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세계] 초현실주의(Surrealism)화가들의 생애 
[예술세계] 초현실주의(Surrealism)화가들의 생애 
  • 오재학 전 주호치민 총영사
  • 승인 2024.01.19 1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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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현실을 피해 무의식과 꿈의 세계를 그리다

"Dada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당신의 희망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의 낙원처럼, 예술처럼, 종교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피카비아(Francis Picabia)의 시 구절은 다다이즘(Dadaism) 특유의 허무주의를 보여 줍니다. 다다이즘은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일어나 1924년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반이성·반도덕·반예술을 표방한 예술사조이자, 실존주의·반문명·반전통적 허무주의 예술운동으로, 기존의 모든 가치나 질서를 철저히 부정했습니다.

1920~1930년 사이 프랑스 파리에서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1차 세계대전 중 정신병원에서 근무하던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은 포탄 충격의 희생자들을 돌보던 중 참혹한 현실을 피해 환상으로 도피하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환상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에 이르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고 이것이 초현실주의 태동의 기폭제가 됩니다.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이 남긴 폐허 위에서 다시 소생하려는 열망에서 탄생합니다. 본래 초현실주의(Surrealism)은 아폴리네르(Guillaume Appolinaire)가 사용한 말이었으나 그가 예술적 개념을 부여하지 못하였고 브르통이 초현실을 ‘꿈과 현실’이라는 모순된 2개의 상태가 중첩된 절대적 현상으로 규정하면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조르조 데 키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수'
조르조 데 키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수'

초현실주의 선언한 브르통 ‘무의식과 꿈’의 세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Manifeste du surrealisme)을 발표한 브르통은 ‘무의식과 꿈’의 세계와 교류하며 그 속에서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이것을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라 규정하였습니다. 이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의 ‘운하임리히(unheimlich)’와도 일맥상통하고 영어로는 ‘uncanny(기이함· 두렵고 낯설음)’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브르통은 선언문에서 “이성이 작용하는 모든 제재로부터 벗어나 아무런 미적, 도덕적 규율의 준수에 대한 우려 없이” 실제적 사고를 그대로 표출할 것을 역설했습니다. 

꿈과 무의식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필연보다는 우연을 정상적 상태보다는 광적인 증상을 표현합니다. 이를 위해 기존 서양회화를 지배하던 원근법, 투시법 등 사실적,입체적,전통적 표현방식을 완전히 부정합니다.

이성과 감성의 대화, 현실과 꿈의 교감, 순수한 직관과 과학적 기하학의 교감, 대지와 우주의 교감이 강조됩니다. 1925년에는 파리의 피에르 갤러리(Gallery Pierre)에서 초현실주의 합동전시회가 열리게 되어 레이(Man Ray), 마그리트(Rene Magr-itte), 에른스트(Max Ernst), 키리코(Giorgio de Chirico), 미로(Joan Miro), 마송(Andre Masson) 등이 참여합니다.

1929년에는 브르통이 제2차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 정치,사회적 혁명으로 발전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삶과 죽음, 실제와 상상, 과거와 미래, 이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낮은 것과 높은 것이 더 이상 모순으로 느껴지지 않는 정신의 특별한 순간을 강조했습니다. 잠재의식과 무의식, 환상, 꿈, 악몽, 광기, 비정상이 다시 전면에 등장하였습니다. 

초현실주의 화풍을 거론할 때마다 빠짐없이 언급되는 ‘초현실(Sur-real)’의 속성이나 본질, 성향을 대변하는 8개의 형용사들이 있습니다.

absurd(불합리한, 모순적인), bizarre (기괴한, 이상한), eerie(무시무시한, 오싹한), fanciful(공상적인, 기상천외한), fantastic(환상적인, 엄청난), ludicrous(어이없는, 우스꽝스런), monstrous(괴물같은, 기형적인), odd(기묘한, 이상야릇한)와 같은 단어들입니다. 여기에 irrational(비합리적인, .비이성적인), magic(신비한, 마법같은), metaphysical(형이상학적인, 추상적인), strange(낯설은, 색다른), unusual(진귀한, 유별난) 등의 어휘를 추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초현실주의 그림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닙니다. 

(a) 꿈과 상징적 현실 결합(dreams/symbols)
- 현실왜곡·꿈과 현실간 경계 소멸

(b) 불합리한 조합(bizarre assem-blage)
     - 비일상적 물건, 생물체, 상황이 혼재

(c) 자동기술과 무의식(automatism /subconsciou-sness)
     -  의도치 않은 내면의 아이디어, 이미지 표현

(d) 정신분석적 표현(random effects)
     - 꿈의 해석, 무의식

(e) 비극적, 공격적 사실 왜곡(distortion/biomorphic shapes)
     - 불편한 진실, 무섭고 낯선 이미지, 생체 표현

(f) 다의성, 해석의 다양성(multiformity/diversity)
     - 다양한 해석, 다중적 형태

이러한 다양한 초현실주의 화풍을 직접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주요 미술기법은 아래와 같습니다. 

(a) Automatism(자동기술법)
     - 손에서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 움직임과 형태를 표현. 에른스트, 마송, 미로 등이 많이 사용함

(b) Frottage/grattage(프로타쥬/그라타쥬:문지르기,긁기)
     - 에른스트가 주로 사용한 기법으로 마룻바닥 문지르기, 긁기, 나무파편/나뭇잎에 종이를 대고 연필 등으로 긁기
     - 인간의 머리.괴물.바다풍경 그림에 활용

(c) Decalcomanie(데칼코마니:전사법)
     - 도기·유리기구에 그림을 그려 옮겨서 염색하는 기법. 미끄러운 종이에 물감을 칠하고 접었다가 다시 펴서 무늬를 생성. 1935년 도밍게스가 처음 도입함

(d) Depaysement(데페이즈망:전위, 전치)
     - 물체를 본래 위치에서 떼어내 낯선 곳으로 이동시킴. 낯익은 물체를 뜻하지 않은 곳에 놓음으로 잠재적 무의식 세계 표현
     - 마그리트(Rene Magritte)가 주로 사용함

(e) Rayogram(레이요그램)
     - 카메라를 사용치 않고 직접 감광재료 위에 물체를 얹어 거기서 얻어지는 명암 속에서 추상적 사진 촬영
     - 레이(Man Ray)가 주로 사용함

(f) Collage(콜라쥬:떼어붙이기)
     - 인쇄물, 천조각, 쇠붙이, 나무조각, 모래, 나뭇잎 등을 화면에 직접 붙여 구성
     - 비유적, 연상적, 상징적 효과를 창출

(g) Objet(오브제)
     - 예술과 무관한 물건 부분을 본래 용도에서 떼어내, 잠재적 욕망이나 환상을 불러 일으키는 상징적 용도로 활용. 발견된 오브제, 환영 오브제, 몽상적 오브제, 존재적 오브제 등이 있음 

막스 에른스트의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막스 에른스트의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초현실주의는 반이성·반도덕·반예술을 내걸고 출범

반이성·반도덕·반예술의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초현실주의는 여러 계보를 만들어 냈는데, 가장 선구자적으로 영향을 끼친 인물은 형이상학주의를 표방한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였습니다.

초기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모로(Gustave Moreau), 뵈클린(Arnold Bocklin)의 상징주의, 르동(Odilon Redon)의 은둔주의 등을 필두로,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보스(Hieronymus Bosch)등의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통해서도 영감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1917년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가 피카소(Pablo Picasso), 콕토(Jean Cocteau), 사티(Eric Satie)와 함께 작업한 발레 퍼레이드 프로그램 노트에 처음 사용했던 ‘초현실주의(Surrealism)’라는 용어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초현실주의 창립에 참여한 예술가들이 늘어나면서 1920~1930년대 화풍을 주도합니다. 엘뤼아르(Paul Eluard), 아르프(Jean Arp), 탕기(Yves Tanguy), 클레벨(Rene Clevel),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차라(Tristan Tzara), 브르통(Andre Breton), 달리(Salvador Dali), 에른스트(Max Ernst), 레이(Man Ray)를 위시하여, 마그리트(Rene Magritte), 마송(Andre Masson), 델보(Paul Delvaux), 미로(Joan Miro), 쟈코메티(Alberto Giacometti), 뒤샹(Marcel Duchamp) 등이 참여하게 됩니다. 

피카소, 샤갈, 칼로 등 3명도 넓은 범위에서 초현실주의 화파로 분류되지만 이들은 실제로 초현실주의에 기초한 활동이 상대적으로 미미하였습니다. 초현실주의 대표화가들의 삶과 그림을 조망해 봅니다. 

(A)조르지오 키리코(Giorgio de Chirico:1888~1978)

초현실주의 대부로 불리는 키리코는 그리스 볼로스(Volos)에서 이탈리아계 부모로부터 출생한 형이상학주의 회화(metaphysical painting)의 선구자로서, 탑(tower)과 상가(arcade)·마네킹, 텅빈 건물 등을 주로 그렸는데, 어딘가 음침하고 우울하며 몽환적 분위기를 지녔습니다.

1900~1905년 아테네로 이주해 뵈클린(Arnold Bocklin), 클링거(Max Klinger) 등 상징주의 화가로부터 그림을 배웠습니다. 1906~1909년간 피렌체, 밀라노, 뮌헨 등을 거쳤고, 1911년 토리노를 거쳐 파리로 이주하여 활동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1915년 이탈리아 육군에 입대해 페라라에 주둔하였고 곧바로 정신질환으로 인해 군병원으로 후송됐습니다. 키리코는 평생 신경이상증세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증후군(Alice in wonderland syndrome:두통·환각증세)’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철학자 쇼펜하우어, 니체 등과 함께 르네상스, 바로크(baroque), 독일 낭만주의 화풍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917년에는 이탈리아 화가 카라(Carlo Carra)와 함께 형이상학주의 화파(scuola metafisica)를 공식 출범시켰고 1924년 파리에서 초현실주의 그룹에 합류했습니다. 1929년에는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발레단의 무대디자인을 맡기도 했습니다. 

1928~1944년간 이탈리아와 미국, 캐나다, 일본 등에서 초현실주의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1940년대는 이태리로 귀환해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가을오후의 수수께끼, 몽빠르나스 역, 이탈리아 광장, 무한의 향수, 철학자의 정복, 사랑의 노래, 붉은 탑,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등이 있습니다. 

(B) 막스 에른스트(Max Ernst/독일:1891~1976)

독일 쾰른(Koln)에서 출생해 전문적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화가, 조각가 겸 시인으로 무의식적 상상, 꿈의 세계, 비현실적 살체를 그린 초현실주의 대표화가입니다. 특히 1908~1914년 본(Bonn)대학에서 문학·철학·심리학·예술사를 전공했는데 특히 철학 공부를 열심히 하여 ‘철학파 화가’라 불렸습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와 니체의 철학이론에 심취했습니다. 

1919년 아르프(Jean Arp)와 함께 쾰른 다다이즘을 창립하기도 하고 정신병 요양소에 근무하던 중 정신의학 대신 환상적, 초현실적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그림은 창안되고 발견되고 시현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924년 초현실주의에 가담하면서 조형주의, 구성주의를 기초로 현실적 이미지와 추상적 형태를 융합한 신비롭고 환상적인 그림을 주로 그렸고 특히 프로타쥬(frottage/영어로 rubbing:문지르기), 그라타쥬(grattage/영어로 scraping:긁기) 화법의 대가였습니다. 

에른스트는 무엇보다 피카소처럼 여성편력으로 유명했는데 4명의 배우자와 4명의 동거인이 있었습니다. 스트라우스(Luise Straus), 오런키(Marie Aurenche),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태닝(Dorothea Tanning) 등 4명의 배우자가 있었습니다. 또한 멕시코 여성해방 운동의 선구자였던 캐링턴(Leonora Carrington), 독일 초현실주의 화가였던 오펜하임(Meret Oppenheim), 아르헨티나 화가 피니(Leonor Fini), 달리(Dali Eluard)와도 동거한 바 있습니다.

에른스트는 독일, 프랑스, 미국을 오가며 전통적 인습의 벽을 허물고자 했던 아방 가르드(avant-garde)의 선도자로서 "여기 아직도 모든 것이 표류하고 있다(Here,everything is still floating)"라고 외치면서 현대 초현실주의 화풍 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도시의 전경, 비온 후 유럽, 셀레베스(Celebes)의 코끼리, 숲과 비둘기, 안티포프, 황야의 나폴레옹, 초현실주의의 승리 등이 있습니다. 

(C)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스페인: 1904~1989)

1904년 카탈루니아 지방 피게라스(Figueras)에서 출생해 1922년 마드리드로 이주해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는 바닷가재와 성게, 계란을 특히 좋아하는 식도락가였습니다. 고흐처럼 이미 죽은 형의 이름 살바도르(Salvador)를 씁니다.

프랑스 인상주의, 르네상스와 함께 입체주의 등 당시 아방 가르드(avant-garde) 화풍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1925년 바르셀로나에서 최초로 개인전을 열고 1926년 파리로 이주해 피카소를 만납니다. 그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화파인 라파엘로, 브론치노(Bronzino), 쥬르바란(Zurbaran), 베르메에르(Vermeer), 벨라스케스(Velasquez)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달리의 주제는 꿈, 잠재의식, 선정성등, 기이한 기질로 논란의 중심

1929년 초현실주의에 가담해 평생 동반자 갈라(Gala)를 만납니다. 스페인 내전중(1936~1939) 프랑스와 영국에 거주했고 1938년에는 샤넬(Coco Chanel) 초청으로 라 포사(La Pausa)를 방문합니다. 1940년에는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1946년에는 디즈니(Walt Disney)사의 데스티노(Destino)라는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도 참여합니다. 

1948년 스페인으로 귀환해 ‘핵신비주의(nuclear mysticism)’에 심취, 고전주의(classicism), 신비주의(mysticism), 과학발전(scientific development)을 융합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의 주제는 꿈(dreams), 잠재의식(subconsciousness), 선정성(sexuality), 종교, 과학 등 다양했으며, 그의 기이하고 괴퍅하고, 허세 부리는 행적으로 많은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는 환각(hallucination), 착각과 대망상(delusion/illusion)기법을 주로 사용하여 ‘편집광적·비판적 화풍(paranoia-critical painting)’으로 평가받았고, 정체성(identity), 선정성(eroticism), 죽음(death), 부패타락(decay)을 주제로 한 그림을 즐겨 그렸습니다. Dali는 아래와 같은 기행으로도 유명했습니다. 

발작적으로 소리지르다 갑자기 웃기/ 염소똥 향수 입에 넣기/ 박쥐사체 입에 넣기/ 죽은 어머니 초상화에 침뱉기/ 여자아이 높은 곳에서 밀치기/ 개미핥기 기르기/ 
주요 작품으로는 기억의 지속(persistence of memory), 바닷가재 전화기(lobster telephone), 나르시수스의 변형(metamorphosis of Narcissus),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환각의 투우사, 불타는 기린, 안달루시아의 개가 있습니다. 

(D)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벨기에:1898~1967)

1898년 벨기에 레신느(Lessines)에서 출생해 어린 시절 정신질환을 겪던 어머니가 강물에 투신자살하는 큰 불행으로 평생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됩니다. 광고회사 를 다니다가 우연히 그리스 출신 이탈리아 화가 키리코(Giorgio de Chirico)의 작품 ‘사랑의 노래’를 보고 감탄해 화가의 길로 들어섭니다. 1916~1918년 브뤼셀 왕립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1920년대 중반까지 미래주의와 입체주의에 심취했습니다. 1927년 파리로 이주해 초현실주의에 합류합니다. 

여기서 메칭저(Jean Metzinger), 레제(Fernand Leger)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1936년부터 고립된 물체로부터 불가사의한 힘을 이끌어내는 독특한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고 언어와 이미지를 애매한 관계로 뒤틀어 연결시키는 방법을 즐겨 썼습니다.

낯익은 물체를 뜻하지 않은 곳에 배치하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기법을 활용했는데 무생물을 생명 있는 미술로 도치하기도 하고 사과 시리즈, 돌 시리즈, 구름 시리즈, 새 시리즈처럼 주제별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새, 나무, 구름, 사과, 모자쓴 남자, 플라스틱 공을 반복해서 사용하기를 즐겼습니다. 마그리트의 데페이즈망 기법은 크게 6가지로 분류됩니다. 

- 작은 것을 확대/ 보완적 사물조합/ 미지의 사물을 붙여넣기/ 생명체를 사물화하기/ 무생물에 생명 불어넣기/ 해부학적 변형 

1950년대는 인상주의 화가 르느와르의 영향을 받은 작품과 함께 ‘바슈(vache)’시기의 야수파(fauvism) 그림을 모방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신비한 분위기와 고정관념을 깨는 소재와 구조, 발상의 전환 둥을 통해 모든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마그리트의 화풍은 후일 팝 아트(Pop art), 그래픽 디자인(graphic design), 미니멀리즘(minimalism), 개념미술(conceptual art)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표 작품으로는 빛의 제국, 과대망상증, 골콩드(Golconde), 천리안, 결혼한 성직자, 데칼코마니, 우편엽서, 피레네의 성, 잘못된 거울, 사람의 아들 등이 있습니다. 

(E) 호안 미로(Joan Miro/스페인: 1893~1983)

1898년 바르셀로나에서 출생해 많은 스페인 출신 화가들이 인간의 고뇌와 비극과 쓸쓸함, 어두운 부분을 주제로 삼았으나 미로는 인생을 동심과 유아적 관점에서 즐겁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그림은 ‘추상적인 자연주의(naturalism with abstraction)’라 불렸고, 다다이즘, 클레(Paul Klee)의 표현주의, 화란의 사실주의,  야수주의(fauvism), 입체주의(cubism)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지와 하늘의 균형(balance between Earth and Sky)"을 표방해 사실(reality)과 꿈(dream)의 균형을 추구하였고, 풍부한 공상과 강렬한 형상, 미래지향적 암시, 밝은 너털웃음이 특징이었습니다. 

또한 조각에도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1924년 파리에서 초현실주의 일원이 되었고,오브제(objet), 꼴라쥬(collage), 자동기술법(automatism)이 주요 표현기법이었습니다. 그는 1907~1910년 바르셀로나 상업학교, 1912년에는 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는데 그의  어머니와 피카소의 어머니는 서로 친구였습니다. 

1915~1919년 바르셀로나, 마요르카(Majorca)에서 풍경화와 초상화, 누드화를 그렸습니다. 1919년 파리로 이주해 본격적으로 초현실주의 화가로 등장하였는데,이 때 피카소, 마송(Andre Masson), 차라(Tristan Tzara)등을 만났고 생체적(biometric), 기하학적(geometric)표현에 몰두했습니다.

수학적, 자연적(돌, 나무뿌리, 깃털), 자연재해(불탄 것, 부서진 것)오브제(objet) 등을 주요 소재로 삼았습니다.특별히 어린이들의 천진한 작품과 카탈로니아 민속예술, 무의식 세계에 심취했습니다. 1925년경에는 다다이즘과 표현주의 영향을, 1928년 네덜란드 방문 후에는 17세기 화란 그림 영향도 받았습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 시 프랑스 바랑쥬빌(Varengeville)로 피신하여 활동했고 1942년에는 마요르카에서 활동하고 1944년경에는 세라믹(ceramic) 작업도 병행하였습니다. 1948년부터 스페인과 파리를 오가며 작품활동을 했는데 여성과 새, 별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사냥꾼, 여류시인,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 세상의 탄생, 달팽이/여자/꽃/별.스페인 댄서, 여성/달/새.어릿광대 사육제, 카탈로니아 풍경 등이 있습니다. 

(F) 알베르토 쟈코메티(Alberto Giacometti/스위스: 1901~1966)

이탈리아 혈통으로 스위스 보르고노보(Borgonovo)에서 신인상주의 화가 지오반니 쟈코메티(Giovanni Giacometti)의 장남으로 출생한 조각가이며 화가였습니다.

제네바(Gene-va)예술학교를 졸업한 후 1922년 파리로 가서 로댕의 조수 부르델(Bourdel) 밑에서 미술수업을 받았고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접하게 됩니다. 여동생부터 가까운 친지들의 연쇄적인 죽음을 목격한 쟈코메티는 ‘죽음’이라는 화두를 안고 미로, 에른스트, 피카소 등과 함께 공부했으며 '얇고 길고 가느다란' 조각에 심취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세잔(Paul Cezanne)을 매우 존경해 그를 따라 대상에 대한 철저한 관찰과 모방을 습득하였고, 철학에도 심취하여 브르통(Andre Breton),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보봐르(Simone de Beauvoir) 등과도 친교를 맺었고, 부조리 작가 베케트(Samuel Beckett)와도 가까워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작품도 제작했습니다.

그는 길고 앙상한 인체를 빌려, 극한에 놓인 인간의 고독한 실존과 인생의 허무, 존재의 덧없음을 표현했습니다. 1934년에는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고 1955년에는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1965년에는 런던서 전시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사이렌의 노래'
르네 마그리트의 '사이렌의 노래'

쟈코베티는 1, 2차 세계대전 경험하며 삶과 죽음의 철학적 탐구에 몰두

인류 역사상 가장 첨예한 실존적 사건이었던 1차,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 인간 본질에 대한 사색과 질문이 유행하던 토양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탐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전쟁 속에서 인간의 불안과 소외, 고독, 공포, 고통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으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나는 걸어야만 한다. 숭고한 인간이든 고독한 인간이든 모두 걷는다. 이 세상에 내던져진 이상 누구나 걷고 또 걸을 수 밖에 없다. 종착점이 어떤 풍경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그곳으로 가야 한다." 

주요 작품으로는 걸어가는 사람, 4시의 궁전, 보이지 않는 사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람, 로타르(Lotar)좌상, 쓰러지는 남자, 베네치아 여인 등이 있습니다. 

(G)앙드레 마송(Andre Masson/프랑스: 1896~1987)

프랑스에서 출생해 11살에 브뤼셀아카데미에 입학, 자동기술법(auto-matism) 개념을 조형미술에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미로와 함께 초현실주의 그림에 참여했고,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솜므(Somme) 전투에서 가슴에 중상을 입어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아라공(Aragon) 등 초현실주의 문인과 교류했고 들라크루아(Delacroix), 드랭(Andre Derain), 엘 그레코(El Greco) 그리고 철학자 니체(Nietzs-che), 문인 랭보(Rimbaud) 등으로부터 예술적 감각과 영감을 얻었습니다. 1922년부터 미로, 에른스트 등과 친교를 맺고 1924년부터 초현실주의에 본격 참여했습니다. 

1928년 브르통과 결별하고 1929년부터는 즉흥적, 암시적, 상징적 그림을 그렸습니다. 1930년대는 ‘스페인 시대’를 맞아 투우(corridas) 그림을 많이 그렸고 스페인 내전을 겪은 후에는 프랑스로 귀환하여 활동했습니다.

1941년 미국으로 이주해 흑인과 인디언 신화에서 영감을 받았고 폴록(Jackson Pollock)의 추상표현주의, 스페인 자연주의, 프랑스 초현실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46년에는 프랑스로 귀환해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에서 활동했습니다. 1950년 ‘그리는 기쁨(Le plaisir  de peindre)’이라는 글에서 외부 세계를 보는 신선한 시각과 선험적 명상의 강도, 시대에 맞는 회화적 수단 등 3가지를 강조했습니다. 

그는 또한 동양의 서예와 선불교에도 관심을 보여 ‘타시즘(tachism)’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앤틸리스(Antilles), 톨레도(Toledo) 풍경, 지구(The Earth), 물고기의 싸움, 싸이렌, 어둠의 숲, 여자, 방랑자와 까마귀들 등이 있습니다. 

(H) 이브 탕기(Yves Tanguy/프랑스:1900~1955)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해 미국으로 귀화하였고 해군 장교인 부친을 따라 아프리카와 스페인, 남미를 항해하고 1922년 파리로 귀환했습니다. 키리코(Giorgio de Chirico)의 ‘아이의 두뇌’라는 작품에 감동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의 왜곡된 선과 원근법, 기형적 형태, 무의식에 대한 환상적 표현에 매료되었습니다.

1924년 파리에서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1927년 제1회 개인전을 열었는데 바다밑 형상과 화석(fossil), 생물 오브제(objet)를 통해 비현실적 회화공간을 창조했습니다. 자동기술법(automatism)을 활용해 몽환적이고 신비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고 생물학적 형태와 황량한 환영의 세계를 그렸습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파리에서 만난 이혼녀인 미국 화가 세이지(Kay Sage)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폐허화된 산업문명과 군국주의 형상, 비행기, 총기 그림을 그리면서 미국 아방 가르드(avant-garde)의 선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술의 매력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이 흥미롭고 머리 속에 뜬구름처럼 퍼져 있는 모호한 개념을 표현하는 방식이 나를 즐겁게 한다." 

초현실주의 창시자 브르통은 탕기가 초현실주의 개념에 가장 충실한 화가라고 극찬하였습니다. 1953년 로마, 밀라노, 파리 등에서 유럽 전시회를 개최하고 1955년 회고전을 앞두고 뇌졸중으로 돌연 사망합니다. 

이후 우울증과 백내장으로 고생했던 아내 세이지(Sage)도 1963년 가슴에 권총을 쏘아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 때의 신기루, 호(arcs)의 증식, 엄마,아빠가 다쳤어요, 시간의 가구, 건설과 파괴, 아침의 드레스, 검은 풍경, 연인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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