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에크리...인간에 대한 가장 깊고 넓은 이해
[서평] 에크리...인간에 대한 가장 깊고 넓은 이해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9.02.19 06: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 루만은 1968년에 빌레펠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취임하며 제출한 연구 계획서에 이렇게 적은 바 있다.

‘연구 주제: 사회체계이론, 연구 기한 30년, 연구비 0원.’ 아마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이번에 출간되는 『에크리』에 대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프랑스의 저작권자인 자크 알랭-밀레와 계약한 것이 1994년이므로, 이 책의 번역이 시작된 지 얼추 25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 책은 그동안 진행과 멈춤을 무한히 반복했고, 새로운 시작에의 용기와 무한 반복되는 듯한 좌절이라는 기나긴 터널을 거치며, 과거의 창고에서 먼지 쌓인 원고를 되찾아 미래를 위해 개고하고 개정하는 ‘동일성의 영구회귀’를 거의 무한으로 거듭해왔다.

그러면서도 유일하게 잃지 않은 하나의 목표가 있었으니 20세기의 정신분석(학)을 넘어 인문학의 최고 에베레스트 중의 하나인 이 책을 가독성 있게 번역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종의 ‘지적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도록 완역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 긴 시간 동안 프랑스의 저작권자나 번역자들은 어떤 추가 비용도 요구하지 않았으니 본서에 지출된 ‘번역비’ 또한 들인 노력에 비하면 0원인 셈이다. 오직 ‘즐거운 고통’만이 이 어려운 난문에 직면했을 때의 좌절과 함께 뒤통수를 망치로 후려치는 ‘지적 오르가즘’ 사이를 겨우 통과할 수 있도록 해줄 뿐이었다. 

물론 20세기 인문학의 최고봉 중의 하나인 이 『에크리』의 등정은 셰르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는데, 영어본과 독일어본 등이 그것이었다. 역자들과 편집부는 초역의 완역이 끝난 후 거의 3년 동안 이 두 완역본을 비롯해 일본어판과 이탈리아어판 등 가능한 모든 판본을 동원해 모든 문장을 여러 차례 교차 대조했으며, ‘이해 불가능한 것은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확인까지는 해두자’는 원칙에 따라 최고 번역본을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관련해 영역본의 성취와 한계는 오히려 이 책의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해준다. 영역 이전에 『에크리』 번역으로는 스페인어판과 일본어판이 유명했는데, 두 판본 모두 라캉의 지도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1971년에 라캉이 일본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번역된 일본어판은 라캉이 여러 번역자와 일일이 토론과 논의를 거쳐 이루어졌지만 여러 성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에크리』에의 본격적인 접근에는 한계를 가진 것으로 평가될 정도로 이 책은 번역이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스페인어판 또한 라캉의 지도하에 이루어져 거의 정본으로 인정받았지만 10여 년 전에 라캉 그룹 사이의 내부 투쟁 와중에 ‘1,000’가지 이상의 오류가 있는 것으로 (일부에서) 주장되었다. 영역본의 경우 이 스페인어판을 참조한 데다 밀레의 직접 지도하에 번역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뒷부분으로 가면서는 여전히 오역이 제법 눈에 띄는 것은, 이 책이 얼마나 거봉으로 범인의 접근을 불허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영역자 서문을 보면 저자가 얼마나 많은 재정적 지원과 함께 엄청나게 많은 동료의 후원 그리고 시간적 여유를 가졌는지를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20세기 인문학의 에베레스트는 완등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가장 좋은 번역은 최근 완역된 독일어판처럼 보이는데, 이 점은 특히 라캉이 프로이트를 정점으로 하는 정신분석학자라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원래 프랑스어본 편집자 프랑수아 발은 이 난해한 책을 오탈자 하나 없는 책으로 만든 것으로 유명한데, 독일어 번역자가 농담 삼아 발의 오류를 ‘드디어 하나’ 발견했다는 투로 농담을 던질 정도로 독일어본은 완벽한 번역에 가까워보인다. 

이처럼 한국어판은 라캉의 원서에 대한 철저한 분석은 물론 위와 같은 여러 셰르파의 도움을 얻어 기왕의 동서양의 어느 번역본보다 더 나은 번역본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왜? 그것은 이 책이 인간에 대한 가장 깊고 넓은 이해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라캉 말대로 또는 정곡을 찌르는 푸코의 지적대로 “우리(태도)를 바꾸기만 한다면” 난해한 책이 아니라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감히 평론가 김현의 말을 따르자면 ‘괴롭지만, 그러나 즐거운 독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장 깊은 심연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 자체에서도 라캉은 위대하지만 그것에 접근하는 방식, 스타일, 문체에서도 라캉은 20세기의 여느 대가를 넘어선다. 따라서 인간과 세계에 대해, 주체와 욕망에 대해, 그리고 이 둘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채 라캉은 어렵다’는 알리바이를 대지 말고 ‘거울 단계’나 ‘로마 담화’ 둥 어느 것 하나라도 끝까지 버티고 읽는 것은 독자에게 이 책이 ‘즐거운 지옥’과 함께 ‘지적 오르가즘’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작금의 ‘인문학 열풍’ 또는 심지어 ‘연예 인문학’은 ‘싱거운 천국’이다. 여기 라캉의 『에크리』의 ‘즐거운 지옥’이 있다! 보들레르는 ?여행에의 권유?에서 그곳에서는 ‘말도 않으리/생각도 않으리’라고 노래하는데, 기왕의 인간 이해에 대해서는 ‘말도 않고/생각도 않게 해줄’ 『에크리』에의 여행을 권유한다. 

라캉 없는 20세기 인문학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이 여기 이 한 권의 책 속에 담겨 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가장 깊고도 넓은 사유를 길어 올리고 있는 책. “나는 사유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쓰여지고 말해지는 존재이다.” 

1966년에 푸코의 『말과 사물』과 함께 출간된 이 책은 ‘모닝 빵’처럼 팔려나간 것으로 유명하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푸코의 책이 대단한 대중적 반응을 끌어낸 것은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그의 책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만큼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해는커녕 막상 끝까지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이 책이 대중적 성공을 거둔 것은 하나의 문화적 사건이었다. 프랑스에서 본격 철학서가 ‘아침 빵’처럼 팔려나간 것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이후 처음이었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그래도 실존주의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존재론을 구축하려는 전통 철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푸코와 라캉은 공히 ‘인간의 최종적 죽음’을 선언하고 있는 점에서 실존주의와 휴머니즘의 최종적 죽음을 동시에 선언하고 있었다. 

그러면 라캉의 이 책은 왜 그렇게 유명한 것일까? 그것은 20세기의 정신분석의 내외부의 상황 그리고 다시 그것을 둘러싸고 있던 세계 인문학 내외부의 지적 동향과 관련해 바라볼 때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00년에 출간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20세기 인문학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간학의 탄생을 알린 상징적 출발점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의식의 인간(학)의 죽음’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즉 20세기까지 서구 인문학이 이성과 의식과 의지 등을 중심으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해왔다면 이제 프로이트는 그것들 밑에, 옆에, 그것과 함께 전혀 다른 미지의 대륙이 존재하며, 그것이 그처럼 표층으로 드러난 것을 오히려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꿈 해석’을 통해 과학적으로 입증했던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이처럼 놀라운 혁명적 발견은 융을 필두로 오해와 곡해와 왜곡의 대상으로 전락해 1930년대에 그의 ‘무의식의 이론’은 ‘자아심리학’으로 축소되었으며, 1950년대에는 (본서에서 라캉이 지적하는 대로) “프로이트보다 페니헬”을 읽는 것이 더 유행일 정도가 되었다. 

라캉은 이러한 지적 환경 속에서 진정 프로이트가 말하고자 한 바가 무엇이며, 프로이트가 인간 이해에 가져온 지적 혁명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명확히 하려고 분투한 20세기의 프로이트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프로이트의 딸인 안나 프로이트를 중심으로 미국에서 번성한 ‘자아심리학’에 맞서 라캉이 평생 벌인 투쟁은, ‘심리 치료’와 ‘정상적 자아의 회복’이라는 신화가 만연해 있는 듯한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이 책 『에크리』는 그에 대한 지난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라캉의 지적 분투가 그처럼 정신분석계 내부의 논쟁에만 국한되었다면 라캉은 20세기 사상사에서 그렇게 문제적인 인물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아야 한다는 말대로 이 ‘정신분석’이라는 손가락이 실제로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리킨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라캉이 왜 그렇게 문제적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라캉은 분석분석이라는 좁은 의미의 분과학문에 머문 것이 아니라 인간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 프로이트를 넘어 하이데거, 야콥슨, 레비-스트로스 등 당대의 인문학의 최고 성과를 모두 흡수해 새로운 인간 이해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까? 

따라서 마치 칸트 이전의 모든 사상적 조류가 『순수이성비판』 속으로 흘러들고 칸트 이후의 모든 사상적 조류가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왔듯이 20세기의 거의 모든 지적 조류는 라캉의 이 책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21세기의 인문학의 주요 흐름은 그로부터 흘러나왔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라캉의 지적 도발 없이 들뢰즈/가타리의 『앙띠-오이티푸스』와 푸코의 『말과 사물』, 데리다의 작업을 상상할 수 있을까? 데리다의 간결한 지적대로 라캉의 지적 도발 없는 또는 그와의 지적 대결 없는 20세기 인문학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유행 중인 들뢰즈에 비해 라캉이 얼마나 거봉인지를 잊는다면 우리 인문학은 주마간산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라캉의 독서가 지독히 난해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지적 상황의 특수성이 그러한 난해함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그동안 정신분석은 우리에게서는 주로 지젝을 경유해 라캉에 이르는 우회로를 따라왔으며, 임상보다는 문화비평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와 같은 기묘한 지적 공백 속에서 한국에서 그동안 정신분석은 문학이나 영화 비평 도구로 ‘유용되어 왔지’ 정작 그것이 가리키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는 맥락에서는 크게 논의되어오지 못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그동안 호수 안에 머물던 우리의 인간 이해를, 우리의 인문학을 대양으로 이끌고 있다. 

또한 이 책의 ‘난해함’에 대한 대답을 라캉 본인의 말 그리고 푸코의 서평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독자도 동일한 노고를 기울여야, 즉 ‘나를 변화시켜야 이 책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인문학은 분명 ‘교양’이기도 하지만 교양에 머무는 한 ‘이유식’ 교양, ‘연예’ 인문학에 그치는 역효과를 불러오게 된다. 작금의 한국 인문학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한 형국이다. 하지만 라캉의 이 책은 ‘의식’의 세계에만 시야가 갇힌 채, 우울증으로 직결되는 ‘자아’에만 매달린 채 이 세상을 사는 고통을 ‘교양’으로 봉합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나를 바꿀 것’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대학의 완전한 붕괴를 직면하고 있는 지금, 이 책의 거의 1/3이 정신분석의 ‘교육’, ‘공부’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 점 또한 주목을 요한다. 사실 정신분석의 모든 것은 훌륭한 정신분석가의 양성 여부로 수렴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정신분석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와 관련된 분석 ‘주체’ 문제 등은 대학이 완전히 붕괴되고 무수한 사람이 헛된 ‘교양’을 추구하는 ‘인문학 열풍’이 부는 한국 사회에 교육과 가르침의 본질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줄 것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