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공연 100회째 기념 무대 선 한국 재즈계의 대모 윤희정
재즈 공연 100회째 기념 무대 선 한국 재즈계의 대모 윤희정
  • 미래한국
  • 승인 2011.08.13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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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가 뛴다

 
멋있지만 다가가기 힘들다, 연주하고 싶지만 배우기 어려울 것 같다. 재즈에 대한 선입견이다. 재즈는 즉흥연주를 가미해 창의적으로 연주하는 것이어서 쉽게 익숙해지기 힘든 게 사실이다.
재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윤희정’이다. 풍부한 음색, 풍성한 몸매, 개성 넘치는 패션의 그녀를 만나면 누구든 강한 인상을 받고 파워풀한 공연을 보고나면 바로 팬이 되고 만다. 음악 인생 40년 가운데 재즈뮤지션으로 산 기간이 20년, 그녀는 끊임없이 재즈를 대중들과 친근하게 만들고자 애써왔다.

‘윤희정과 프랜즈’라는 공연을 15년째 이어오면서 100회 공연을 했고 매회 연예인과 기업인, 정치인, 법조인, 사업가 등 비전문가를 무대에 세웠다. 지난 5월 워커힐 씨어터에서 디너쇼로 열린 100회 기념공연은 톱스타 30여명이 참여했다. 재즈가 얼마나 흥겹고 친근한 음악인지 보여주기에 충분한 무대였다. 사실은 윤희정 씨가 100회 공연을 하면서 어느덧 사람들을 재즈 가까이로 옮겨놓은 것이다. 

100회를 기념해 <이 노래, 아세요?>라는 책도 펴냈다. 이 책은 질문을 한 다음 책장을 넘기면 바로 노래를 들려준다. 책에 80개의 QR 코드가 삽입돼 있어 스마트폰으로 스캔하면 ‘윤희정과 프랜즈’들이 무대에서 노래하는 영상과 사진을 볼 수 있다. 단골 빵집이라는 서울 동부이촌동 아마폴라에서 윤희정 씨는 책 쓰는 일이 정말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6개월 동안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썼어요. 그때가 하루 중에 가장 초롱초롱한 때 거든요. 100회를 앞두고 그간 부른 노래를 정리하고, 팬과 독자들에게 재즈 얘기를 들려드리고 싶어 쓰게 됐죠. 재즈가 금방 친해질 수 있는 음악이라는 걸 알리고 싶어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편하게 썼어요.”
이 책 한 권이면 웬만한 재즈곡은 만들어진 배경과 어떻게 부르는 게 좋을지, 그 곡과 얽힌 유명 재즈가수의 사연까지 다 알아낼 수 있다.

“요즘은 인터넷이 있으니 얼마나 편리해요. 재즈 1,2세대는 자료 얻기가 힘들었어요. 자료 구입하러 미국 일본을 숱하게 드나들었습니다. 책을 쓰기 위해 아는 내용도 일일이 확인하느라 힘들었죠. 공연을 앞두고 출연자 30여명에게 레슨까지 하느라 정말 바빴습니다.”

KBS 전국노래자랑 대상

그녀는 1970년에 곽규석 씨가 사회를 본 ‘KBS 주최 전국노래자랑’에서 대상을 받으며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신인 발굴 등용문이었는데 요즘 ‘위대한 탄생’이나 ‘슈퍼스타 K’의 인기 못지 않았다.

“지금 서울시의회 자리에 있던 시민회관에서 열렸는데 대단한 열기였어요. 그때 지하도에 전부 내 얼굴이 표지로 나온 잡지가 도배를 할 정도였어요. 그 즈음에 오빠가 사법고시에 합격했는데 나 때문에 묻혀 버렸죠. 2년간 KBS 전속가수였고, <세노야> <지다남은 잎새>로 레코드도 냈어요.”
전속이 끝난 후 동아방송에서 방영된 드라마의 주제곡을 불렀는데 워낙 자주 나와서 ‘윤희정’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결혼하면서 가수활동을 그만두었던 그녀는 1980년대 초에 우연히 가수 허림 씨의 신앙 간증을 듣고 예능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미션스쿨에 다닐 때 성가대 지휘도 했는데 한동안 쉬다가 다시 나가게 된 거죠. 초창기에는 고은아 권사님과 새벽기도에도 나갔어요.”

교회에 다니면서 CBS에서 주최한 해외 가스펠공연 무대에 많이 섰다. 윤복희, 임희숙, 김민식, 장욱조, 최민수 씨와 함께 세종문화회관에서 <이 손을 보라>라는 기독교 뮤지컬도 공연했다.  
“당시 KBS 예술무대에 종종 나갔는데 그때마다 가스펠을 불렀어요. 요즘도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 때면 호텔에서 가스펠 디너쇼를 하면서 한 해를 마감해요. 지난해 12회 공연을 했어요. 힘들이지 않고 가요계에 진출해서 별로 힘든 시절도 없었어요. 특별히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경쟁의식이 없었지만 그 즈음 노래를 할 때면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딱히 돌파구를 찾으려고 생각한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기회가 왔다.
“1990년에 제 가스펠을 들은 어느 기획자가 전화를 했어요. 재즈를 부르면 좋겠다며 만나자는 거예요. 그 분 전화 목소리가 참 좋아서 만나봤지요. 연신내에 있는 이판근 선생님 댁으로 저를 데리고 가는 거예요. 그 선생님을 만나 재즈에 입문한 것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한 거죠. 그때가 서른여섯 살이었어요. 자신도 모르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올 수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저를 보면서 희망을 잃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재즈 1세대로 실력가였던 이판근 선생은 그녀를 보자마자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사람이 왜 거적 쓰려고 하나, 목소리도 시원하고 좋은데 왜 힘든 재즈를 배우려고 하나”라고 물었다. 멀고 험한 길이니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의미였는데 갑자기 오기가 발동했다. 게다가  듣는 순간 ‘느리고 힘들고 튀는 것도 아닌’ 묘한 재즈 음률에 매료돼 버렸다. 무엇보다도 가스펠 가수인 그녀는 이미 재즈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던 것이다.

가스펠 부르다 재즈 입문

아메리카로 건너온 아프리카의 노예들은 자신들만의 토속 음악인 흑인 영가를 불렀고, 흑인들의 교회에서 흑인 영가 스타일을 차용해 가스펠을 불렀다. 가스펠은 농장에서 일하던 노예들에 의해 블루스화됐는데, 이는 곧 로큰롤과 소울로 발전하는 한편, 재즈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재즈를 접한 윤희정 씨는 자신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는 음악임을 직감하고 깊이 빠져들었다. 이판근 선생은 자료 찾는 것도 공부라며 희귀 자료를 구해서 연구해 오라는 숙제를 곧잘 내주었고, 윤희정 씨는 어떤 어려운 사안도 끝까지 매달렸다. 곡을 받으면 영어에 능통한 박사 출신 동생들과 함께 번역을 하며 디테일한 감정까지 살려서 연습했다.

“헤어졌다는 가사가 있으면 전문을 다 살펴보고 여자가 그냥 가버린 건가, 혼자 기다리는 건가, 세밀히 분석해 가사에 맞는 감정을 내기 위해 애썼어요.”
재즈 공부를 할 때 KBS 열린음악회 무대에 10여 차례 섰는데 그때 ‘세노야’를 재즈풍으로 바꾸어서 부르기도 했다. 대중적 인지도가 있었던지라 재즈로 전환하면서 재즈가수라는 이미지를 빠른 시간에 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재즈를 부를 무대가 마땅치 않았다. 재즈 가수는 대개 클럽에 나가 노래를 해야 하는데 두 자녀가 아직 어린 데다 크리스천인지라 클럽 무대에 설 형편이 아니었다. 재즈는 부르는 사람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만큼 넘버원이 아닌 ‘온리 원(only one)’이 되길 소망했던 그녀는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공부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을 때 정동극장장이었던 홍사종 씨가 연락을 해왔다.
“1년간 정동극장에서 재즈공연을 하자는 겁니다. 매달 재즈공연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아서 처음에는 못한다고 했다가 결심하고 시작한 게 1년 반을 했어요.”

그녀는 재즈가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뭘까를 고민하다가 재즈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무대에 세우기로 했다. 그래서 공연마다 연예인 한 명과 일반 직종에 근무하는 사람 1명 무대에 세웠다. 재즈의 문외한을 무대에 세우기 위해서는 보통 3개월 정도 트레이닝을 시켜야 한다.
“초창기에 가수 이소라, 김건모 씨 등 쟁쟁한 가수들도 섰고, 연기자들도 재즈를 불렀어요. 홍사덕 정무1장관은 직접 찾아가서 무대에 서 달라고 부탁했죠.”

 
클럽 무대 대신 공연의 길로

2000년부터 문화일보홀로 자리를 옮겨서 공연을 계속했다. 그간 송일국, 신애라, 김효진 등 연예인과 국회의원 남경필, 영화감독 이장호, 김규헌 부장검사, 이재만 변호사 등 250명이 무대에 섰다. 관객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부르는 재즈를 들으며 자신감과 함께 대리만족을 느꼈다.

2시간 넘게 이어지는 공연에서 윤희정 씨는 10여곡 이상 소화하면서 사회자로서 쇼를 이끌어간다. 게스트와 대화하고 중간 중간 재미 있는 이야기도 들려주는 편안한 분위기가 ‘윤희정과 프랜즈’의 특징이다.
100회 공연이 매진이었지만 공연을 통해 얻은 수익금은 하나도 없다. 500석 극장에서 쇼를 준비하는 데 워낙 비용이 많이 들어 그야말로 손해 안 나는 걸 다행으로 여기며 매회 공연을 했다. 코러스, 악단, 분장, 무대 스태프까지 합쳐 40명의 대부대가 공연을 만들기 때문이다. 대신 VIP를 위한 행사와 기업체 공연에 자주 초청되는 것이 그녀가 활동하는 데 윤활유가 되고 있다. 

이름 내고 돈 버는 일보다는 즐거운 일을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그녀는 늘 다음 공연 기획으로 분주하다. 요즘 101회 공연을 앞두고 새로운 극장을 섭외하느라 바쁘다.
윤희정 씨는 공연 때마다 창작 재즈곡을 선보인다. 한국적 재즈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우리말과 우리의 리듬, 우리의 정서를 담아 만든 곡들을 공연 때마다 열창한다. 창작곡의 가사는 대개 윤희정 씨가 붙였다. 문학소녀로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창작곡을 듣는 순간 시상을 떠올리는 편이다.
윤희정 씨의 오랜 숙원은 자신만의 재즈곡을 갖는 것이었다. 빌리 홀리데이를 비롯한 유명 재즈가수들이 자신의 재즈곡을 갖고 있는 게 부러워 스승 이판근 선생을 졸라 곡을 받았다. 대신 이판근 선생이 “가사는 네가 써라”고 명령해 직접 가사를 쓴 곡이 ‘YHJ 블루스’이다. 곡 중간에 나오는 꽹과리 연주가 돋보이는, 한국적 정서를 담은 곡이다. 윤희정 씨는 공연 때마다 꾸준히 익힌 꽹과리, 콩가, 카바사, 쉐이커 같은 손악기와 타악기를 연주하며 흥을 돋운다.

‘세노야’로 노래 인생을 시작한 그녀는 매 공연 오프닝 때면 이 노래를 부른다. 늘 다른 느낌으로 부르면서 각오를 다지는 이유는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20년 전 재즈에 입문해 지금도 계속 공부하고 있다는 그녀는 스스로를 ‘재즈 잘하는 가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노래, 아세요?> 책 서문에 “저는 능력이 모자랐고 재즈가 어려웠습니다. 어느 날은 ‘이제 뭔가를 좀 알겠다’ 싶게 가까이 다가온 듯 하다가도 다음 날엔 저만큼 멀어져 있었습니다. 포기하려고 하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제 몸에 음악이 들어와 있기도 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적 재즈 보급 앞장서

그녀는 재즈를 ‘열정만으로 되지 않는 음악, 한없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만 비로소 조금씩 이해되는 음악’이라고 정의한다. ‘윤희정의 러브’(2010) 등 여러 장의 재즈 앨범을 발표한 그녀는 앞으로도 앨범 작업을 계속할 예정이다.

“날이 갈수록 재즈가 좋아져요. 더 일찍 몰랐던 게 아쉬울 정도예요. 영혼의 목소리를 내는 재즈싱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부르는 재즈싱어가 돼야죠.”
<시카고><넌센스>같은 뮤지컬에 출연해 백상예술대상 인기상을 받은 그녀는 자신보다 더 끼가 많은 딸 수연을 생각하면 늘 뿌듯하다. 김수연 씨는 작곡과 편곡을 하면서 ‘윤희정과 프랜즈’ 공연에도 참여하고 있다.

“저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해요. 모든 일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이루어 가는 거잖아요.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음악이 ‘듣고 싶다, 듣기 싫다’로 나뉘는 세상입니다. 리모콘으로 돌리지 않고 계속 보고 싶은 사람이 돼야죠. ‘그대여 살아 있는 아름다운 동안 나에게 사랑을 주세요’라고 시작하는 시가 있는데 살아 있는 동안 사랑을 나누며 아름답게 살아야죠.”

그녀의 목표는 ‘언제까지든 보고 싶은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아울러 재즈와 함께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윤희정 씨의 꿈이다.

글/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사진/ 이승주 사진가  ssina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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