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50주년 맞은 통일부, 기대에서 우려로
[진단] 50주년 맞은 통일부, 기대에서 우려로
  • 전경웅 미래한국 객원기자
  • 승인 2019.02.13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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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통일원 으로 출범… 남북대화 연연하는 부처 인식

통일부가 3월 1일자로 50주년을 맞는다. 지금 사람들이 통일부를 바라보는 시선은 처음 출범할 때와는 다르다. 통일을 위한 노력과 통일 이후에 대한 준비를 하는 부처라기보다 남북대화와 대북지원에만 연연하는 모습만 보인다는 지적이 많다.

국토통일원에서 통일부까지

박정희 정부 이전 한국은 통일을 위한 조직을 별도로 만들지 않았다. 그저 1949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내무부 산하에 이북5도청을 만들고 북한 수복의 꿈을 그린 정도였다. 이후 국토통일원이 생길 때까지 통일 관련 정부조직은 이북5도청과 관련 위원회가 전부였다.

박정희 정부는 3년에 걸쳐 국토통일원 창설을 준비했다. 1966년 7월 국회에 통일연구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여야 의원 10명이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국회 통일연구특별위원회는 1967년 1월 국회에 활동보고서를 제출했다. 특위는 정부 조직에 국무위원을 장으로 하는 통일 전담기구를 만들고 국회에도 해당 상임위원회를 두자고 제안했다.
 

박정희 대통령 국토통일원 현판 제막식 / 국가기록원 제공
박정희 대통령 국토통일원 현판 제막식 / 국가기록원 제공

통일 관련 정부 부처 설치는 이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8년 4월 19일 정부는 국토통일원 창설을 위해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개정안은 그해 7월 24일 관보에 게재됐다. 이때 국토통일원이 출범했어야 하지만 이해 무장공비 침투 등 북한의 도발 때문에 창설이 연기됐다. 결국 1969년 3월에서야 국토통일원이 출범했다.

이후 남북한 간의 밀담 등을 통해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이 나올 때까지 국토통일원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소위 ‘실미도 부대’로 알려진 공군 684부대 자폭 사건을 비롯해 대북특사 방문까지 남북 간 대화와 핵심적인 합의는 모두 중앙정보부가 맡았다. 반공교육이나 북한 자료 수집과 분석·정리 등은 여전히 이북5도청이 맡았다. 남북이 해외에서 벌이던 체제 경쟁은 외무부와 체육부, 상공부, 문화공보부가 맡았다. 국토통일원은 뭘 하는 부서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국토통일원은 이후 1980년대까지 환경부 등과 함께 ‘영향력 없는 정부 부처’로 알려졌다.

국토통일원이 남북통일전략을 수립하는 핵심 부처가 된 것은 노태우 대통령 덕분이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외교를 통해 러시아,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이를 바탕으로 북한과의 통일을 추진했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위한 북한과의 대화, 주한미군 보유 핵무기 전면 철수, 불곰사업, 중국과의 수교 등은 남북통일이라는 그랜드 플랜을 성사시키기 위한 부분적 목표들이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남북통일의 핵심적 역할을 맡기기 위해 1990년 국토통일원을 통일원으로 승격시키고, 장관을 부총리에 보했다.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남북통일 준비를 시작한 통일원은 1990년부터 시작된 한반도 비핵화 협상, 1993년 북한과의 협상,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위한 작업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창설과 대북 경수로 사업 진행 등을 맡으면서 그 저력을 보여줬다. 통일원이 북한과의 협상에서 나름대로 우위를 점하며 대화를 주도했던 것은 김영삼 정부 때까지였다. 탈북자 지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관리, 통일교육 지원, 남북교류협력 등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 김영삼 정부 때였다. 1998년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당시 외환위기를 이유로 통일원을 통일부로 격하시키고, 자신과 북한과의 대화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겼다.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 이후 통일부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전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확하게는 통일부 내부에 ‘햇볕정책 전도사들’이 득세하게 됐다.

김대중 정부 이후 통일부, ‘남북대화파’가 득세

김대중 정부의 통일부는 북한 문제를 총괄했다.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조성사업도 통일부가 관리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북한으로 보낸 24억 7000만 달러가 대부분 통일부가 관리하던 남북교류협력 사업, 남북경제협력 사업 등을 통해 넘어간 것이다. 햇볕정책을 충실히 이행한 덕분이었다.

통일부의 대북사업 관리 권한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 더 커졌다. 2017년 4월 통일부가 발표한 ‘정부별 대북송금과 현물 제공 내역’을 보면, 노무현 정부 때 북한에 보낸 돈은 정부와 민간 분야를 합쳐 43억 6000만 달러에 달했다. 이 또한 모두 남북교류협력과 남북경제협력을 통한 것이었다.

당시 통일부는 개성공단 입주기업 지원, 국내 시민사회단체의 방북 지원, 국내 시민사회단체와 언론사, 기업들이 북한에서 여는 행사 지원 등을 맡으며 북한 측 관계자들과 긴밀히 협력했다. 이때를 기억하는 전직 국정원 요원은 “당시 우리는 청와대와 통일부 지휘에 따라 방북하는 사람과 북측 관계자들을 접대하는 역할을 했었다”고 털어놨다. 다른 전직 국정원 요원은 “노무현 정부 때 대북지원 내용을 보면 까무러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노무현 정부 시절 통일부는 경제나 교육부처보다 위상이 더 높았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통일부 조직을 부총리급 부서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에게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의장을 맡기고 부총리급으로 대우했다. 이후 정권이 끝날 때까지 정동영 장관은 ‘통일부총리’로 불리며 북한을 오가며 활동했다. 정 장관은 2007년에는 여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

2018년 11월 11일 통일부는 공군수송기를 이용하여 제주 감귤을 북한으로 보냈다.
2018년 11월 11일 통일부는 공군수송기를 이용하여 제주 감귤을 북한으로 보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은 남북한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간의 6자회담이 열릴 때였다. 이때 한국 측 6자회담 수석대표를 맡은 외교부는 통일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때 북한은 거칠 것 없다는 듯 수시로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했고, 2006년 9월에는 핵실험까지 실시했다. 결국 ‘대화를 위한 대화’로 전락해 버린 6자회담은 노무현 정부가 막을 내리면서 끝났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지만 통일부의 행태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 7월 11일 관광객 박왕자 씨가 북한군 병사에게 살해되면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됐다. 하지만 개성공단은 계속 가동했고, 남북교류협력 사업도 멈추지 않았다. 2010년 3월 26일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북한 잠수정의 어뢰공격으로 폭침당하면서 남북교류는 완전히 중단됐다. 이명박 정부는 5·24조치라는 독자 대북제재를 통해 개성공단을 제외한 모든 대북지원과 남북교류를 중단시켰다. 결국 통일부가 관리할 남북교류협력 사업이 대폭 줄어들었다.

정부 부처 내에서도 통일부의 위상은 낮아졌다. 노무현 정부 때와 달리 장관은 다른 장관과 같았으며, 예산도 감축됐다. 또한 통일부 내에서 강한 세를 과시했던 인맥들도 한직으로 조용히 옮겨갔다. 이들 인맥은 ‘남북회담본부 라인’으로 불렸다. 인맥에 ‘남북회담본부’가 붙은 이유는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별도로 마련된 남북회담본부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 핵심이라는 뜻에서였다.

남북회담본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 통일부 내에서 승승장구했다. 특히 노무현 정부는 10·4 남북정상회담이나 그 전후의 고위급 회담이 있을 때면 통일부가 있는 정부서울청사가 아니라 남북회담본부에서 담당자들이 출발하게 했고, 기자실 또한 이곳에 차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통일부 내에서는 대북 유화론자를 가리켜 ‘남북회담본부 라인’이라 불렀다. 일부 정부 중앙부처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통일부의 임무가 통일 대비가 아니라 ‘남북대화’와 ‘대북지원’이라고 착각한 사람들이라고 비판했다.

문재인 정부 통일부는 청와대 부속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한 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의 통일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처럼 불통 부처가 됐다.

통일부가 언론이나 국민들과 불통이 시작된 것은 2018년 초부터다. 당시 김정은의 신년사 이후 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 참석 의사를 밝히면서 김여정과 김영철 등 북한 권력층이 방한했다. 이때 통일부는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이 어디에 묵었는지를 밝히지 않았다. 서울 광진구 쉐라톤 워커힐 호텔의 최고급 객실 2개 층을 통째로 빌렸다. 김여정 일행 또한 김영철 일행에 준하는 수준의 대접을 받았다. 이들 대접에 들어간 비용은 3억 원으로 추산되는데 모두 국민 세금이다. ‘삼지연 악단’을 인솔해 방한한 현송월 일행도 특별대우를 받았다.

김영철 일행에 대한 특별대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평창으로 가는 KTX 열차 임시편까지 편성해 운행했다. 이를 위해 평소에 다니던 KTX 열차 운행이 지연됐다. 국민들은 왜 불편을 겪어야 했는지를 나중에 뉴스를 보고서야 알았다.

기자들 또한 황당한 체험을 했다. 김영철 일행이 경기 파주시 도라산 출입경사무소로 들어온 뒤 이들이 군사도로를 통해 우회해서 서울에 왔을 당시 통일부조차도 김영철 일행의 동선을 모르고 있었다. 또한 김영철과 김여정 일행이 도라산 출입경사무소에 왔을 때도 취재 제한선을 통일부가 아니라 국가정보원 관계자들이 관리하고 있었다. 기자들이 북한 관계자들에게 질문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는 게 당시 취재기자의 설명이었다. 그럼에도 통일부는 “우리가 모두 관리했다”면서 “취재 제한이나 국민 세금을 낭비한 적이 없다”고 큰소리쳤다.

같은 해 4월과 5월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9월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때도 청와대가 직접 모든 것을 관리해 통일부의 존재감은 거의 없었다. 남북정상회담이라고는 하나 통일에 관한 행사임에도 프레스센터 관리부터 기자 등록 등에서 통일부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통일부, 어디서 존재 의미 찾아야 할까?

같은 해 4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비밀 방북, 6월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 때도 통일부의 존재감을 찾기 어려웠다. 정례 브리핑 때 질문하면 “그에 대해 말할 것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당국자에게 별도로 질문하기 위해 연락을 하면 받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놓고서는 “남북 관계에서 통일부는 뭐하느냐”고 비판하면 “사실과 다르다”고 언론에만 호통을 쳐댔다. 그보다 앞선 2017년 9월에는 통일부 직원이 탈북자 개인정보를 탈북 브로커에게 팔아넘긴 일도 있고, 2018년 10월 15일에는 판문점에서 열리는 남북 고위급회담 때 탈북자 출신 기자를 강제로 취재하지 못하게 막는 일도 있었으니 존재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통일부는 처음 창설됐을 당시, 그리고 노태우 정부 시절의 통일전략담당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잊은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자신들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못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면서 “과거 서독이나 대만의 통일관련부서도 우리처럼 대화와 교류에 집중한다”고 주장한다. 그럴까.

과거 서독은 동독과의 교류와 이를 통한 동독 융화책을 시행하기 위해 ‘내독부’를 뒀다. 냉전 시절 내독부는 국무위원급보다 한 단계 아래의 부처로 동독과의 경제교류를 제외한 교류협력 분야를 맡았다. 동시에 동독 국민들의 자유와 인권 증진을 위해 서독과 동독 간 교류에서 ‘등가 교환의 원칙’을 고수했다. 그 덕분에 동서독은 서로 여행도 가능했고 TV 방송도 볼 수 있었다.

대만은 총리실에 해당하는 행정원 산하에 대륙위원회를 두고 있다. 대륙위원회 또한 중국의 급격한 성장 이후에는 양안 간 교류협력을 담당하는 업무를 주로 하고 있지만 그들의 정례 브리핑 내용만 봐도 무조건적인 중국과의 대화나 교류협력은 지양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햇볕정책 전도사'들이 득세한 통일부는 그 목적과 이미지가 퇴색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햇볕정책 전도사'들이 득세한 통일부는 그 목적과 이미지가 퇴색되기 시작했다.

한국 통일부의 북한 카운터 파트는 통일전선부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들은 한국과의 교류협력을 위한 부서가 아니라 대남공작을 통한 적화통일, 그것이 안 될 경우에는 한국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게 목표인 부서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경우 1961년 4·19혁명 이후 한국 사회에서의 혁명을 선전선동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서로 대남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를 운영하고 있다. 통일전선부는 김대중 정부 이전까지는 비밀 대남공작에 집중했기에 남북대화 전면에조차 나서지 못했던 부서다. 통일부가 이들을 상대로 하면서 ‘대화와 협력’만 내세운다면 어떤 결과가 있을까.

통일부의 존재 의미를 가장 잘 보여줬던 때는 1990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마저 제치고 북한과의 협상을 주도하며, 양보를 이끌어 냈던 통일부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통일부는 지금 북한 유사 시 북한 민심 수습과 북한 주민 구호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은 세워놓고 수정하고 있는가. 북한개발계획은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가.

영국 로이터 통신은 지난해 12월 통일부를 “한국에만 있는 이상한, 냉전적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사실상 비아냥거린 것이다. 이를 로이터 통신의 시각 문제로만 폄하할 게 아니라 현재 통일부가 존재감이 옅어진 데 문제가 있다는 점도 자각해야 한다.

전체 직원이 250여 명에 불과하지만, 연간 운용하는 예산 규모는 1조 3200억 원에 이르는 통일부. 4만 탈북자와 13만 이산가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통일부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창설 50주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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