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보는 눈] 거룩한 전쟁과 거룩한 평화
[시대를 보는 눈] 거룩한 전쟁과 거룩한 평화
  • 이종윤 미래한국 상임고문, 한국기독교학술원 원장
  • 승인 2018.11.21 12: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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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심판과 구원의 주로서의 야훼 하나님은 구약에서는 전쟁용사(divine warrior)로서 계시된다. 이러한 야훼 이미지는 드보라의 노래(삿5), 미리암의 노래(출15)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전쟁의 용사”로서의 칭호 사이에서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신학자 중에 ‘뻔뻔스러운 민족주의적 자기 이익 추구’라는 망령이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 해도 그러나 전쟁 용사로서 하나님 이미지는 죄가 있는 세계에서 심판과 구원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싸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덕성을 여기서 논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 다.

즉 전쟁은 궁극적으로 악이지만 그러나 악한 세계에서 해방자 하나님이 억압자들과 피억압자들의 혼합체인 인간 사회와 불가피하게 만나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반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용사로서의 야훼 이미지는 이슬람의 지하드나 기독교의 십자군 전쟁 등을 정당화 해주는 오류로 떨어지거나 이용될 수 있다.
 

이종윤 미래한국 상임고문, 한국기독교학술원 원장
이종윤 미래한국 상임고문, 한국기독교학술원 원장

실제로 야훼 전쟁 이념은 왕조의 지배 이념과 침략 논리에 이용당하거나 지하드 이념과 십자군 전쟁 논리를 유발한 원인이 되기도 했고, 모세와 레위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한 자들을 숙청할 때 무차별 살육을 야훼의 명령으로 이해한 것은 그 실례가 된다.

사실 거룩한 전쟁(milhamah gedosah)이라는 용어 자체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출애굽 해방, 가나안 정착, 가나안 방어를 위한 전쟁은 이스라엘을 치는(패하는) 전쟁까지 포함해 “야훼 하나님이 싸우시는 야훼의 전쟁”을 통칭해 부른 용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사사기에 나오는 가나안의 도시국가 군주들을 정복한 전쟁, 아비멜렉의 전쟁, 입다의 전쟁 등은 거룩한 전쟁의 범주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거룩한 전쟁은 나팔을 불어 군대를 모음으로 시작하고 전쟁이 끝난 후 제대 명령이 내려짐으로 끝이 난다. 전쟁은 억압받는 자의 부르짖음에 의해 촉발되고, 전쟁 시작 전에는 참회와 탄식 의식, 즉 신에게 묻는 절차, 군대를 야훼의 백성이라 칭한 후 금욕과 맹세를 요구함으로써 야훼의 군대를 성별한다.

거룩한 전쟁은 신앙과 궁극적으로는 거룩한 평화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어 왕조시대와 그 이후 성경 역사에서 평화 추구의 사상으로 바뀌어 갔다. 다윗이 블레셋 거인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을 들고 내게 오지만, 나는 만군의 하나님 야훼의 이름으로 네게 간다. 야훼의 구원은 칼과 창에 있지 않고, 전쟁은 야훼의 일임을 회중이 알게 하겠다(삼상17)’하였다.

그 하나님께서 누구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해, 싸우시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의한 지배 이념과 배교와 싸우시고, 고난 받는 자를 방어하기 위해 싸우시므로 궁극적으로는 평화를 이룩하시려고 싸우신다 하겠다. 거룩한 전쟁 이념은 거룩한 평화를 얻으려 나아가는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거룩한 전쟁은 복음화 된 통일 조국 건설을 목표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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