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 냉온탕 외교사
한국과 중국, 냉온탕 외교사
  • 김주년 기자
  • 승인 2013.06.10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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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악연 … 수교 이후 화해·갈등 반복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친 박근혜 대통령의 다음 행선지는 중국으로 예정돼 있다. 박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오는 6월말 중국에서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그만큼 중국은 대한민국의 외교에 있어서 중요한 나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건국 직후에는 중국과 악연이 더 많았던 게 사실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에 의해 공산화된 중국은 6·25 남침 당시 북한 김일성 정권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바 있다.

초반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국이 참전하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결국 연합군은 휴전선 이북을 북한에 내줘야 했고 아직도 대한민국의 미수복 영토로 남아 있다.

냉전을 거치면서 중국은 북한, 소련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적국 중 하나였다. 이랬던 중국과 한국이 정식 외교관계를 체결한 것은 90년대 들어서다. 양국은 1992년 8월 24일 그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했다.

당시 한국 대표였던 이상옥 외무장관과 첸지천 중국 외교부장은 이날 베이징에서 △상호불가침, 상호내정불간섭 △중국의 유일합법정부로 중화인민공화국 승인 △한반도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원칙 등을 골자로 한 6개항의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간의 외교관계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을 교환했다.

양국은 앞서 90년 1월 무역대표부를 설치한 후 수차례에 걸친 외무장관회담 등으로 수교협상을 본격화했으나 실제로 수교가 이뤄지기 까지는 난항을 거듭해 왔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중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당시 한국의 우방이던 대만과의 단교를 강하게 촉구했기 때문이다.

황장엽 한국행, 수교 기념 선물?

1997년 4월 20일 북한 노동당 비서이자 주체사상연구소 소장을 지냈던 황장엽 씨는 측근인 조선여광무역연합총회사 김덕흥 전 총사장과 함께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황장엽 씨 귀순 과정을 살펴보면 92년 수교 이후 중국이 한국에 준 외교적 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故 황장엽 씨가 주중 한국대사관(영사부)에 귀순을 신청한 건 1997년 2월 12일이었다. 이후 그는 35일만인 3월 18일 중국을 떠나 필리핀에 도착했다.

이는 북한의 혈맹인 중국이 황 씨의 탈북 및 망명을 묵인해 줬기에 가능했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장쩌민 국가주석과 리펑 총리 앞으로 감사 서한을 보냈다.

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양국 관계는 더 가까워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국에 대한 ‘저자세 외교’가 시작된 계기였다.

김대중 정부 임기 중반이던 2001년 6월 30일 한·중어업협정이 정식으로 발효됐는데 당시 양국은 이어도 유역을 한국과 중국 어선이 공동으로 조업하는 한·중 중립지대로 설정하는 데 합의했다. 현재 중국은 이를 근거로 이어도에 대한 야욕을 숨기지 않고 있다.

6·25 당시 적국이었던 양국이 군사 교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도 이때부터였다. 2001년 10월에는 한국 해군 함정이 중국 상하이를 방문했는데 이는 수교 이래 최초였다. 2002년 5월에는 중국 동해함대 해군 함정 2척이 최초로 방한했다.

노골적 친중 노선 표방한 노무현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친중(親中) 노선은 더욱 선명해졌다. 반미성향이 강했던 노무현 정권으로서는 미국의 잠재적 적국인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강화시켜야겠다는 입장이 강한 듯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7월 중국을 방문, 베이징대에서 강연을 하던 중에 존경하는 중국 지도자를 묻는 질문에 “마오쩌둥(毛澤東)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6·25 전쟁 당시 참전을 결정해 김일성을 도왔으며 1960년대 문화대혁명을 통해 1천만명 이상을 사망하게 한 중국의 대표적인 독재자다.

또 노 대통령은 2004년부터 본격 시작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고구려연구재단을 해산시키는 등 중국에 굴종하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다.

고구려연구재단 상임이사를 지낸 최광식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당시 라디오 인터뷰에서 “2004년에 고구려연구재단을 만든 후 중국과 두 차례 학술회의도 가지는 등 활발히 활동했으나 정부에서 고구려연구재단을 없애서 이상하게 됐다”고 밝혔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직을 정년 퇴임한 임효재 교수도 “2004년 초 문화관광부 장관 주재로 외교통상부 국장, 문화재청 관계자, 학계 인사 등이 참석하는 중국의 동북공정 대책회의가 열렸는데 참석한 정부 고위 관계자가 ‘대세를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취지로 발언해 깜짝 놀랐다”고 증언한 바 있다.

中 대사관 주도로 서울에서 소요사태

2008년에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 같은 친중 일변도의 외교 노선에 변화가 생길 기미가 보이자 중국은 한국에 노골적인 외교적 결례까지 범하는 등 각종 만행을 저질렀다.

2002년 4월 베이징올림픽 성화 봉송 당시 주한 중국대사관은 국내에 거주하는 유학생 등 중국인들을 동원해 폭동에 가까운 소요사태를 일으켰다.

당시 중국인들은 길가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각종 폭력을 행사하고 광화문과 올림픽공원 일대에서 ‘해방구’를 형성하기도 했다. 성화 봉송을 무사히 마치겠다는 취지로 대한민국 시민들을 상대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이후 양국간 외교관계는 최악에 달했다. 당시 중국은 천안함 폭침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으며 한 중국 외교관은 “미국만 아니었으면 한국은 손봐줬을 나라”라는 망언도 서슴지 않았다. 현재 이런 갈등은 봉합된 상황이지만 양국간 뜨거운 감자인 이어도를 둘러싸고 갈등이 재점화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김주년 기자 anubis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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