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 - 개인과 공동체 이해의 일치
가난한 자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 - 개인과 공동체 이해의 일치
  • 조성봉 숭실대 교수
  • 승인 2018.11.23 10: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래한국 -월드뷰 공동기획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개인의 삶이 얼마나 공동체의 이해와 조화되느냐의 문제이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개인이 잘 되는 것이 공동체에도 좋다. 개인이 열심히 일해 돈을 많이 벌고 가족들을 잘 먹여 살리고, 훌륭한 인적 자원으로 성장시킬 수 있도록 교육시키고, 또 세금도 내는 것이 나라에도 당연히 좋은 것이다.

돈 많이 벌어 세금을 많이 내면 나라의 재정을 튼튼하게 하고 공동체 모두를 위한 SOC(사회간접자본)시설을 건설하거나 공무원들 월급도 주게 된다. 또한 자신의 노후도 스스로 책임지고 나아가서 피치 못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삶도 도와주게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이러한 이해의 일치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공동체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지만 자신이나 가족의 이해를 앞세우는 것은 공동체 이해와 종종 상반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구성원이 공동체의 감시 눈길을 피해 자신의 이해를 몰래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마치 공동체를 위하는 것처럼 행세하다가 보는 눈이 없으면 모두 자신들을 위해 공동체 이해를 희생하거나 도둑질하는 습관이 만연되어 있다.
 

사회주의의 모순 - 북한 주민들의 도덕성 이중성
 

정신과 의사인 민성길 전 연세대 통일연구원장은 탈북민의 정신적 상태에 대해 연구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북한은, 해리 트리안디스(Harry C. Triandis)가 집단주의의 특징이라고 말한 바, 자기 자신보다 집단의 관점, 필요 및 목표를 더 강조하고, 개인의 즐거움보다 집단에 의해 규정된 사회적 규범이나 의무를 더 강조하고, 집단과 구별되는 자신의 신념보다는 집단과 공유하는 신념을 더 강조하고, 집단 구성원들과의 협력과 조화를 강조하는 속성을 가진다는 집단성을 중시하는 문화의 특징을 보인다.

북한에서는 집단에 충성하기만 하면 의식주 모든 것이 주어지고 삶이 보장된다. 행복과 만족은 집단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도 사람 사는 사회이므로 결국 개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몰래 자신을 위한 경제활동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북한의 주민들에게 이중적인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되어 철저하게 적응적으로 바뀌게 된다. 민성길 전 원장(2001)은 북한 청소년들은 자신의 장래를 위해 부모가 당 간부나 유력자에게 뇌물을 준다는 것을 당연히 기대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이타심, 의리, 이상적 사회주의적 사상성, 국가사회에 대한 공헌을 중시하는 심성 등 청소년기적 순수한 품성은 점점 퇴색되고, 관습 수준의 도덕성 내지 도덕적 이중성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정육점 주인과 빵집 주인의 최선
 

시장경제에서는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에 대해 누구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시장의 제도적 의미를 제시한 사람이 바로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이다. 애덤 스미스는 1776년에 저술한 <국부론>을 통해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을 설명했다.

우리가 저녁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과 빵집 주인의 특별한 보살핌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정육점 주인이든, 빵집 주인이든 스스로의 이득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즉, 각자가 스스로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 시장원리라는 것이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고, 소비자는 만족을 추구하는 동시에 경쟁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면 그 사회의 경제적 후생은 가장 커지게 된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발간한 1776년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 바로 미국의 독립혁명이다. 미국의 독립혁명은 중산층으로 성장한 식민지의 시민계급이 본국에 저항해 왕정이 아닌 공화국을 세우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렇게 같은 해에 두 사건이 발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을 거쳐 17세기 영국의 명예혁명 이후 유럽에서는 왕권을 약화시키고 귀족정치를 종식시킨 시민혁명이 발발하게 되었는데 1776년 미국의 독립혁명이 그 시발점이 된 것이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당시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엄청난 구성원의 자유를 선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하였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하였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떠한 형태의 정부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다.” 쉽게 말하면 구성원의 이해와 맞지 않는다면 공동체를 뒤집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지 나라를 위해 국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부론의 발간과 미국의 독립혁명은 결국 개인의 자유와 이해를 중요시하는 시민계급의 탄생과 부상이 가져온 역사적 사건임을 알 수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 - 개인과 공동체의 건강한 균형
 

시민계급의 탄생을 가져오게 된 중요한 계기는 바로 종교개혁에서 찾을 수 있다. 박성현은 유럽에서 개인에 대한 관념을 궤도에 올려놓은 장본인이 바로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라고 보고 있다.

루터는 기독교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개인주의를 로마 가톨릭교회 체제의 그늘 밖으로 끄집어내 ‘개인의 종교’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박성현은 듀르크하임이나 막스 베버 같은 사상가들이 유럽 개인주의의 궁극적 뿌리를 예수에게서 찾는다고 지적한다.

성경에 나타난 것처럼 예수는 죄와 도덕을 판단할 때, 행위를 기준으로 따지던 유대교 전통과는 달리 의도와 동기에 의해 판단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동기에 의해 죄를 판별하는 것은 ‘신(神) 앞에 홀로 선 개인’을 생각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대사회는 공동체에서 개인이라는 구성원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잔인한 사회였다. 고대사회는 가부장 중심의 가족과 씨족 단위로 구성된 사회였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중국 그리고 우리의 삼국시대는 씨족의 대표인 귀족이나 허울 좋은 시민이라는 명칭을 제외하고는 노예처럼 비극적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잔인한 사회였다. 근대사회가 말하는 자유와 평등은 바로 사회의 기본단위가 개인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이런 의미에서 시민혁명, 시민계급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근대적 의미의 시민의 등장은 개인이라는 단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즉, 개인과 공동체의 건강한 균형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성봉 숭실대 교수
오하이오주립대 경제학 박사
전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 시장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