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상해 임시정부는 기독교적 자유민주주의 국가 지향
[새롭게 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상해 임시정부는 기독교적 자유민주주의 국가 지향
  •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 승인 2019.04.03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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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가 오늘의 대한민국의 뿌리가 된다는 것은 헌법전문에 잘 나타나 있다. 3·1운동으로 나타난 2천만 조선인의 의사가 임시정부의 헌장에 구체화 되었고, 이것을 계승한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인 것이다.

3·1운동의 정신은 기미독립선언서 첫줄에 우리는 자주국임과 자주민임을 온 세계에 선언한다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염원이 단지 독립이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이 보다 구체화된 것은 바로 상해 임시정부 헌장이다. 물론 당시 상해 임시정부 외에도 여러 임시정부가 있었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의 원형은 바로 1919년 4월 11일에 만들어진 임시정부 헌장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요람, ‘상해 한인교회’

상해 임시정부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민족지도자들은 3·1운동을 준비하면서 임시정부를 만들고,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국제사회에 우리의 독립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에다 임시정부를 둘 것인가는 의견이 분분했다.

서울이 가장 좋은 장소이지만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고,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많은 한인들이 살고 있었지만 안전하지 않았다. 미국은 너무 멀고, 그래서 상해가 가장 적합했다. 특히 상해에는 프랑스 조계가 있어서 일본 경찰의 힘이 미치지 못했다.

상해 임시정부를 만든 주역은 누구였는가? 당시 상해에는 상해한인교회가 있었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들은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다음으로 국내의 민족대표들이 파송한 현순을 들 수 있다.

그는 감리교 목사로서 임시정부를 만드는 실무적인 일을 담당했다. 여기에 만주와 러시아 지역에서 많은 교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을 봤던 이들은 새로 세워지는 임시정부는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임시정부의 배후에는 미국의 대한인국민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한인국민회는 일찍이 한일병합 이후부터 교포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세워지기를 원했다. 안창호와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본받아 한반도에 민주공화국이 만들어지기를 원했다.

1919년 4월 7일 이승만은 기자들에게 임시정부의 수립을 앞두고, 조선은 동양에서 제일 처음 만들어질 예수교국이라고 했고, 같은 달 중순에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서는 새로 세워지는 임시정부는 미국의 정치제도를 본받아 기독교적 민주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시헌장에 담긴 기독교정신

이런 상황 가운데 1919년 4월 10일 저녁 10시에 모여 정식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임시의정원이 열렸다. 총 29명이 참석한 이 모임에는 기독교인이 11명, 대종교인이 7명으로 기독교인이 제일 많았다. 이 모임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임시정부의 각료를 선출하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국무총리에는 이승만, 살림을 총괄하는 내무총장에는 안창호, 민족의 당면과제인 국제사회에서 독립을 인정받는 일을 담당할 사람은 김규식이었다. 이들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따라서 1919년 4월 성립된 임시정부는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이어 이들은 임시헌장을 만들었다. 임시정부의 헌장에는 기독교적인(혹은 종교적인) 요소와 미국식 민주주의(혹은 자유민주주의)적인 요소가 잘 나타나 있다. 먼저 기독교적인 요소를 살펴보자. 임시헌장의 전문은 “신인일치(神人一致)로 중외협응(中外協應)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에 기반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독립은 단지 2천만 국민의 뜻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이다. 헌장 제7조는 “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意思)에 의하여” 건국되었으며, 그 사명은 “인류의 문화와 화평”에 기여하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선포문에는 대한민국은 “신(神)의 국(國)의 건설(建設)의 귀(貴)한 기초(基礎)”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神)이 곧 기독교적인 하나님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떤 학자들은 임시헌장의 신이 대종교가 말하는 신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1919년 2월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대한독립선언서에 보면 신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고, 황황일신(皇皇一神), 천인합응(天人合應), 상제(上帝) 등의 용어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임시헌장의 이 용어를 영어로는 “God”이라고 번역하고, 1919년 6월 10일 미주의 신한민보는 “하나님”이라는 명백한 기독교적인 용어로 바꿔 소개했다. 필자는 당시 임시정부 수립에 앞장섰던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대한민국의 기독교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범종교적인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또한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이 민주국가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임시헌장의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어떤 민주제도를 따르려고 했는가? 사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은 2·8독립선언서에는 앞으로 세워질 나라는 “선진 민주주의”를 모방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조소앙이 썼다고 믿어지는 임시헌장의 초안에는 새로운 나라는 “북미합중국의 정부를 방(倣)하여 민주정부를 채택함”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1919년 임시정부가 모델로 삼은 정부 형태는 미국식 민주주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 직전 조소앙은 중경의 미국 대사관을 찾아와 자신들은 40년 동안 “미국식 입헌주의를 위해 싸웠다”고 주장했다.

임시헌장과 그 다음에 만들어지는 임시정부의 헌장에 나타난 미국식 민주주의의 모습은 무엇인가? 첫째, 대한민국은 남녀, 빈부, 귀천, 모든 국민에게 주권을 인정하는 국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양반에게만 귄리를 부여하는 봉건제도도, 노동자와 농민만을 진정한 국민이라고 보는 사회주의도 부정하는 보통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둘째, 권력의 집중을 막고, 분권화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해서 1919년 4월 임시헌장에는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서 집행한다고 되어 있고, 9월의 새로운 헌법에는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분립을 주장한다. 이것은 모든 권력을 인민위원회가 갖고 있는 소련식 사회주의와는 분명하게 다른 것이다.

셋째,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임시헌장에는 신교의 자유를 시작으로 하여 소유의 자유를 주장하며, 이것은 9월 개정헌법에는 기업의 자유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임시정부 헌법은 신앙, 소유, 거래의 자유를 포함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요소와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다 같이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19년 임시정부가 헌법을 만든 다음에, 공산주의자들은 임시정부와 헌법을 사회주의적으로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김구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여기에 넘어가지 않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지켜왔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바로 이 법통을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이해 우리는 1948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출발을 축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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