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인생극장... 막이 내리고 비로소 시작되는 아버지,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
[신간] 인생극장... 막이 내리고 비로소 시작되는 아버지,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8.02.27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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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노명우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이후 파주에 주둔한 미군을 상대로 ‘레인보우 클럽’을 운영했던 아버지, 그 옆에 미장원을 열어 양공주들의 머리를 말았던 어머니 덕분에 달러 경제의 혜택 속에서 자랐다. 그가 태어났을 무렵은 미군 부대가 철수하고, 그 자리에 한국군이 들어와 레인보우 클럽은 무지개홀로, 미장원은 무지개 다방으로 모습을 바꾼 뒤였다. 유년 시절 어머니의 다방에 앉아 마담과 레지, 군인과 면회객들이 빚어내는 세상 물정의 풍경을 구경하며 자랐다. 그에게 성장이란 학교에서 배우는 조국의 밝은 미래와 다방 손님들의 울분과 한탄 사이에 놓인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것이었다. 기지촌의 어딘가 모르게 부끄러운 풍요 속에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박사가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꿈에 닿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결국 미국이 아닌 독일에서 박사가 되었다.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에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열정을 물려받았고, 버밍엄학파의 문화 연구에서는 동시대에 대한 민감한 촉수의 필요성을 배웠다. 현재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다. 지은 책으로 『세상물정의 사회학』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노동의 이유를 묻다』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계몽의 변증법?야만으로 후퇴하는 현대』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아방가르드』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사회학의 쓸모』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구경꾼의 탄생』(공역) 등이 있다.

이 책의 출발점은 사회학자인 아들이 대신 쓰는 부모의 자서전이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하고 해석해야 할 사회학자가 왜 가장 사적이면서도 내밀한 이야기인 부모의 삶을 꺼내든 것일까? 전작 『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 보여주었듯 사회학자 노명우는 한 개인이 세속을 살아가며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문제들, 생활인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고통과 분노의 순간들을 우리 모두의 문제로 끌어올리는 것에서 사회학의 존재 의의를 찾는다. 개인이 맞닥뜨리는 삶의 고비들을 ‘운이 없어서’, ‘가진 게 없어서’, ‘팔자를 잘못 타고나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로서 설명하는 것, 그래서 그 개인들에게 자기 삶을 설명할 언어를 제공하는 것이 사회학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떠난 부모의 삶을 기록하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하려는 아들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부모와 동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언어를 제공하는 사회학적 탐구의 여정이 되었다. 

1924년생 아버지, 1936년생 어머니의 삶에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전쟁을 겪고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룬 세대가 공유한 사회적 운명이 새겨져 있다. 아버지는 식민치하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 붐을 타고 만주로 향했고, 강제 징용의 대열을 따라 나고야의 조토헤이(상병)가 되기도 했다. 전쟁 이후에는 많은 이들이 그랬듯 달러가 모이는 곳, 즉 미군기지 근처에 정착해 가족을 재건했고, 아내에게는 전혀 살갑지 않지만 밖에서는 돈 잘 쓰는 호탕한 남자 행세를 하며 제법 윤택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역사가 특별히 기록할 리 없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였다. 한편 어머니는 가난한 집 막내딸로 태어나 국민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전쟁 통에 고아가 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아버지와 결혼해 파주 미군기지 근처로 이주했고, 미장원을 열어 양공주들의 머리를 말았지만 그들과 다른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늘 한복을 입었다. 남편이 벌여놓은 일을 수습해가며 웃음기 없는 삶을 살던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은 자식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것이었다. 자식 교육에 모든 것을 걸었던 어머니 역시 특별할 것 없는, 전형적인 ‘한국 여자’였다. 

저자는 이렇듯 ‘범례凡例’의 삶을 살았던 부모의 인생을 ‘특례特例’의 삶을 살았던 박정희의 삶과 줄곧 대비한다. 혈서까지 쓰고 만주로 가서 일본군 장교가 되고, 전쟁 이후에는 한국 군인으로 변신해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결국 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그의 이름은 끊임없이 호출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그저 그런’ 사람들, 단 한 번도 공적인 무대에 서본 적 없는 보통 사람의 이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 그 ‘개성 없는’ 삶을 통해 서로를 동시대인으로 만들어준다. 이 책은 눈에 잘 띄진 않지만 저마다의 빛깔로 반짝였던 그들 모두의 인생이 모여 한 시대를 이루었음을 정성스럽게 증명한다. 역사는 비록 그 시대를 ‘박정희 시대’라 호명할지라도 그 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모습은 아마 박정희가 아니라 개성 없는 ‘그들’의 삶에서 더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저자는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못한 부모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1920~70년대 한국 대중영화를 소재로 삼았다. 보통학교 졸업이 배움의 전부였던 아버지, 그마저도 마치지 못한 어머니는 독서 공중이 아니었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은 책이나 신문이 아니라 떠도는 소문이나 영화 구경을 통해 알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특별히 배움이 짧은 편은 아니었다. 당시는 텍스트의 세계에 모여 있는 사람보다 영화관에 모이는 사람이 더 많았다. 대중교육이 부재했던 시절 영화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접할 수 있는 대중 미디어였다. 사람들은 영화관 안에서 관객이라는 지위를 공유하며 모든 차이를 내려놓고 ‘동시대인’의 감각을 배웠다. 

대중영화에는 특정 시대의 소망이 담겨 있다. 대중영화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은 채 보통 사람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기대를 재현한다. 비평가에게는 통속적이거나 저속한 키치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 ‘대중성’은 부모가 공유했던 ‘심층 소망’을 찾으려는 아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통로이다. 아들의 관심은 부모가 공감했을 당대의 ‘욕구’와 ‘열망’의 흔적을 대중영화를 통해 추적하는 것이다. _ 42쪽 

저자는 아버지가 태어났던 일제강점기의 농촌 마을을 상상하기 위해 그 무렵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1925)와 〈Tyosen〉(1939)을 본다. 가난한 환경에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한 소년의 수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수업료〉를 통해서는 아버지의 인생에 ‘고쿠고國語’(일본어)와 권력에 순응하는 태도를 깊이 새긴 식민지 시기 보통학교의 분위기를 추측한다. 아들 사회학자가 영화를 통해 아버지의 소년 시절을 구경하듯, 당시 아버지는 영화관에서 전쟁의 스펙터클을 구경했다. 용감하게 싸우는 일본군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제국의 질서에 편입되어갔다. 그런 아버지가 실제로 일본군이 되고, 일본이 패망한 뒤에는 미군의 달러를 거두며 살아가게 된 삶의 궤적을 저자는 같은 시기에 제작된 영화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꼼꼼하게 복원해나간다. 

어머니의 삶에는 당시 영화들이 전후 여성을 묘사한 두 가지 방식, 즉 양장을 한 채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의 길과 한복을 입고 집안 살림에 충실한 어머니의 길이 교차한다. 기지촌의 여염집 여자로 살면서 영화 〈지옥화〉나 〈오발탄〉에서 그리는 양공주에 대한 모멸적 시선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어머니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나 〈또순이〉의 주인공처럼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에 충실한 ‘장한 어머니’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철저하게 단속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영화 〈로맨스 빠빠〉가 제시하는 화목한 중산층 가족, 문화영화 〈유쾌한 삼형제〉가 그리는 청와대 세 자녀의 여유롭고 활기찬 모습을 ‘희망 독본’으로 삼아 전후의 폐허 위에 이상적인 가족을 재건해나갔다. 

영화 속 배우들의 대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의 심정과도 같았다. 식민지배와 전쟁을 거치며 열린 생활력의 시대, 체면 따위 벗어던지고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통념을 배우들은 관객을 대신해 소리 내어 말해주었다. 

“미국 놈이나 한국 놈이나 사내는 다 같애. 그저 돈이 제일이다, 얘.” _ 〈지옥화〉(1958) 
“선생님, 저 미국 얘기가 듣고 싶어요.” _ 〈자유결혼〉(1958) 
“우리는 왜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까?” _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애비가 못 배웠으면 자식들이라도 가르쳐야지.” _ 〈수학여행〉(1969) 
“난 결심했다. 이왕 촌을 쫓겨나온 이상 남자 털어먹는 직업을 갖는다.” _ 〈화녀〉(1971) 

이 책은 대중영화가 당대인들이 생활철학으로 삼는 세속의 가치들을 드러내는 데 매우 유용한 텍스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가 인용한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의 말처럼 대중성은 “어떤 사회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 특정한 문제를 바라보는 두려움, 함께 흥분하며 설레는 상상력 등을 이야기 속에 녹여낼 때” 생기는 현상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흥행영화들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관객, 즉 그 시대의 보통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었던 꿈과 소망, 불안과 공포, 고통과 좌절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저자는 부모의 삶을 영화와 문학, 신문과 잡지 등 자료를 통해 복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운명처럼 내던져진 공간, 꼼짝없이 갇혀버린 장소를 하나하나 다시 찾아가 아버지의 선택, 어머니의 좌절을 느끼고 상상한다. 농부가 될 예정이었던 아버지가 그 운명을 거부하고 끝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충남 공주군 반포면 송곡리는 어떤 곳일까? 고향을 등진 아버지가 무엇에라도 홀린 듯 붐을 타고 떠났던 희망의 땅이자 모던의 공간이었던 만주, 징용병으로 끌려갔던 나고야 보병 제6연대의 자리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아버지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는 아들 사회학자의 발걸음은 독자의 눈앞에 그 옛날의 도로와 철로를 펼쳐놓는다. 독자는 저자와 함께 그 장소로 들어가 식민지라는 현실에 내던져진 개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했던 선택과 그로 인해 휘말려 들어갔던 운명을 상상하게 된다. 

어머니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장소는 돌을 캐는 채석장 위에까지 아슬아슬하게 집이 들어선 서울 창신동의 절개지 마을이었다. 저 아래 혜화동이나 동숭동 같은 부자 동네가 아니라, 식민지 권력에 화강암만을 제공했던 도시 빈민의 거주지에서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머니의 운명을 상당 부분 결정했다. 아들 사회학자는 낙산공원에 올라 채석장 터를 내려다보며 가난 때문에 배움을 포기했던 한 소녀, 전쟁 통에 모든 것을 잃고 우연히 만난 한 남자에게 운명을 걸어야 했던 열여덟 살 여성의 심정을 짐작해본다. 

이 책의 백미는 저자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 정착한 파주를 무대로 펼쳐지는 1950~70년대의 세상물정 풍경이다. 전후 미군 부대가 주둔했던 파주에는 달러를 벌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뿌리 뽑힌 인생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았다. 두 미군 부대를 잇는 삼거리에 사진관을 열어 달러를 쓸어 담은 아버지는 그 돈으로 미군의 유흥 공간인 ‘레인보우 클럽’을 열었고, 어머니는 그 바로 옆에서 양공주들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미장원을 운영했다. 클럽과 미장원을 무대로 미군과 양공주, 하우스보이, 이런저런 ‘스토어’를 열고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뒤엉켜 전후 달러 경제를 형성했다. 삼거리 사람들은 이렇게 모은 달러로 하나둘씩 가정을 이루고 중산층의 삶을 꿈꿨다. 미군 부대가 철수하고 그 자리에 한국군이 들어오면서 파주는 한국군의 배후 마을로 변신한다. 레인보우 클럽과 미장원도 군인과 면회객을 상대하는 무지개 홀과 무지개 다방으로 모습을 바꾼다. 파주라는 공간의 이런 변모와 그 속에서 보여준 개인들의 선택은 체면보다 생존이 중요했던 전후 한국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다. 저자는 자신의 고향이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퇴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한 사람의 삶이 공간과 상호작용하며 빚어내는 역동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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