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홍정석 미래한국 기자
공정한 시장경제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는 ‘재벌개혁’이다. 하지만 재벌 대기업이 왜 개혁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경제적 원리가 아니라 대부분 정치적 입장들이 차지한다.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불공정에 대한 생각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체가 불공정하다는 전제를 안고 있다. 정말 그런 것일까. 지난 해 한국경제의 발전을 추적해 <기적의 한국경제 70년사>를 출간한 최광 교수를 만나 정부와 기업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 문재인 정부 하에서 재벌 대기업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 시각이 확대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재벌 대기업은 부당한 특혜로 성장한 것이라는 인식이 강한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재벌이 왜 재벌이 되고 대기업이 왜 대기업이 되었을까요? 관료와 정치가 같이 거드름을 피우고 위세를 부려 그렇게 되었을까요? 아니면 근로자, 중소기업가, 납품업자를 착취해 그렇게 되었을까요? 재벌 대기업은 거드름 피우고 위세 부리고 착취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한 일이 없고 그러할 수도 없습니다. 대기업과 재벌이 오늘의 위치에 오른 것은 그들이 영위하는 산업과 그들이 봉사하는 전 세계 고객들의 성원에 힘입어 그렇게 된 것이죠. 오늘날과 같이 된 것이 정부가 주는 특혜 때문이라면 중소기업이 더 잘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재벌과 대기업이 오늘의 위치에 오른 것은 고객들에게 경쟁자들보다 더 나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더 싼 가격에 공급했기 때문입니다. 소비자들이 외면하면 하루아침에 망하는 것이 기업이죠. 정치가와 관료도 기업이 고객에게 봉사하듯 국민과 기업인에게 봉사해야 합니다. 고객이 외면하는 기업은 퇴출로 직결되는데도 국민이 외면하는 정치가와 관료는 계속 자리를 지키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그들은 문제없는 기업, 잘하는 기업을 문제시하고 시비합니다.
제발 남을 탓하지 말고 자기 일을 잘 하자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뒤진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은 상대적으로 정치가와 관료와 관련된 것이지 대기업이나 재벌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정치가나 관료가 재벌 대기업을 질책하는 부분을 보자면, 재벌과 대기업이 크게 잘못하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죠. 정치가와 관료는 좋은 정책으로 국민에게 봉사하고 기업은 전 세계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싸고 질 좋은 상품으로 봉사하는 봉사의 경쟁을 벌여야 합니다.
재벌 대기업은 소비자에게 봉사한 결과로 등장한 것
- 재벌 대기업들에는 문제가 없다는 말씀으로도 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벌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재벌 해체를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실체도 없는 국민 정서를 바탕으로 정권 재창출을 위해 인기를 얻는 방편으로 재벌개혁이 활용될 때 원하는 결과는 손에 쥐지 못하면서 장기적으로 새로운 문제만 야기되는 것이 문제죠. 아무리 내용이 좋더라도 강요가 아닌 자발적 개혁이라는 모양을 갖추고 책임을 피하기 위해 되풀이되는 정·재계 간담회의 개최도 사실은 큰 문제입니다.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지구상의 어느 나라가 정·재계 간담회를 통해 정책을 추진합니까?
경제현상을 놓고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하려는 것만큼 경제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어요. 재벌경제가 따로 없으며 중산층 경제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데 재벌경제는 나쁘고, 중산층 경제는 좋다는 식으로 자신들이 이해하고 이러한 몰이해를 남에게 강요하는 무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제대로 된 경제정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는 재벌 총수도 있고 부자도 있고 중산층도 있고 서민도 있으며 빈곤층도 있는 법이죠. 가상적으로 어느 한 시점에 모든 사람에게 재산을 똑 같이 갖게 해도 상당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들의 재산과 소득에는 격차가 나게 마련입니다. 물론 국가는 생계가 곤란한 계층의 의식주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합니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으로 중산층이 육성된 것은 인류 역사상 없는 일이죠. 재벌개혁과 고소득층과 저소득층간의 분배 개선 문제가 혼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부와 기업의 관계에서 정책 당국이 기업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기업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고 기업을 경쟁의 와중으로 내모는 것이어야죠. 오늘날 기업은 정보와 인력 면에서 그 어느 집단보다 우수합니다. 정책 당국이 해야 할 일은 이러한 기업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죠. 우리 경제의 활성화는 정부 지원이나 지도에 의해서가 아니고 경제의 개별주체가 각자의 책임 하에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며 자생력을 갖추는 것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개별 경제주체는 언제나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게 마련이므로 정부 정책의 핵심은 공정하고 투명한 경기규칙을 확립하고 확립된 경기규칙을 엄격히 집행하는 것이죠.
- 그렇다면 기업과 정부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입니까?
정부의 역할과 정부와 기업의 관계는 사거리에 신호등을 설치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신호등이 설치되지 않은 사거리라면 교통은 막히게 마련이죠. 정부가 할 수 있는 일 또는 해야 하는 일은 원활한 교통 소통을 위해 사거리에 신호등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신호등이 없거나 있더라도 제대로 작동되지 못해 사거리에서 서로 얽힌 차들의 운전자들을 비난하고 야단치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 아닙니다. 이미 얽힌 사거리에 재벌기업들에게 진입하도록 정부가 강요해 놓고 어느 순간에 교통 혼잡의 원인이 재벌기업에 있다고 맹비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죠. 물론 우리나라 재벌기업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아닙니다. 재벌기업 문제는 차가운 머리를 가지고 문제점을 제대로 진단하고 문제를 확실히 풀 수 있는 효과적인 처방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시장 확대적인 정부되어야 경제성장 가능
-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불공평하다는 주장들이 주류인 것 같습니다.
시장경제의 불공평함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충고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대가 부를 얻고 싶거든 남들에게 좀 더 값이 싼 것 또는 남들이 더 좋아하는 것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만족시키도록 하라.’ 시장에서 보상을 받는 것은 업적 자체가 훌륭해서가 아니고 수많은 소비자로부터 좋다고 인정을 받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의 냉혹함에 대해 말이 많은 이유는 자본주의가 모든 사람을 각자의 능력과 기여에 따라 달리 대우하기 때문이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모든 사람의 지위는 자신들의 판단과 행위에 달려 있습니다. ‘개인의 능력과 기여에 따른 대우’라는 원칙은 개인의 부족함에 대해 어떤 변명도 용납하지 않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많은 사람이 불행함을 느끼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각자에게 가장 바람직한 상황이나 지위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는 예외 없이 부여하지만, 그런 상황 또는 지위는 소수의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자존심은 더 큰 능력을 발휘하고 재능을 가진 사람의 모습을 보고 상처를 받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가치와 장점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죠. 자신의 패배와 부족에 눈을 뜰 때 자존심이 상하고 불평불만은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전에도 그러했던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경제 위기, 유가 폭등, 물가 상승, 청년실업 증대, 양극화 등으로 각계각층의 삶이 힘들게 되니까 재벌과 대기업 때리기가 최근 부쩍 늘고 있는 것이죠. 좌파 정치인과 진보학자야 늘 그래 왔지만 최근엔 일부 우파 논객들까지 가세하는 것을 봅니다. 기업인이 사업하거나 처신하기가 요즈음처럼 어려운 때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일자리 창출을 하지 않는 것, 양극화를 야기하는 것, 재래시장을 짓밟는 것, 중소기업을 후려치며 동반성장을 하지 않는 것 등 우리 사회 만악(萬惡)의 대부분이 기업인 특히 대기업, 재벌 관련 기업인의 탓이라는 건데, 동네북 신세인 자신들의 처지를 놓고 많은 기업인이 한탄하고 있을 겁니다. 정말 기업할 의욕이 속되게 말해서 밥맛일 겁니다.
기업인은 항시 경쟁 속에서 체력이 단련됩니다. 독과점 산업에 종사하는 기업의 경우 경쟁이 없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독점기업도 항시 새로운 진입자의 위협 속에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국경 없는 범지구화 시대에는 국내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더라도 해외로부터의 거센 경쟁은 정말 기업인들로 하여금 처절하게 투쟁하게 하고 그 결과 살아남는 기업은 대단한 저력을 갖고 있습니다. 기업의 세계는 냉엄해서 기술, 자금, 판매, 인사 등 어느 한 구석이라도 허점이 있으면 부도 도산이라는 처절한 결과로 귀착됩니다.
- 시장과 정부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어떤 것입니까?
아담 스미스는 불후의 명저 <국부론>에서 ‘국가가 빈곤과 절망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안정적인 정부(stable government), 예측 가능한 법률들(predictable laws), 부당한 과세가 존재하지 않는 것(absence of unfair taxation), 이 세 가지만 지키면 된다’고 갈파한 바 있습니다. 어떻게 240년 전에 국가 번영의 요체를 이렇게 간결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지적할 수 있었을까요?
통상적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는 임기응변적으로 정부에 반드시 무언가를 빨리 하기를 촉구합니다. 항상 정부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무엇을 반드시 해야 하는 식으로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일은 정부가 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이 쉽게 도출되죠. 정부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살피고 이를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민간 또는 시장이 잘 할 수 있는 일들에 정부는 개입하지 말아야 하며, 더더욱 국민 세금을 투입해 낭비를 초래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죠.
잠재적 생산성이 높은 곳을 찾아내 자원을 집중적으로 배분하는 일은 시장이 할 일이지, 정부가 할 일이 아닙니다. 정부가 마련한 기준에 따라 예산 지원을 받기 위해 경쟁을 장려하는 것은 시장논리의 잘못된 적용입니다. 정부의 집중 지원으로 우리가 손에 쥐는 것은 높은 품질이나 낮은 가격이 아니라 충성이나 허위보고의 경쟁일 뿐이죠. 이 과정에서는 자원 자체가 낭비되는 것은 물론 귀중한 자원인 창의력도 소멸되기 쉽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작은 규모의 예산을 가진 나라가 자원관리를 효율적으로 했으며 작은 정부가 국가의 생산성을 저하시킨 경우는 없어요. 하지만 국가 예산이 방대하고 민간부문에 원칙 없이 적극 개입하는 큰 나라는 언제나 곧장 난관에 봉착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금융위기를 빌미로 추경을 편성하고 다음해 예산을 증액 조정하는 등 정부지출을 계속 확대하는 것은 국민 혈세의 낭비로 귀착됩니다. 현실의 불가피성에 초점을 맞춰 이 사업 저 사업 벌이기보다는, 지금은 다소 고통스럽더라도 예산 규모를 늘리지 않는 것이 국가 백년대계의 시금석을 놓는 길이라 할 수 있지요.
- 결국 시장을 확대하는 정부가 좋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렇습니다. 한 마디로 정부의 역할이 바뀌어야 하고 그 방향은 정부 확장적이 아니고 시장 확장적이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의 논의는 정부가 문제를 야기 시키는 존재인지 또는 정부가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인지에 초점을 맞춰왔어요. 이제는 논의의 초점을 어떤 유형의 정부가 그리고 어떤 유형의 제도가 경제 번영을 유도하고 촉진하느냐에 맞춰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기되는 구체적인 질문은 첫째, 경제 번영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는 어떤 유형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가 라는 것과 둘째, 어떤 유형의 정부가 이들 서비스를 보다 일관성 있게 제공하는가 입니다. 경제적 번영을 위해 어떤 유형의 정부가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잘 나타내는 문구는 저의 은사이신 올슨(Mancur Olson) 교수가 제안했죠. 그것은 ‘시장 확장적 정부’입니다.
시장 확장적 정부는 사유재산권을 창출하고 보호하는 그리고 계약 이행을 보증할 만큼 강력하지만, 자체의 활동으로 이들 권리를 빼앗지 않도록 제약되는 정부를 말하죠. 시장 확장적 체제를 어떻게 확립하느냐 하는 문제는 많은 과제를 안고 있는데, 이에는 3권 분립에서의 국회와 법원의 견제와 균형, 정부의 재정활동에 대한 엄격한 제한, 교육을 통한 정보에의 원활한 접근 등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경제가 번창하기 위해서 마련되어야 하는 경제 체제의 기본 틀 속에 포함되어야 하는 내용은 매우 다양하고 많습니다. 그 중 핵심적이라고 판단되는 것이 일곱 개가 있어요. 사유재산권의 확립, 교환 및 거래의 보장, 경쟁적 시장체제의 구축, 효율적 자본시장의 구축, 통화가치의 안정, 효율적이고 공평한 세제의 구축, 그리고 대외개방과 자유무역의 창달 등의 일곱 가지가 그것이죠.
우리나라의 경우 외견상으로 보면 이들 일곱 가지 기본 틀이 다 확립되어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세부적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하나도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죠. 부동산 투기억제를 명목으로 사유재산권이 근본부터 흔들리고, 특정집단의 횡포에 대외개방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경쟁을 방해하는 각종 규제가 만연되어 있는 것이죠.
소비가 아니라, 저축과 투자가 미래 성장에 중요
- 우리 경제는 고질적인 저성장 상태로 정체되어 있습니다. 생산이 아니라 소비로 경제를 견인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원래 시장경제는 실패를 통해 학습합니다. 지금처럼 정부가 돈키호테처럼 해결사로 나서 시장을 대신한다면 정치의 풍요만을 낳을 뿐 경제적 풍요는 더 멀어질 뿐이죠. 노벨 경제학상의 프리드먼은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위기만이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다’고 갈파했습니다. 위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위기를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작금의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앞으로 우리 경제를 튼실하게 하게 하는 변화의 주된 내용은 근로자로 하여금 더 열심히 일하게 하고, 가계로 하여금 더 많이 저축하도록 하고, 기업이 더 투자하도록 하여 경제 전체로 생산과 생산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최근의 저축률과 투자율의 하락은 매우 우려할 사항인데 정책 당국과 전문가들은 주목하지 않고 있습니다. 낮은 저축률을 놓고 제기되는 정책적 과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저축률이 왜 이렇게 낮은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낮은 저축률의 영향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죠. 소득에서 소비를 차감한 것이 저축이므로 낮은 저축률은 소득에 비해 소비가 상대적으로 더 늘었음을 의미합니다. 소득 증가는 과거와 같지 않은데도 세금, 사교육비, 통신비, 의료비, 대출이자 등 소비가 크게 늘었으니 저축률의 하락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출의 내역을 보면 어느 하나도 뺄 수 없기에 가계나 개인은 저축의 여유가 없음을 너무나 쉽게 수용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이렇게 안이하게 넘길 수 없는 것이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여유가 있어야만 저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저축률 하락은 국민 개개인의 현재와 미래의 소비에 대한 선택에서 현재의 소비를 선호하는 결과입니다. 국민 모두가 먹고 놀기를 선호한 결과가 저축률 하락으로 나타난 것이죠. 지방정부 중앙정부 할 것 없이 과시적 소비에 혈안이고 카드 문제, 부동산 문제 등 정부의 잘못된 정책도 소비를 부추기고 저축의 여력을 앗아 갔습니다.
저축률은 가계의 건전성을 상징합니다. 모든 국민이 소비에 혈안이 되어 있어요. 언론 매체들은 일기예보를 하며 일하기 좋은 날씨라고 하지 않고 놀기 좋은 날씨라 경쟁적으로 강조하죠. 중앙정부와 지자체는 소비문화의 진작에 혈안이 되어 있고, 자기 분야에서 묵묵히 절약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뭔가 모자라는 사람으로 사치와 허영에 탐닉하는 사람을 우상으로 부각시키는 풍토에서 저축하는 마음은 사라집니다.
정부의 각종 시혜적 복지정책은 국민 개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미래지향적으로 살기보다는 의존적이고 찰나의 향락을 추구하도록 합니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오늘날 저축이란 개념이 개개인의 사전(辭典)에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죠.
- 민간 소비로 경제를 견인할 수 없다면 생산이 중요한데, 기업들은 투자를 꺼려합니다.
기업 설비투자의 계속적 부진으로 성장의 기반이 계속 하락하는 데 대한 근본적 대책의 마련이 절실합니다. 국내 기업의 투자 확대는 물론 세계의 우량 기업이 대한민국에서 투자를 하도록 하기 위해 국운을 건 결단과 획기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국제적 위상과 소득 수준을 크게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경기 활성화, 일자리 창출, 복지 확대 등 우리 사회의 핵심 정책과제를 해결하고 경제를 선순환시키는 첩경은 투자를 활성화시키는 것입니다. 새로운 기업이 발흥하고 기업투자가 활성화되면 경기가 회복되고, 일자리가 창출되고, 복지확대는 저절로 가능해집니다.
정부도 투자 부진의 문제를 인식은 하고 대책을 내놓고 있으나 그 인식의 정도가 심각하지 않으며 내용도 미사여구(美辭麗句)인 경우가 대부분이죠. 대책의 발표는 있으나 끝까지 챙기는 책임 주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정책이 함량 미달이고, 문제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었으며, 정치권으로부터는 계속 헛발질이 나옵니다. 재벌 총수를 불러 ‘공격적 경영’을 해달라고 당부한다고 해서 기업이 자신의 운명이 달려 있는 투자를 쉽게 할 리가 없죠.
설비투자 확대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결코 멀리 있거나 어렵지 않습니다. 기본에 충실하고, 잘하고 있는 나라의 경험에서 배우면 됩니다. 최근 우리를 추월하고 있는 나라의 경우도 그 배경을 면밀히 관찰해 보면 외국 기업과 기술의 유치에 성공해서 투자가 왕성하기 때문이죠. 예외가 없어요. 투자는 기업이 합니다. 기업이 원하는 여건을 만들어 줘야 투자를 하죠. 좌고우면하지 말고 경제정책의 초점을 기업의 투자 활성화에 맞춰야 합니다.
국내의 자금이 국내에 머물고 더 나아가 세계의 자본과 기술이 대한민국에 마음껏 투자되도록 여건을 확실히 만들어야 합니다. 설비투자의 활성화와 외국 자본과 기술의 국내 유입은 나라 전체가 경제 특구화가 되면 가능합니다. 잘 나가는 나라는 그 나라 전체가 경제특구인데 우리는 몇몇 지역에 특구를 만들어 놓고도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보통구와 다름이 없죠. 정치적 요인과 반(反)기업 정서가 그 특구에의 투자를 어렵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인세에 대한 오해 시정해야
- 마지막 질문입니다만, 교수님은 법인세 폐지를 주장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법인세에 대한 무지(無知)가 극에 달해 있습니다. 법인세는 결코 부자 세금이 아닙니다. 세부담의 불공평 문제에 대한 논의는 누가 실질적으로 세금을 부담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세금 부담을 누가 하느냐와 관련해서는 납세와 담세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죠. 조세의 부담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를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세금을 국가에 납부한 사람이 그 세금을 실제로 부담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죠. 즉 납세자와 담세자를 구분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데, 정책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세금의 실제 부담자, 즉 담세자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연인만이 세금을 부담하고 법인은 세금을 부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주주, 노동자, 지주, 소비자 등 사람만이 세금을 부담하고 기업 등 법인은 세금을 부담하지 않는 것이죠.
법인세의 담세를 누가 하느냐에 대해서는 최근 미 의회 예산처의 보고서가 이를 가장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종합적 결론은 폐쇄경제를 전제로 단기에는 법인부문에 사용된 자본이 부담하며 중기에는 경제 전체의 자본이 부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방경제를 전제로 하고 중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근로자가 법인세의 상당 부분을 담세한다고 미 의회 예산처는 결론짓고 있습니다.
자연인만이 세금을 부담하므로 법인이 이를 부담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법인이 수표를 끊어 국고에 세금을 납부하지만 법인 그 자체가 세금을 부담하는 것은 아니죠. 기업은 단지 주주, 고객 또는 노동자로부터 돈을 거둬 이를 국고에 이전해 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법인은 법인세의 납세자이지 담세자는 아니라는 것이죠. 자연인만이 실질적인 조세부담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법인소득세가 개인 소득세와 병존해야 할 이유는 없게 됩니다.
따라서 ‘기업이 응분의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는 구호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정치적 구호입니다. 마치 법인세를 강화하면 법인이 세금을 부담하고, 법인은 돈이 많으므로 법인세는 돈이 많은 계층에 대한 과세라고 인식되고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죠. 오늘날과 같은 주식 대중화시대에는 고소득자만이 주식을 보유하고 있지 않으며 중산층 또는 그 이하의 소득자도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부자들에게 높은 세금 부담을 지게 하려는 정책 의도가 있다면 이는 그 부담이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인 개인소득세를 통해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법인세 폐지를 오래 전부터 주장해 왔는데 법인원천 소득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고 법인원천 소득을 개개 주주에게 귀속시켜 개인소득세를 부과하면 오히려 세수도 증대되고 형평성도 더 확실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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