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팽배한 반중정서
북한에 팽배한 반중정서
  • 백요셉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8.05.11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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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 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 경제와 북한 사회는 급격한 몰락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한다.

김일성이 죽은 지 1년만인 1995년 7월 중순경부터 약 1개월간 무서운 대홍수가 북한 전역을 집어삼키면서 520만의 이재민이 발생한다.

1993년 3월 1차 북핵 위기로 인한 미국의 경제봉쇄와 함께 이 대규모 물난리는 북한 대아사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그 다음해부터 북한 땅에는 인간 생지옥이 연출됐다. 많은 인민들이 굶어죽었고 그 속에서 많은 인민들이 탈출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인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동요는 이웃나라 중국에 대한 막연한 공경으로도 표출되었다. 바로 중국식 개혁개방에 대한 미련이었다.

북한 인민들 속에서는 우리 공화국도 조만간 중국식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해 땅도 공장도 개인들에게 나눠준다는 소문이 파다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김정일은 냉정하고도 단호했다.

노동당은 전국의 세포조직들에 주민사상교양자료를 배포해 개혁개방에 대한 주민들의 환상과 미련을 사전에 차단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중국이 표방하고 있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는 전통적 사회주의를 버린 수정주의이며 자본주의에 대한 굴복이다. 우리 공화국은 그 어떤 자본주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식 사회주의제도를 더욱 굳건히 지켜나갈 것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한 환상은 반사회주의적인 범죄행위이다’

그렇게 공화국의 전역에는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라는 당의 선전 구호가 도배된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에 대한 정면 도전인 셈이다.

김정일 정권은 중국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했다. 노동당은 내부적으로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을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이라고 주민들을 끊임없이 세뇌시켰다.

기자가 살았던 평안북도 신의주시는 사회주의를 배신하고 하루가 다르게 화려해져가는 자본주의 중국과 압록강을 사이에 둔 공화국의 제2의 판문점이 돼버렸다.

“신의주를 통째로 폭파하라우”

당시 김정일은 개혁개방으로 급성장하는 중국으로부터 자본주의 황색 날라리 문화가 공화국을 어지럽히는 것에 대해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중국 발 자본주의 황색문화는 1400km에 달하는 북·중 국경을 통해 공화국으로 홍수처럼 쓸어들었다.

중국 료녕성 단동시 압록강의 북중철교 너머로 보이는 북한 평안북도 신의주시 풍경
중국 료녕성 단동시 압록강의 북중철교 너머로 보이는 북한 평안북도 신의주시 풍경

중국 발 자본주의 문화의 대표적 흡입구가 바로 신의주시였다. 항간에서는 김정일이 술에 취해 ‘신의주를 통째로 폭파해 버리라’고 호통 쳤다는 소문으로 쉬쉬했고 당의 공식 사상교양자료에도 “판문점이 미제국주의자들과의 군사적 대결장이라면 신의주는 ‘제국주의자들과의 문화의 대결장’이다”는 김정일의 지적이 명시될 정도로 신의주는 사회주의를 고집하고 있는 공화국의 암 같은 곳이었다.

혁명 1세대인 모택동­김일성 간의 혈맹관계가 김정일 시대에 와서 많은 변화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1995년 신의주 대홍수 때 신의주 시민들의 반중감정이 격화되었던 일화가 있었다. 당시 중국 측 압록강 중상류 공업지대의 대규모 침수 피해를 우려해 중국 당국이 북한 측에 수풍댐과 그 아래의 군소 댐들의 방류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댐의 수문 개방으로 인해 중국보다 해발고가 현저히 낮은 평야에 위치한 신의주시가 막대한 홍수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그 극심한 홍수 피해의 이면에 중국에 대한 반감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북한 경제가 완전히 붕괴된 당시 상황에서 북한 주민들이 쓰고 사는 모든 생필품과 물건은 중국산이었다. 그래서 생긴 유행어가 ‘강택민은 조선의 경리과장’이라는 말이었다.

강택민(장쩌민)이 당시 중국의 총서기였고 ‘경리과장’이란 남한의 ‘후생담당자’에 해당하는 북한 행정조직 내 직위이다. 다시 말해 북한을 먹여 살리는 사람은 김정일이 아닌 강택민이라는 뜻이 되겠다.

강택민은 조선의 경리과장

북한의 공식 화폐 가치는 하루가 다르게 휴지조각으로 변해갔고 그 자리를 중국의 인민폐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달러의 공식 유통을 불허한 상황에서 인민비(인민폐의 북한식 표현)는 그냥 ‘비’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상인들은 서로 물건을 흥정할 때 “비 있어?”, “비 있어”로 소통했다. 중국 물품, 중국 화폐의 북한시장 점령(占領)과 북한 주민들의 반중 정서는 북한 사회에서 전혀 별개로 작용하고 있었다.

북한의 혹독한 경제 상황은 엉뚱하게도 강원도 시골 농촌지역에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서운함을 불러왔다. 바로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묘(墓)에 대한 북한 당국의 관리 소홀이었다.

북한군 1군단 주둔 지역인 동부전선 강원도 북측지역 제2전선 산골짜기마다 6·25 때 죽은 중국군 유해가 집단 매장된 커다란 합장묘가 많았다.

경제난이 심각해지자 북한 농촌의 협동농장들이 가동을 멈추기 시작했고 농민들은 아침이면 협동농장으로가 아니라 곡괭이와 삽을 메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농민들은 강원도 산골짜기 마다 불을 놓고 풀과 나무를 제거하고 화전농을 일구기 시작했다. 굶주린 공화국의 농민들은 커다란 언덕 같은 중국군 묘지 위에도 고랑과 이랑을 만들고 콩과 옥수수를 심었다.

그렇게 공화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중국 지원군의 유해 위에서는 금잔디 대신 북한 농민들의 굶주림을 달래 줄 옥수수와 콩이 자랐다.

북한 농민들의 무차별 개간으로 어떤 중국군 묘지에서는 유골이 밖으로 노출되고 그 노출된 해골바가지를 마을의 철부지 어린 애들이 긴 장대에 매달고 놀았던 풍경도 눈에 선하다.

중국당국은 전쟁 기념일 때마다 군사대표단을 북한에 파견해 자국군의 묘지를 방문, 화환을 놓고 가곤 했는데 북한 농민들에 의해 마구 훼손된 자국군의 묘지를 보고 중국 당국이 북한 측에 항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중국 당국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조국을 지켜주기 위해 고국을 떠나 수천리 밖 타향에서 전사한 고마운 우방국의 군인들에 대한 북한의 무례함이 당연히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심화로 인해 북·중간 경제적 격차도 심해졌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단동은 그야말로 불야성이었고 북한 신의주는 멸망한 도시인양 캄캄하고 적막했다.

신의주시민들은 압록강변에 나와 강 건너 중국 단동시의 화려한 고층 건물 네온 장식 등과 강위에 떠 있는 유람선을 역관광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북한 신의주와 중국 단동을 잇는 압록강의 북중철교

하지만 날로 발전하고 있는 강 건너 중국을 보는 북한 주민들의 마음 속에는 부러움과 함께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한 민족적 증오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 증오는 압록강 위에서 유람선을 타고 북한 쪽에 바싹 접근해 사진을 마구 찍어대고 음식을 던지며 시시덕거리는 중국 관광객에 대한 분노로 표출됐다.

배은망덕한 조선

북한의 국경경비대 군인들과 초췌한 북한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바짝 다가오는 중국 유람선에 돌을 마구 던져대기 시작했고 그러한 북한인들의 모습은 외부 세계에 미개한 아프리카 원시부족의 느낌을 줬다.

북·중 국경지대는 ‘북한’이라는 신기한 ‘원숭이 굴’을 구경하기 위한 거대한 동물원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이는 가뜩이나 자존심이 강한 북한 주민들에게 중국에 대한 민족적 반감을 더 키웠다.

북한 주민들은 중국 유람선에서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각종 음식으로 인해 강한 모멸감을 가졌고 북한 내부에 거주하는 화교들과의 감정적 마찰로 번져갔다.

1990년대 이전에는 북한에서 별 볼일 없는 하찮은 계급이었던 화교들이 모국인 중국의 급부상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화교들은 어느새 신의주 시내에서 가장 잘 사는 부호로 거듭났고 북한의 정부 관료들이 그들과 유착하기 시작했다.

이는 굶주린 일반 주민들의 분노를 더 고조시켰다. 부패한 정부 관료들과 배급은 주지 않고 착취만 하는 정부에 대한 극도의 불만은 화교에 대한 민족적 분노로 더해졌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헐벗고 굶주려 신의주의 도움이 절실했던 강 건너 단동의 중국인들과 국내 화교들이었는데, ‘뙤놈’으로 불리며 더럽기로 유명해 멸시의 대상이었던 그 ‘과거의 거지’들이 어느 날 갑자기 당시 북한 현지 주민들도 구경하기 힘든 휴대폰을 들고 북한 고위관리도 타지 못하는 고급 승용차를 몰고 시내를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북한 주민들은 관대하게 보지 않았다.

극심한 전력난으로 온 시내가 암흑이었지만 화교들이 모여 사는 동네인 채하동쪽은 환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화교들의 집 앞을 지날 때면 높이 쳐진 튼튼한 담장 안에서 퉁퉁 거리는 엔진동음소리가 들려왔다. 자가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사돈이 땅 사도 배 아픈 민족’이라 했던가. 화교들은 사돈은 커녕 같은 민족조차 아니었다. 급작스러운 경제적 부(富)에 오만해진 화교들과 자기 땅에서 이방민족이 잘 사는 꼴을 보고 있어야 하는 굶주린 북한 주민들 사이에는 점차 증오와 배척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북한의 경제난이 절정을 찍고 있던 1999년경 화교 출신 주민과 북한 현지인 간의 불미스런 사건이 있었다. 비싼 옷을 입은 10대 화교 소년이 학교를 마치고 귀가하다가 시내 골목에서 북한 현지 출신 아이들로부터 폭행과 갈취를 당한다.

화교 부모는 분주소(경찰서)에 신고했고 안전원(경찰)은 문제의 아이들을 잡았다. 피해자 화교 부모는 잡힌 가해자 아이들에게 찾아와 화풀이를 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 화교 부모의 폭력이 도를 지나쳤고 그들과 금전적으로 엮여 있던 북한 안전원들은 그것을 방치했다고 한다.

그 후 그 화교 아이는 사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시 화교들과 북한 현지 주민들 간의 유사한 갈등이 여러 건 발생했다.

6.25때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절단된 북중철교

중국인들에 대한 북중 국경에 사는 북한 주민들의 원한은 대량탈북 시대를 맞아 특별한 형태로 발전했다.

대아사 초기 이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무턱대고 두만강을 넘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두만강에 뛰어든 사람들은 대개 남편을 대신해 가정의 생계를 책임진 북한의 주부들이었다.

하지만 국경 너머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조직폭력단과 인신매매였다. 중국의 급작스러운 산업화로 인해 동북 3성 농촌의 여자들이 산동성 이남의 해안가 개발도시들로 물밀듯이 빠져나갔다.

중국 동북지역에 이른바 ‘여자 대란’이 일어난 것이다. 바로 그 시기에 맞춰 수많은 북한 여성이 두만강에 몸을 실었고 그들은 중국 동북의 여자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되었다.

북한 여성들은 그야말로 아무런 방어 장치 없이 대량으로 포획당하는 물고기 신세였다. 성욕에 굶주린 대륙의 남성들에게 포획된 북한 여성들이 산동성 시골 마을과 내몽골의 초원과 흑룡강성의 밀림 속으로 속속 팔려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장가 못간 대륙 남자들의 씨받이로, 노래방의 도우미로, 성매매업소의 매춘부로 고달픈 타향살이를 하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되면 다시 북한으로 끌려가야 했다.

그 불쌍한 (北)조선의 여인들에게 21세기 중국은 여전히 500년 전의 명(明)과 청(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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