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평]③ 강만길, 박정희의 ‘한강의 기적’ 리더십 부정
[역사비평]③ 강만길, 박정희의 ‘한강의 기적’ 리더십 부정
  • 이주천  미래한국 10기 편집위원·전 원광대 교수
  • 승인 2023.09.2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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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은 인생에서 가장 희열을 느꼈던 첫 번째가 8·15 해방을 맞이한 경우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고향 마산에서 부정선거 규탄 데모가 발생하고 최루탄이 눈알에 박힌 김주열 의문사가 도화선이 되어 4·19학생의거(혁명)가 터지면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것이다. 그는 친일파 청산이 미진하고 깡패를 동원한 이승만 문민 독재자의 퇴진은 당연하다고 인식했다. 

올챙이 역사학자 강만길은 9개월 정도 지속된 장면 정권에서 수많은 과격한 학생시위와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등의 무분별한 대북통일 요구에 대해서는 민주화의 진통으로 이해하고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지지했다. 학생들은 시간이 지나면 이성을 찾아 다시 학업에 매진할 것으로 낙관했다.

5·16 직후 서울시청 앞에 진주한 군 수뇌부.
5·16 직후 서울시청 앞에 진주한 군 수뇌부.

그러하길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5·16군사정변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민주화시대가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5·16군사정변 주동 군인이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일제 강점기 (일신의 출세를 위해) ‘괴뢰만주국 군관학교와 일본사관학교를 나온 친일 경력’의 박정희 소장이었다는 점에서 대경실색했다.

반일과 ‘친일청산’의 대의명분에 광적인 집착을 보인 강 교수는 5·16주체세력의 정치적 정당성은 물론 근대화 업적을 외면하고, 평생 동안 박정희 시대와의 역사적 화해를 거절했다. 

“5·16은 쿠데타인가, 아니면 혁명인가?” 이 질문은 우익 정권이 들어섰을 때, 고위 공직자 후보가 직면해야 하는 국회청문회 첫 번째 질문이다. 군사정변이 발생하면 우리 사회에서는 무조건 쿠데타라고 인식하는 고정관념이 팽패해 있는데, 이것은 역사의 다양성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1917년 10월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은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대해 무장반란으로 전복하고 레닌의 볼셰비키 공산정권이 등장했다. 그런데 전후 서방 역사가들은 1917년의 볼셰비키 무장봉기를 쿠데타가 아니라 혁명이라고 기술하게 된다.

그 중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1917년 볼셰비키 무장반란을 혁명으로 정당화한 역사가가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영국 사학자 카(E.H. Carr)였다. 그는 1950년 시작해 1978년 집필을 완료한 총 14권인 ‘A History of Soviet Russia(1917-1929)’에서 소련 정부의 공문서를 많이 인용하면서 레닌-스탈린 공산 정권을 긍정적으로 묘사, 서방세계에 지적 충격을 안겨줬다. 카는 1-3권까지 레닌집권기를 ‘Bolshevik Revolution'(1917-1923)으로 다루고 있다.

카에 의하면 1917년 무장폭동은 러시아 사회를 엄청나게 변화시켰기에 혁명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여기에서 쿠데타와 혁명의 차이점은 군인이 일으키면 쿠데타이고, 민중이 일으키면 혁명이라는 고정관념이나 단순한 2분법이 아니고, 주도세력의 성과가 결과적으로 엄청난 사회경제적 변화를 수반하게 되었는가의 여부이다.

즉 1917년 볼셰비키들의 무장봉기는 주도세력의 정치적 성과(결과물)에 의해 혁명으로 진화(進化)했음을 후일 역사가들이 인정한 것이다. 

볼셰비키 정권의 성과물은 다음과 같다; 레닌에서 스탈린에 이르는 철권통치 기간에 비록 소비재가 희생되고 쿨라크라는 강제적 집단농장 운영으로 무수한 인권 유린이 있었지만, 교육부문에서 문맹률을 낮추는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위로부터‘ 계획경제를 추진해 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독일군에 맞설 공업화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의 경우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은 해병대가 주축이 된 3000여 명 군인들의 무장정변, 즉 기존의 헌정질서를 일거에 무너뜨린 쿠데타였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혁명공약 6개항을 제시한 바, 

1. 반공(反共)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반공 태세를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 국제협력을 충실히 이행, 미국과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한다.
3.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다.
4.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 국가 경제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의 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집중한다.
6.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후일 혁명공약 중 1-5번을 달성했으나, 마지막 6번째인 ’민간인에게 정권 이양‘이란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박정희는 군에서 예편, 민간인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18년간 장기 집권으로 정권 이양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적표로 볼 때, 거의 대부분 혁명공약의 약속을 지켰다.

가장 특기할 사항은 단군 5천년 역사에서 어느 임금도 해결하지 못한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한 점에 있다. 그러므로 5·16쿠데타는 5·16혁명으로 진화(進化)한 것이다. 재론하지만, 쿠데타와 혁명의 차이점은 급격한 변화를 수반하는가의 여부이다, 비록 쿠데타로 집권했어도 정치권력의 계급적 이동과 교체 및 사회경제적 급격한 변화가 수반되고 산업화를 통해 현대국가를 수립했으면 혁명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10번이 넘는 월남의 쿠데타가 쿠데타로 마감한 것은 월남의 근대화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만길 교수의 저서 ‘역사가의 시간’
강만길 교수의 저서 ‘역사가의 시간’

5·16으로 정치권력 이동과 사회경제적 변화 초래

강만길 회고록 ’역사가의 시간‘에는 곳곳에서 군인의 정치 개입, 참여에 대해 혐오를 표출한다. “전통적으로 문민사회에 군사독재가 왠 말인가?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여러 구절에서 언급된다.

그는 정치는 문민, 즉 반드시 독서층이 해야 한다는 중세조선의 사대부적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문화민족‘이란 용어도 정의가 추상적이고 부정확한 구름 잡는 이야기다. 안타깝게도, 그는 21세기 기술문명시대를 살았지만, 정신구조는 중세조선의 주자학적 골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지배층 사대부계급이 문약(文弱)에 빠졌고, 당시 정규군이 불과 8000여 명에 불과했던 조선 군사력의 약점은 어디에서 근원이 있나? 강 교수가 강조한 단순히 사회경제적 요인만이 아니다. 이는 사상적 차원을 포함한 문명사적 안목이 필요한 대목이다. 

강만길은 국사편찬위에 조교로 근무하면서 조선의 상업 발달에 관심을 가졌고, 조선왕조실록을 탐독하는 기회를 얻었다. 자연히 조선시대가 ’절대선‘이라는 의식구조가 몸에 배게 되었다.

조선시대처럼 군인을 배제하고 사대부가 영구히 권력을 독점하던 유교식 전통을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문화민족‘의 역사 현상으로 간주한 것인데, 이것은 비교사적(比較史的) 차원에서 볼 때 큰 착각이다. 역사상 탁월한 정치지도자 중에서는 무사와 군 출신들이 많았다. 군사정변도 나라마다 가끔 발생했었다. 

통일전쟁으로 삼국이 쟁패한 신라에는 전투에 뛰어난 풍월도, 화랑 출신(김유신, 김춘추)이 전공을 세워 통일에 공헌했고, 고려시대에는 무인 출신이 ‘정중부의 난’ 이후 권력을 잡고 120여년 이상 정치에 개입했다(무인시대).

명예를 최고의 덕목으로 인정한 공화정 로마에서는 탁월한 전승 기록으로 집정관에 오를 수 있었으며, 유럽중세국가들에서도 기사도계급이 통치자였다. 이웃 나라 중세 일본에는 사무라이 무인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전국시대를 좌지우지했다. 

1965년 한일협정은 박정희에게는 국민의 배고픔을 일거에 해결할 회심의 카드였지만, 반평생을 반일(反日)과 친일청산을 외쳐온 강만길은 “현대사의 큰 불행”이라고 맹렬히 반대했다(2019.10.1. 시사저널). 역사가라면 이제는 반일감정을 떠나 자료와 통계로 지난 60년대 3공화국 역사를 냉철하게 되돌아 봐야 한다. 

세계사에서 개혁에 성공한 3대 쿠데타로서 ①튀르키예(과거 터키)의 케말파샤(1923), ②이집트의 나세르(1952), ③한국 박정희의 5·16(1961)을 지목하는데, 이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근대화에 마침표를 찍도록 기여한 것은 ③번이다. 박정희의 5·16이 경제성장과 자주국방의 두 과제를 달성한 점에서 케말파샤와 나세르의 업적은 박정희에 비교가 되지 못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의 1/3 수준인 튀르키예의 산업화는 주로 이스탄불과 해안 도시를 중심으로 이뤄졌고, 아직도 이슬람은 잦은 정치 개입과 서구화에 대한 저항으로 근대화에 발목을 잡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의 1/8도 안 되는 이집트는 튀르키예보다 산업화가 더 미진하고 아직도 교통, 통신의 후진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관광업으로 외화를 벌고 있다. 양국 다 중산층을 확보하지 못한 후진국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전쟁 와중에서 폴란드에 방산(防産) 대박이 터진 뒤안길에는 자주국방을 위해 몸부림쳤던 박정희 리더십의 고뇌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경제성장의 수치는 세계사적 기록이었다.

그럼에도 강 교수는 박정희의 결단과 그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답변이 궁한 나머지 자신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인 민중(民衆)을 내세운다. “민중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경제성장이 되었다”고 옹고집 부린다(222). 민중에게 열심히 일할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은 지도자가 아닌가? 기획하고 경제성장을 이끌어가는 지도층이 있기 마련이다. 

사대부가 권력 독점하던 유교식 전통을 문화민족으로 생각

6·25동란 시절 부산에서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미군부대에 알바로 일하면서 양담배와 양주를 삥땅하여 몰래 젊음을 즐겼던 강만길. 그러나 그런 배고픈 경험이 그의 반미의식을 돌이키지는 못했다.

60년대 중반 구로공단에서 수출 역군으로 무장한 어린 여공(女工)들이 신발, 옷, 심지어 자신의 머리카락까지 잘라 가발까지 수출하려고 몸부림쳤을 때, 박정희가 미국의 케네디 형제에게 백악관에서 면박당하고, 서독의 에르하르트 총리에게 30분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하면서 차관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 ‘반일’의 강만길은 역사의 방관자로서 안암골 서재에서 근대화, 산업화라는 시대정신을 외면하고 있었다. 

구차하게 5·16의 군사정변적 성격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민주주의 투표에서가 아니라 무력에 의해서 국회를 해산, 헌정질서를 갈아엎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남북한에 대한 비교사학적 관점에서 드는 첫째 의문점은 북한 김일성의 집권 과정의 정당성에 대한 것이다. 과연 강만길에게 북한 체제와 주체사상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인가? 

강만길은 통일에 관심이 많았기에 다른 역사학자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확보, 수집, 축적했을 것이다. 그는 70년대 이후 일본까지 가서 북한 서적을 입수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회고록 ‘역사가의 시간’에서는 소련 군정을 업은 김일성의 권력 장악 과정과 월북한 박헌영과 남로당원들의 말로에 대해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해방 정국에서 마르크스 경제사학자 백남운과 같은 지식인의 월북에 대해서도 함구한다. 

남한은 ‘먼지 털 듯이’ 문제점을 잡아내는데, 북한 체제가 남한에 비해 무엇이 더 매력적인지를 솔직하게 밝혀지지 않고, 민족주의와 평화통일이라는 미명(美名) 하에 그 암흑세계는 교묘하게 은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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