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세계] 법학자에서 전향한 예술가들 ②
[예술 세계] 법학자에서 전향한 예술가들 ②
  • 오재학 전 주호치민 총영사
  • 승인 2024.03.26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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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과 예술은 공통점이 있다


법률 공부를 하고 화가로 전향한 예술가들

(C)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 독일 : 1945~)

1945년 2차 세계대전 막바지 시점에 독일에서 출생한 화가, 조각가로서, 1970년대 개념미술가 보이스(Joseph Beuys), 드레어(Peter Dreher), 안테스(Horst Antes)와 함께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지푸라기와 점토, 납, 도료 등을 사용해 임파스토(impasto : 물감을 두껍게 칠해 질감과 입체감을 표현하는 기법) 그림을 그렸습니다.

루마니아 시인 파울 첼란(Paul Celan)의 여러 시 구절은 ‘카발라(Kabbala : 유대교 신비주의 사상)’라는 신학적 개념과 함께, 키퍼가 독일 역사와 홀로코스트(holocaust : 유대인 대학살)의 공포라는 주제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언했습니다. 1945년 출생한 키퍼는 오터스도르프(Otersdorf)로 이주, 라슈타트(Rastatt) 문법학교에서 수학했고 1966년 법률학과 로망스어를 전공하던 프라이부르크(Freiburg) 대학을 떠나, 칼스루헤(Karlsruhe), 뒤셀도르프(Dusseldorf) 미술대학에서 공부합니다. 

초기에는 안마사로서 나치 경례를 흉내내기도 했는데 이를 통해 제3제국의 광기 어린 외국인(유대인) 혐오를 표현코자 했습니다. 그는 1990년대까지 독일의 역사, 문학, 미술, 철학, 지형학, 건축, 미학 등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1969년 칼스루헤 학생으로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를 여행, ‘정복(Occ-upation)’이라는 사진자화상 시리즈도 발표합니다. 1970년 뒤셀도르프에서 보이스(Beuys) 후견 아래 공부하면서 그의 화풍은 바젤리츠(Georg Baselitz)와 유사한 것으로 변모,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 계열에 속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유럽 전역과 미국, 중동 지역을 여행하며 조각, 수채화, 사진, 목판화 및 책자 출판에도 관여합니다. 1980년대는 민족적 정체성과 집단적 기억을 융합, 오컬트(occult : 신비주의), 상징주의, 신학 등을 주제로 다뤘습니다. 

1990년 볼프(Wolf) 상을 수상하고, 1999년 일본예술연맹은 제국최고상(Praemium Imperiale)을 키퍼에게 수여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시인 릴케로부터 영감을 얻어, 가을(Herbst), 가을날(Herbstag), 가을의 마지막(Ende des Herbstes)이라는 연작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1992년 이후 프랑스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잿빛꽃, 당신의 황금머리, 오시리스와 이시스(Osiris and Isis), 겨울풍경, 무거운 구름, 가을, 양귀비와 기억, 1000 송이 꽃, 성 에스타키오(Saint Eustace) 등이 있습니다. 

앙리 마티스의 레드 스튜디오
앙리 마티스의 레드 스튜디오

인상파의 아버지 마네

(D)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 프랑스 : 1832~1883)

인상파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네는 1832년 외교관의 딸인 어머니와 법관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1845년 롤랭(Rollin) 기술학교에 입학해 미래 예술부 장관인 프루스트(Proust)를 만납니다.부친 뜻대로 법과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고 1848년에는 프랑스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했습니다.

6개월간 견습 항해 경험도 했으나 곧 포기하고 1850~56년까지 쿠튀르(Thomas Couture) 문하에서 그림공부를 합니다. 인상파 화가 모리조(Berthe Morisot), 문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졸라(Emile Zola) 등과 친교하며 대담한 붓놀림과 파격적인 구성, 학문적 경계타파의 선구자가 됩니다. 

1853~56년 독일과 이탈리아, 네덜란드를 여행한 후 할스(Fran's Hals), 벨라스케스(Diego Velasquez), 고야(Francisco de Goya)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1858~59년 당시 사실주의 화풍에 따라 현실적인 주제들, 거지, 기수, 짚시, 카페, 소싸움 등을 즐겨 그립니다.

그러나 곧 기존 화단의 신화, 성경 인물 그림을 뒤엎고 또한 물감을 덧칠하던 기존방식을 벗어나 즉흥적으로 색칠을 했습니다. 소위 단번에 색칠을 해버리는 ‘알라 프리마(alla prima)’ 기법을 사용합니다. 그야말로 생동하는 작품이 탄생합니다. 마네를 통해 사실주의(Realism)화풍이 쇠퇴하고 인상주의(Impressionism)기운이 싹트게 됩니다. 

1863년 낙선전(Salon des refuses)에 ‘풀밭 위의 점심식사(Dejeuner sur l'herbes)’가 전시되자 아방 가르드(avant-garde) 회화의 선두주자로 등극하게 되고 그의 주변에 젊은 화가들이 운집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상주의 화파의 시발점이 됩니다. 1867년 막시밀리안(Maximilian) 황제의 죽음을 그려, 프랑스 나폴레옹(Napoleon)3세를 비난해 물의를 빚기도 했습니다.

이후 모네(Claude Monet)와 르느와르(Auguste Renoir), 드가(Edgar Degas)등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피리부는 소년, 올렝피아(Olgmpia), 카페 콩세르(Cafe concert), 폴리베르제르의 술집(Bar at Folies-Bergeres), 에밀 졸라 초상, 발코니(balcony) 등이 있습니다.

(E)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 프랑스 : 1869~1954)

1869년 북프랑스에서 출생해 법학을 전공하고 법률회사에 취직도 했습니다. 맹장수술 후 요양을 하는 동안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학계를 떠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마티스는 샤갈(Marc Chagall), 보나르(Pierre Bonnard), 고흐(Vincent van Gogh) 등과 함께 ‘색채의 마술사(magician of colour)’로 불립니다.

1891년 아카데미 쥘리엥(Academie Julien)에서 부그로(William Bouguereau)의 지도를 받았으나 곧 상징주의 화가 모로(Gustave Moreau)의 눈에 띄어 그의 영향을 받습니다. 1893년 세잔(Paul Cezanne), 고흐(van Gogh), 고갱(Paul Gauguin) 등 후기인상파의 문하생이 됩니다. 이 시기에 런던으로 여행, 터너(William Turner)의 그림을 배웠으며, 일본판화 우끼요에(ukiyo-e) 공부에도 열중했습니다. 

1900년 이후에는 세잔 화풍을 따라 어두운 색조와 구성적인 형태 묘사로 전향했으나 1904년 시냑(Paul Signac), 크로스(Edmont Cross)와 함께 셍 트로페(Saint Trophez)에 체류하면서 신인상주의(Neo-impressio nism) 화풍에 합류하여 점묘법(Pointillism)에 따른 그림을 그립니다. 1901년 드랭(Andre Derain), 블라멩크(Maurice de Blaminck)와 함께 야수파(Fauvism)에 가담해 20세기 회화에 일대 변혁을 가져 옵니다. 1908년에는 강렬한 색채 효과를 억제해 피카소(Pablo Picasso)가 전개한 입체주의(Cubism)로 기울게 됩니다. 

피카소는, "마티스의 뱃속에는 태양이 들어 있다"라고 하면서 마티스의 탁월한 색채 감각을 극찬합니다. 1901년 뮌헨의 오리엔트 미술전과 1911, 1913년 두 번에 걸친 모로코(Morocco) 여행 이후 아라베스크 꽃무늬를 배경으로 하여, 평면 구성이나 순수 색채의 병치로 독특한 화풍을 개척합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주로 니스(Nice)에 머물면서 타히티섬을 여행합니다.

그는 자연과 동물을 무척 사랑했는데, 3마리의 고양이(Cousi / 쿠시. Minouche / 미누슈. La puce / 라퓌스)와 함께 비둘기도 키웠습니다. 1948년 이후에는 성당 벽화 및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도 병행했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왕의 슬픔, 모자쓴 여인, 이카루스(Icarus), 춤, 음악, 룩셈부르크 정원, 서치·고요·쾌락(luxe.calme.volupte), 푸른 누드, 꼴리우르(Collioure) 풍경, 삶의 기쁨 등이 있습니다. 

세잔의 커튼, 물 주전자, 과일이 있는 정물
세잔의 커튼, 물 주전자, 과일이 있는 정물

(F)폴 세잔(Paul Cezanne / 프랑스 : 1839~1906)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은 1839년 남프랑스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에서 부유한 은행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52년 부르봉 학교(College Bourbon)에 입학해 졸라(Emile Zola), 바이유(Baptistin Baille)와 만났는데, 이들 3명은 ‘분리될 수 없는 3인방(Les trois inseparables)’으로 불렸습니다. 1858~1861년 부친의 기대에 따라 엑스대학(University of Aix)에서 법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1861년 법학 공부를 포기하고 파리로 이주해 피사로(Camille Pissarro)를 만납니다.

두 사람은 스위스 아카데미(Acade-mie Suisse)에 다녔는데 그들은 이후 10년간 루브시엔느(Louve-ciennes), 퐁트와즈(Pontoise)에서 함께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그는 그림을 통해 오래 지속되는 인상(impression)을 만들고 싶다 했고, 또한 푸생(Nicolas Poussin)의 ‘자연 이후(after nature)’를 재구성하고 싶다는 열망을 표출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낭만주의(French romanticism)와 초기 사실주의(Early realism)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세잔은 자연을 원기둥, 구(공), 원뿔로 단순화시키면서 새로운 심미안적 관점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에 집중하면서 ‘목욕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구도 병행하였습니다. 인물화 모델이 부족해지자 아내, 아들, 주변 이웃, 미술 경매상 등을 주인공으로 활용했고 그의 정물화는 사과를 주요 모티브로 사용했습니다. 세잔은 "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정복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사과 그림으로 파리 그림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는데 그는 평생 110점에 이르는 사과 그림을 그렸습니다. 상징주의 화가이며 비평가인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는 인류역사상 3개의 중요한 사과가 존재했음을 갈파했습니다. 

첫째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이브(Eve)의 사과이고, 둘째는 과학자 뉴튼(Newton)의 사과이며, 세 번째가 세잔(Cezanne)의 사과라고 했습니다. 어떤 화가는 여기에 스티브 잡스의 4번째 사과(Apple의 상표)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드니는 이어, "평범한 사과는 먹고 싶은 충동을 자아내지만, 세잔의 사과는 우리 마음에 말을 걸어온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세잔의 주요 작품으로는, 초록 사과, 붉은 조끼의 소년, 사과 바구니 정물화, 사과와 오렌지, 생트 빅트와르 산, 빨간 사과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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