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 3·1운동 지도자들, 기독교가 압도적으로 많아
새롭게 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 3·1운동 지도자들, 기독교가 압도적으로 많아
  •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 승인 2019.04.18 1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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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따라서 각종 언론들이 3·1운동에 관한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여 발표하고 있다. 분명히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3·1운동에 관한 연구는 한 차원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올해 새롭게 발굴된 자료들 가운데서도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KBS가 일본의 고서점에서 발굴하여 2월 25일과 3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특집 보도한 3·1운동 계보도이다. 전문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계보도는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가 1919년 3월 22일경 작성한 것으로 총독, 육군대신, 군 사령관 등에게 보고한 것이다. 이 계보도에는 140명의 이름이 나오고 있는데, 이렇게 대규모의 이름이 포함된 계보도가 발굴된 것인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번에 KBS가 발굴 보도한 3·1운동 계보도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조선총독부가 3·1운동의 계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현재 3·1운동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이런 해석들은 각각 그들이 갖고 있는 사상적, 종교적, 문화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3·1운동의 현장에서 가장 광범위한 정보를 소유하고 있던 조선총독부가 자신들이 3·1운동 가담자들을 취조하고, 여러 경로를 통해서 수집한 정보들을 종합해서 3·1운동으로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려고 만든 이 3·1운동 계보도는 1차적인 자료의 성격을 갖고 있다. 앞으로 이 자료에 대한 보다 치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필자는 이런 본격적인 연구 이전에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이 자료를 살펴보고, 총독부가 3·1운동의 윤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조선총독부가 만든 이른바 ‘3·1운동 계보도’를 KBS탐사보도부가 최근 일본 현지에서 최초 발굴하여 보도했다. / KBS화면 캡처
조선총독부가 만든 이른바 ‘3·1운동 계보도’를 KBS탐사보도부가 최근 일본 현지에서 최초 발굴하여 보도했다. / KBS화면 캡처

새롭게 드러나는 3·1운동 계보

먼저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을 천도교와 기독교가 주도해서 일으킨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도표는 천도교 측의 대표인 손병희(천도교주)와 기독교 측의 대표인 이승훈(기독교 장로)을 중심으로 계보도를 그리고 있다. 손병희는 천도교의 공식적인 대표이지만 이승훈은 기독교의 평신도의 한 직분인 장로로 표시되고 있다.

또한 손병희를 대수령(大首領)이라고 부르고, 이승훈을 기독교측 수령(首領)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천도교가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 작성을 비롯해서 전반적인 주도권을 행사하고, 아울러 재정적인 책임을 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 것 같다. 하지만 이 도표에 나와 있는 주요 인물들의 수를 비교해 보면 손병희 계열에 나오는 사람은 50명이며, 이승훈의 이름 밑에 나오는 사람은 90명으로 되어 있어 3·1운동의 주도층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더 많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계보도에 의하면 3·1운동의 주요 세력인 학생들은 이승훈과 더불어 기독교의 중요 인물인 박희도(감리교 전도사)의 지도 아래 있었다. 박희도는 동경 유학생들의 움직임을 듣고, 서울에 있는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을 불러 모아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이 학생들은 박희도의 지도를 따라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에 참여했다. 이 전문학교 학생들은 중학교 학생들을 모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게 했고, 자신들은 3월 5일 남대문에서 열린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의 또 다른 역할은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전국에 널리 확산시킨 것이었다. 이 계보도에 나오는 학생수는 22명으로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주로 승동교회와 정동제일교회에서 모였고, 대부분 기독교인으로 간주된다.

또한 총독부는 불교를 독자적인 세력으로 이해하지 않고, 천도교 휘하에 포함된 세력으로 이해하고 있다. 원래 3·1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가 주도해 진행되었는데, 여기에 천도교 측의 최린이 한용운을 포함시키자고 했고, 한용운은 그의 친구 백상규(백용성)를 가담시켰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불교를 독자적인 세력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최린과 연계된 천도교 내의 한 그룹으로 이해하고 있다. 아울러 이 도표는 한용운의 지시로 불교계 학교인 중앙학림(현 동국대학교)의 학생들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독립선언서를 경성과 전국 각지에 배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불교계의 총 숫자는 11명으로 천도교 총 50여 명에 포함되어 있다.이번에 발굴된 3·1운동 계보도는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을 다시금 확인해 주고 있다. 우선 기미독립선언서의 작성과 인쇄에 천도교가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고 있다. 천도교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최린의 주도 하에 최남선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했고, 이것은 천도교 출판사인 보성사를 통해 인쇄되었다. 또한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자금은 천도교에서 제공했다. 천도교 금융관장 노헌용에게 이승훈, 박희도, 함태영 등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금을 받아 사용했다.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이번에 발굴된 계보도는 기독교의 역할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더 광범위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우선 기독교 계열에는 90명의 관련자 명단이 나오고 있고, 여기에는 이승훈 직계와 박희도, 이갑성, 함태영의 활동으로 분류되고 있다. 특별히 이승훈의 활동 본거지인 평북 기독교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진다. 평북, 선천, 의주 기독교 인사들이 모두 20명에 이르고 있다. 박희도와 관련해 경기도 수원지역의 기독교인의 활동도 두드러진다. 여기에 비해 천도교 계열에는 50명이 나오고 있고, 여기에는 불교 11명, 기독교 측 9명, 기타 4명이 포함되어 있어서 순수한 천도교인은 30명도 안 된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는 모든 종교들이 함께 노력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기독교의 역할이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의 기독교 참여자들은 각각 각 지역에 연고를 갖고 있어 좀 더 구체적으로 3·1운동의 지역 확산에 기여할 수 있었다. 또한 기독교는 3·1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함태영은 1919년 2월 말 현순을 중국 안동현을 통해서 상해에 파견했고, 이것은 임시정부를 만들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1운동 당시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은 직접 참여하는 것을 망설였지만 선천의 매큔과 세브란스의 스코필드는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이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사 학계에서는 국내의 3·1운동이 천도교의 주도와 기독교와 불교 세력의 협력으로 이뤄졌다고 주장되고 있다. 하지만 3·1운동 당시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의 주도세력을 천도교와 기독교로 보고 있으며, 천도교는 독립선언서의 작성, 인쇄 그리고 자금면에서 공헌했고, 기독교는 3·1운동에서 학생동원, 지역확산과 국제여론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국내의 3·1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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