저술가로 활동해 왔다. 국내 산악계에 ‘이론’을 제공하는 거의 유일한 인사였던 셈이다.

특히 1977년 에베레스트 초등(初登)은 어려운 시절에 국민들에게 희망을 줬던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1년에 국내에서 에베레스트 등정에 대한 얘기가 나왔어요. 우리 나라에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등이 있지만 2,000미터도 채 안 됩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외국에 있는 가장 어려운 산에 도전해 보자는 얘기가 있었고, 어려운 것에 도전해서 성취하면 대단한 것이고 안 되도 어려운 것에 도전해서 안 된 것이니까 도전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에베레스트 초등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다. 5,400미터 베이스캠프에서 프랑스제 산소통 50개를 못쓰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나가다가 똑 같은 산소통 13개를 발견했고, 그 산소통을 가지고 지금은 고인이 된 고상돈 씨가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에베레스트에 가기 전에 두 목사님으로부터 똑같이 시편 121편 말씀을 받았어요. 하나님이 특별히 이 말씀을 내게 주셨다는 생각을 가지고 에베레스트에 오를 때 새벽에도 이 말씀을 읽고, 자기 전에도 이 말씀을 읽고 기도했어요. 그런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무사히 넘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김 소장은 당시 원정대에서 유일한 기독교인이었다.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그의 아내는 에베레스트로 출발하기 전 원정대원들에게 ‘너 지켜주는 거다’하고 조그만 성경책을 품속에 넣어주었다. 고상돈 씨의 품속에 있었던 성경책은 고 씨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을 때 산 정상에 직접 묻었다고 한다.

등산을 통해 인생을 배운다

1977년에는 고상돈 씨가 유일하게 에베레스트에 올랐지만 요즘은 1년에 100여 명이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있다. 어렵게 등로(登路)를 개척하던 것도 요즘은 돈을 지불하면 이미 나 있는 등로로 산에 오를 수 있다. 높게만 여겨졌던 8,000미터 이상 고봉들도 인간에 의해 모두 정복됐다. 이런 때일수록 김 소장은 등산을 통해 인생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제 모험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해요. 라이홀트 메스너의 최근에 나온 독일어 책에 ‘이제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고 모험도 끝났는데 하나 남은 것은 자기 마음 속의 공백지대’라는 말이 있어요. 에베레스트에 올라도 요즘에는 기록을 못 세워요. 이제는 내가 정복해야 하는 미지의 세계가 있다는 생각으로 산에 올라야 하는 것이지요. #

서은옥 기자 seo0709@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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