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과 대통령, 그 사이의 박정희
王과 대통령, 그 사이의 박정희
  • 이원우
  • 승인 2012.09.26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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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할 시간
 

결국 인간은 둘 중 하나로 갈리는 게 아닐까. 배고픔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대한민국의 이념 스펙트럼이 극단적으로 분절돼 있다면 그 이유는 바로 이 두 유형의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기서의 배고픔이란 ‘아침을 굶었더니 배가 고프다’는 뉘앙스와는 완벽히 다르다. 먹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생각도 나지 않는 말 그대로의 ‘공복’이다.

요즘 남자들이 이와 같은 경지의 배고픔을 아주 잠시나마 느껴보는 것은 군대 훈련기간 때다. 남녀 사이에 군대 얘기가 나올 때 그 끝이 항상 비극으로 귀결되는 건 실은 아주 간단한 원리에서 기인한다. 배고픈 느낌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시간을 벌 목적으로 짐승처럼 달리면서 오줌을 눈다. 5분 후에 빵이 배급되기 때문이다.”

- 아우슈비츠 경험 작가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청춘남녀 간에도 해결이 안 나는데 세대 간 견해차가 메워질 턱이 없다. 그 기점은 정확히 박정희다. 50대 이상의 기성세대들이 박정희에 우호적인 감정을 갖는 것은 복잡한 정치나 경제이론 때문이 아니다. ‘느낌’과 ‘기억’ 때문이다.

박정희 이전의 한국은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빈곤국이었다. 6·25에 참전한 미군용사 중 상당수는 아직까지 ‘한국’ 하면 ‘대다수 국민들의 머리에 이(lice)가 있는 나라’를 연상한다. ‘언제쯤 우리나라도 필리핀처럼 잘 살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인도네시아의 눈부신 발전상을 지켜보며 부러움과 질시의 눈물을 삼키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한국이 박정희 이후로는 잘 살게 되었다. 그것이 100% 박정희 덕분은 아닐지라도 지긋지긋한 배고픔을 떨친 사람의 느낌과 기억은 그의 역할을 예사롭지 않게 인식시켰다.

왕이 되고자 했던 남자

박정희를 이해하는 코드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왕(王)’이라는 단어 하나를 제시하고자 한다. 쉽게 말해 박정희는 왕과 대통령을 구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박정희의 출생연도는 1917년. 조선시대 고종 황제와 2년, 순종과는 9년이 겹친다. 거기에 덧붙여 박정희는 일제시대에 청년기를 보냈다. 역시 천황을 세상의 중심으로 놓는 헤게모니 안에 있었다.

종전 후 해방을 맞은 1945년에 박정희의 나이는 스물여덟. 가치관이 확립된 나이까지 왕정주의 세계를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5·16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그가 새 시대의 ‘왕’이 되고 싶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대통령을 ‘현대 버전의 왕’ 쯤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개명천지 21세기에도 차고 넘친다.

그런 박정희에게 현대 민주주의의 룰을 들이대며 비난을 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북한에 대해서는 ‘내재적’ 관점을 쉽게 허락하는 많은 비판자들은 유독 박정희에 대해서만큼은 외재적 관점을 고수한다.

진중권 교수는 9월 18일 오마이뉴스에 게재한 칼럼 <유신에 발 묶인 대한민국, 김진은 우리 시대 그리스도>에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썼다.

“며칠 전 영남의 어느 도시에 강연을 갔다가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박근혜 후보가 시장을 방문했더니, 그곳에서 장사하던 어느 할머니가 "공주마마 오셨다"며, 넙죽 엎드려 큰 절을 올리더란다.”

이 에피소드는 박정희 치하의 국민들도 왕과 대통령을 혼동했다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육영수 여사와 박정희 사후에 온 국민이 통곡을 했다는 에피소드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은 ‘왕’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에피소드 속 할머니는 ‘이상한 할머니’가 아니라 ‘기억력이 좋은 할머니’다.

한국 역사를 가로지르는 아이러니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박정희는 민주주의 기준으로는 독재자였지만 왕정주의를 기준으로 하면 훌륭한 지도자였다. 성군(聖君)의 첫 조건은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18남 4녀의 자손을 두며 32년간 집권했다고 해서 그를 ‘호색한 독재자’라 욕하는 사람은 없다. 그의 치세가 대략적으로 태평성대였기 때문에 과거는 과거로 묻어둔 채 내재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뿐이다.

김재규의 저격으로 급사한 박정희에게서는 아무리 털어도 그 흔한 비자금 한 푼 나오지 않았다. ‘조선시대’와 ‘민주주의’의 경계선에서 그는 진심으로 성군이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미 죽고 없는 그를 지금의 시대로 끌어와 도마 위에 올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박정희는 생각만큼 현대인과 가까이에 있는 인물이 아니다. 몸과 마음, 행동과 사고방식 모두 아주 멀리에 있는 사람이다.

구분해야 할 사실들

박근혜 후보가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요점도 여기에 있다. 한국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이것은 박 후보가 아무리 박정희의 딸이라 한들 그녀의 아버지와 가까운 거리에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많이 달라졌다. 21세기 한국의 민주주의는 과잉을 걱정할 정도로 흘러넘친다. 대통령은 이제 왕은 커녕 저잣거리의 거지보다도 심한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필요한 것은 명확한 ‘이념의 교통정리’를 하는 일이다. 왕정주의는 끝났고 민주주의가 시작됐다. 대통령은 왕과 다르다. ‘아버지 박정희’를 사랑하지만 ‘왕 박정희’의 방식을 따라갈 생각은 없으며 ‘대통령 박근혜’가 되고 싶다. 이 말이 그렇게 어려운가?

박 후보가 인혁당 발언과 같은 ‘사고’를 내는 이유는 왕과 대통령과 아버지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며 미래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을 포기한다면 그녀는 아버지의 후광에 기댄다는 ‘느낌’과 ‘기억’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왕 박정희는 성공했다. 경제성장을 주도해 가엾은 ‘백성’들을 배고픔에서 탈출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 박정희는 실패했다. 권위주의 독재로 ‘시민’들을 희생시켰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다행인 것은 박정희의 독재가 권위주의에서 그쳤을 뿐 전체주의로 흐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체주의와 권위주의의 차이는 작지만 큰 것이다. 북한에선 아직도 김씨 부자를 욕하면 수용소로 잡혀간다. 하지만 박정희가 일반인을 억압한 강도는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이 역시 스스로 생각한 성군의 조건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유의 여지를 열어둔 덕에 2012년, 왕이건 대통령이건 멋대로 욕할 수 있는 세상이 왔지만 이제 시대는 임금이 아닌 대통령을 원한다. 지금은 배고픔의 ‘느낌’과 ‘기억’에서 자유로워진 우리가 망자(亡者)들을 놓아주고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할 시간이다. (미래한국)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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