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북한이 보는 3·1독립운동
[3·1운동 100주년] 북한이 보는 3·1독립운동
  • 김동규 고려대 북한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19.02.2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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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고려대 북한학과 명예교수

3월 1일, 3·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리 정부는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기획하고 일본과 미국에서도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평양선언에서 북한의 김정일에게 남북한공동으로 3·1독립운동 합동기념행사를 개최하자고 구체적인 진행계획까지 밝히면서 합의를 요구했다.

당시 김정은은 건성으로 동의하는 것처럼 행동했으나 실제로는 수용 불가한 제안이었기에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가령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북한의 의도는 전혀 다른 하나의 대남전술의 하나일 뿐이다. 이러한 기초지식도 없이 이것저것 제안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태도이며 위험하다.

왜 그런가? 북한으로서는 1919년 3·1독립운동이 남한과는 전혀 다른 개념과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3·1독립운동은 김일성의 항일독립투쟁사에 비하면 조그마한 지류일 뿐 주류는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3·1독립 운동사를 부각시키면 김일성의 항일투쟁사가 훼손되고 북한 역사의 정체성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식하고 평가하는 3·1독립운동에 관한 문헌을 살펴보자.
 

북한에서  3·1독립운동은 김일성의 항일독립투쟁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3·1독립 운동사를 부각시키면 김일성과 북한역사의 정체성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하 인용문의 문법 및 단어는 원문 그대로임)

“3·1인민봉기때 <조선민족대표>로 자처하여 나선 33명의 부르죠아민족운동상층인물들인 손병희를 비롯하여 최린, 권동진 등 천도교상층분자들은 3·1인민봉기에 앞서 주체8(1919)년 2월 상순에 그리스도교 및 불교 단체와 <3파련합>을 형성하고 33명으로 되는 이른바 <조선민족대표>를 선출하였다.

스스로 <민족대표>로 자처하고 나선 이들은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론>에 헛된 기대를 걸고 청탁과 구걸의 방법으로 조선독립을 이룩해보려는 투항주의분자들이였다.

33인은 청년학생들과 애국적인인민들의 투쟁기세가 고조되자 그에 겁을 집어먹고 탑동공원에서 3월 1일 군중들이 참가한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한 약속을 줴버리고 그 전날인 2월 28일에 손병희의 집에 모여들어 쑥덕공론을 벌리였다.

이자들은 그곳에서 최린의 제의에 따라 <독립선언식> 장소를 명월관 (료리점) 지점인 태화관으로 옮길것과 학생대표들을 제외하고 저들끼리만 모이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독립선언식>을 계기로 반일봉기가 확대될수 있다는 것을 타산한데로부터 그것을 미연에 막고 독립운동을 저들의 의도대로 <청원운동>의 범위에 멈추어세우려는데 있었다.

33인은 3월 1일 당일에는 12시가 가까워오자 군중이 많이 모인 탑골공원으로가 아니라 태화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자들은 여기에서 오후 2시 먹자판을 벌려놓고 <독립선언서>조차 랑독하지 않고 불교대표 한룡운의 짤막한 연설에 뒤이어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스스로 전화를 걸고 자수하였다. 33인은 대부분 일제침략자들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2000년도 판, 조선대백과사전, 13권, 408)

북한, 3·1운동 인정하면 김일성 부정되는 딜레마

이처럼 의암 손병희를 비롯한 33인을 민족반역자로 매도하면서도 다른 문헌에서는 그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뜻밖에 ‘조선대백과사전’의 인물란에서는 의암을 “천도교의 교주로 서리집안에서 서자로 태여나 어려서부터 당대사회의 모순과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자랐다. …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북접통령으로서 전봉준과 합세하여 반침략투쟁을 진행하였으며…이른바 33인의 한사람으로 되었다.”(조선대백과사전, 14권, 379)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평가한 근거는 의암이 서민 출신이라는 것과 농민운동의 지도자라는 것 때문이다. 이것은 충무공은 누구보다 뛰어난 임진왜란의 명장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는 충무공이 양반계급의 출신이라는 이유로 폄하하고 있는 것은 평가의 절대기준이 계급사관에 따른 출신성분에 있음을 알게 된다.

북한의 <조선력사>에서는 “…리순신장군은 량반지주 출신으로 봉건지배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봉건국가를 위해 싸웠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조국해방전쟁 시기에 사회주의의 조국을 위하여 자기의 가슴으로 적화구를 막아 부대의 직격로를 열어놓은 애국자들과 비길 수 없다. (조선력사, 4권, 46쪽)

이처럼 역사를 민중사관에 의하여 평가하면서도 전국의 일반 국민이 봉기한 3·1운동을 경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김일성이 빠져 있고 장소가 평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의 모든 현대사는 김일성이 주인공이어야 한다. 그래서 북한은 3·1독립운동역사 관련 부분을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아들 김일성이가 평양에서 주도하면서 시작했다고 허구적인 묘사를 하고 있는 기록도 있다.

“…김형직 선생님께서 조직지도하신 조선국민회와 학교계, 비석계, 향토계에 망라되었던 200여명의 성원들이 앞장서서 대규모적인 반일봉기를 일으켰다.” “… 3·1인민봉기는 평양에서의 대중적인 독립만세 시위투쟁을 첫 봉화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때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원수님께서는 여덟살되시는 어리신 몸으로 반일시위에 참가하시어 삼십여리나 되는 평양 보통문까지 가시었다.” (2001년도 판, 조선대백과사전, 18권, 160)

따라서 북한 정권으로서는 김일성의 통치로부터 지금까지도 1919년의 3·1민족독립운동에 관해서만은 남한의 역사관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근원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즉 남한의 역사관을 인정하면 북한의 근현대사는 근본부터 무너지기 때문이다. 손쉬운 한 가지의 예를 들면, 1945년 8·15 광복사 부분에서 “…조선의 해방은 김일성장군님의 빛나는 승리가 가져다준 위대한 결실이었다.” (1983년 판,현대조선력사)라고 기록하고 있어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일본이 패망하자 한반도가 해방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조선 해방은 오로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의 결실로만 기술하고 있다. 이것이 소위 김일성의 ‘혁명전통론’이기도 하다.

혁명전통이란 김일성이 주도해서 1930년대 만주일대의 백두산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다는 빨치산 활동을 서술한 내용이다. 이것은 1970년대 ‘주체사상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까지는 김일성의 유일한 통치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일제에 항거해서 독립투쟁을 주도한 인물은 오로지 김일성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는 절대로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제2의 인물을 허용하면 북한의 역사를 전부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은 아무것도 모르고 지난해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올해 3·1절 기념행사를 공동으로 개최하자고 김정은에게 제안해 김정은도 그러자고 응답은 했으나 실제로는 가당찮은 일인 것이다. 남한의 프로그램으로는 소위 ‘희망열차’라는 기차로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달리면서 3·1운동 독립투쟁 유적지를 답사하고 100주년 기념행사도 같이 열자는 취지와 스케줄이지만 김정은에게는 전혀 마뜩치 않은 제안이었던 것이었다.

북한에는 3.1 운동관련 유적지나 시설이 없다.
북한에는 3.1 운동관련 유적지나 시설이 없다.

文정부 3·1절 남북공동행사 제안, 역사적 무지의 소치

당장 북한에는 3·1운동 관련 유적지도 없을 뿐더러 남한의 독립기념관과 같은 시설도 없다. 현재 북한에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관련되는 출판물과 기념물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에 대한 전적지 조성과 김일성과 김정일의 기념관과 동상, 흉상은 전국에 걸쳐 수없이 넘쳐나지만 3·1운동 관련 유적지의 기념비나 기념관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합동행사가 불가한 까닭은 자기들의 정체성에 어긋나는 짓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도 모르고 공동행사를 제안한 문재인 대통령의 무분별력과 역사 인식이 놀라울 뿐이다. 설사 대통령이 몰라서 그렇다고 해도 측근의 비서들이라도 조언을 했어야 했다. 386 운동권의 무식이 낳은 결과이다.

3·1절 남북 희망열차 이벤트는 무산될 수밖에 없지만 설사 북한의 전격적인 수용으로 시행된다고 해도 그것은 행사에 따른 물질적인 혜택이나 선전효과일 뿐 북한 정권의 숨은 음모에 의한 전술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속는 사람은 항상 속는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시사적인 이야기가 있다. 조선 이태조 때의 이야기다. 태조가 하루는 당시 국사(國師)로 곁에 있던 무학대사에게 ‘오늘은 심심하니 우리 서로 농담이나 주고 받세.’ ‘예 주상부터 해 보세요.’ ‘내가 보기에는 자네 얼굴이 꼭 돼지처럼 생겼네.’ 그러자 무학은, ‘그렇습니까. 저의 눈에는 어안이 꼭 부처님처럼 보입니다’라고 했다. 세상사는 모두가 자기의 마음가짐에 따라 외부의 사물이 보이게 마련이므로 결국 임금은 돼지가 되고 무학은 부처가 되므로 임금은 오늘은 내가 자네에게 졌다고 말했다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고사에서 얻는 교훈은 사기꾼은 세인들이 모두 사기꾼처럼 보이고 순진하여 속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선하고 착해 보여 속고 또 속는다는 사실이다. 속는 사람은 설마 이번에야 또 속이겠느냐고 상대방을 자기 마음처럼 여기고 다시 믿지만 그것은 자기의 마음이고 사기꾼의 마음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남한의 시각에서 항상 북한을 본다면 계속해서 속게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북한 정권의 본질부터 알고 대북정책을 수립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몇 십년간 북핵 문제를 두고 4자회담이 수없이 있었고 그동안 미국의 외교특사가 수차례 방북해서 비핵화 교섭을 했다. 결국 아무런 성과도 없이 원점으로 되돌아 간 사실은 미국이 북한 정권의 특성을 잘 몰랐다는 것과 서구의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으로 북한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즉 무학대사의 시각에서 만물을 보고 판단한 탓이다. 대북정책에서 유념해야 할 기본전제조건이다.

관점에서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남한에서만이라도 뜻있게 보내려는 계획으로 준비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북한에는 수많은 주요 국경일이 있지만 3월 1일에는 아무것도 없다. 북한 당국에 3·1절 100주년합동기념식을 제안한 문재인 대통령이 문제이다.

지금부터라도 올바른 대북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일부 친북적 시각의 의견만 청취하지 말고 다양한 견해를 가진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구하는 자세를 취해야 될 것이다. 경제실책은 수정회복이 가능하지만 대북정책은 국가의 존망과 직결되는 엄중한 문제이므로 쉽게 결정하고 실천하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고 본다. 공자의 명언 충언역이(忠言逆耳), 특히 정치인들에겐 자신의 미래 운명과 직결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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