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은 근본주의 보수철학 영화
‘레미제라블’ 은 근본주의 보수철학 영화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3.01.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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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화 ‘레미제라블’이 좌파 매체들의 마케팅 수단이 되고 있는 상황을 목격한다.

진보당 노회찬 공동대표는 최근 "프랑스의 `레미제라블`은 영화관에 가면 볼 수 있는데 한국의 `레미제라블`은 지금 추위에 떨면서 철탑 위에서, 굴뚝 위에서, 그리고 치러지지 않는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삼키고 있다"며 "박근혜 당선자가 한국의 `레미제라블`을 조속히 만나기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오마이 뉴스> 는 한 칼럼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견마지로의 자세로 일할 수 있는 레마제라블 속 마리우스와 앙졸라 같은 이들이 계속해서 나와야 한다. 하지만 혁명보다는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이 많은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고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

문화평론가 진중권씨는 씨네21의 한 영화평에서 “대선 결과에 낙담한 자들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준 것은 영화 <레미제라블>이었다. .. 이 작품이 흥행 돌풍을 일으킨 것은 영화 속 상황이 묘하게 우리의 것과 중첩되기 때문이리라. 젊은이들의 순수한 혁명의 열정에 파리 시민들은 냉담하게 등을 돌렸다. 그 참상에도 불구하고 왜 파리의 민중은 봉기하지 않았을까?”라며 이 영화를 진보적 가치로 평가한다.

빅토르 위고의 초월적 질서, 슈탈적 보수주의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탐색하는 대서사다.

중요한 것은 레미제라블이 진보적 이념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오히려 구원을 통한 근본적 보수주의, 다시말해 초월적 질서의 세속적 규범을 말하는 19세기 법철학자 프리드리히 슈탈(Friedrich Julius Stahl )의 보수 철학에 기반해 있다는 점이다.

‘국가는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을 실현하는 존재’로 본 슈탈은 국가와 법은 모두 신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기독교 보수주의 철학의 기반을 정립했다.

그러한 슈탈은 1840년 베를린 대학 법철학 교수가 되었으며, 19세기 전기에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주창한 보수적 사상가의 대표자였다. 그는 나중에 프로이센의 제1보수당의 당수가 된다.

이때 왕권신수설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왕은 신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국왕은 세속적 질서를 초월해 역사의 주관자인 신의 뜻에 따라 자비와 선행, 그리고 절대선에 입각한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럼으로써 세속의 국가는 하나님의 나라에 근접할 수 있다고 슈탈은 주장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왕권신수설을 주장한 슈탈이 사회주의의 몰락과 나찌즘이라는 광기의 출현을 정확히 예언했다는 점이다. 슈탈은 영성이 아니라 불완전한 이성에 의한 과도한 설계주의 이념들이 결국 성경의 리바이어던과 같은 괴물을 불러낼 것이며, 그 교만한 이성의 불완전함으로 의해 스스로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슈탈은 이성을 초월한 영성의 질서안에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사회의 원리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슈탈의 사상은 당시 훔볼트와 함께 유럽전역과 프로이센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아주 오랜동안 유럽의 근본주의적 보수주의 사상이 됐다. 아울러 그의 사상은 피터 드러커에 이어져서 드러커는 자본주의 기업을 하나님의 질서를 구현하는 수단으로 해석했고 CEO를 그러한 초월적 도덕의 실현자로 보았다. 현대 경영학은 드러커에 의해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구원을 통한 초월적 규범의 장발장

자 그러면 이제 <레미제라블>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빅토르 위고는 그러한 슈탈의 보수주의를 내면화한 지식인이었다. 위고는 처음에 왕당파를 지지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주의를 받아들이며 공화주의자의 면모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그의 내면의 본질은 언재나 '신의 구원을 통한 도덕'이 세속의 법보다 우선한다는 근본주의적 보수사상이었다. 그로인한 대작이 바로 <레미제라블>이다.

가난한 누이의 자녀들을 위해 빵 한조각을 훔친 ‘장발장의 죄’라는 것은 바로 세속적 질서의 정당성에 대한 위고의 질문이다. 즉 세속의 법이 과연 신의 섭리를 따르고 있느냐는 위고의 항변이다. 이로부터 장발장의 끝없는 탈출은 그의 세속적 자유의지를 말하지만, 결국 장발장의 진정한 자유는 '신의 구원'을 통해서 얻어지게 된다.

이렇게 초월적 도덕에 의해 얻어진 자유는 장발장을 세속적 질서보다 한 차원 높은 도덕적 규범의 세계로 이끈다. 다시말해 초월적 규범에 사는 자는 이성이 설계한 세속의 법보다 더 고귀한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다. 바로 슈탈이 이야기한 초월적 규범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한 장발장을 끝까지 추적하는 형사 자베르는 세속적 규범의 수호자다.

자베르는 장발장에게 ' 너같은 인간을 잘 안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리바이어던의 이성이 설계한 세속적 규범의 수호자 자베르는 초월적 구원을 통한 규범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을 통해 교만한 이성, 리바이어던의 한계를 이야기 한다.

진정한 보수주의는 그러한 리바이어던에게 복종하는 자가 아니라 오로지 그 리바이어던을 세운 神에게만 복종할 자유가 있다고 위고는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보수주의자는 세속에서 리바이어던조차 할 수 없는 숭고한 일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장발장은 진보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근본적 보수주의자다. 그것도 기독교적 보수주의, 즉 슈탈리언 보수주의자다. 슈탈이 말한 ‘하나님의 왕국’을 실현하는 자라는 이야기다.

슈탈의 이러한 보수주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레미제라블은 그야 말로 '너 참 불쌍타'로 끝나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면 장발장이 불쌍한 것인가? 정말 불쌍한 존재는 장발장이 아니라, 리바이어던의 노예 자베르다.

슈탈의 초월적 보수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좌파나 진보, 그리고 국가주의자는 레미제라블의 메시지와 장발장을 잘 이해할 수 없게된다.

그러니 장발장을 '피해자'라고 하는 좌파의 엉뚱한 선동이나, 거기에 발끈해 '장발장은 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반론하는 보수 매체의 문화부장의 반론이 등장한다. 또 어떤 일간지의 논설위원은 민주주의를 이야기 한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의 메시지는 ‘이성을 초월한 영성이 만든 규범과 질서’다.

그래서 장발장은 피터 드러커가 가장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CEO의 모습이기도 하다. (미래한국)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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