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정 기자의 역할은 욕받이 무녀였나
송현정 기자의 역할은 욕받이 무녀였나
  • 박한명 미디어비평가
  • 승인 2019.05.16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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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은 사라지고 기자만 남은 허무한 논쟁
박한명 미디어비평가·미디어연대정책위원장
박한명 미디어비평가·미디어연대정책위원장

지금은 옛 영광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지만 드라마왕국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인 2012년 MBC가 소위 대박을 쳤던 ‘해를 품은 달’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배우 김수현과 한가인이 주인공을 맡았던 시대극으로 시청률 40%를 넘나들 정도로 큰 인기를 끈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에는 시청자들의 눈을 잡아끈 내용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액받이 무녀’란 특이한 직업(?)이다.

‘액받이 무녀’란 임금에게 일어나는 흉한 일, 즉 액(厄 :재앙)을 대신 받아 왕의 액운을 없애고 자신은 그 액으로 인해 건강을 잃게 되는 무녀를 일컫는다. 이 드라마가 크게 인기를 끌자 영향을 받아서인지 몰라도 씨받이나 총알받이처럼 누구를 대신한다는 의미의 ‘~받이’가 붙은 욕받이와 같은 유행어도 더 자주 쓰였다고 한다.

느닷없이 옛날 드라마를 떠올린 건 문재인 대통령과 취임 2주년 대담을 진행한 송현정 기자를 놓고 벌이는 이상한 논쟁 때문이다. 이 대담에서 따져 물어야 할 문 대통령과의 문제투성이 회담 내용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엉뚱하게 기자를 도마에 올려 회를 뜨고 찜을 쪄먹는 흐름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상은 아니다.

도마에 올랐어야 할 대상은 기자가 아니라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담 이후 흐름은 어땠나. 대통령의 극렬 지지자들은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송 기자를 성토하는 청원을 올려대고 ‘대통령께 어떻게 독재자 따위의 표현을 쓸 수 있느냐’ ‘대통령을 바라보는 표정이 왜 그렇게 삐딱한가’ 하는 식의 융단폭격을 기자 한 사람에 가했다. 소위 말하는 ‘문빠’ 극렬 지지자들이 선봉에 서자 이낙연 국무총리가 “신문의 ‘문’자는 ‘들을 문(聞)’자다. 그러나 많은 기자는 ‘물을 문(問)’으로 잘못 안다”고 거들었고,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이 지켜야 될 라인을 삐끗했다”라고 한술 더 떴다.

송현정 논쟁이 보여준 얼빠진 사회의 단면

시간이 흐르면서 언론이 송현정 기자를 놓고 찬반으로 갈라져 논쟁하는 분위기는 더 심해졌다. 신문사 논설위원과 기자들은 대통령 답변이 아닌 기자의 질문과 태도를 비난한 극렬 지지자들을 나무랐고 지상파와 종편도 송 기자가 마치 뒷담화의 주제인양 다뤘다. MBN의 한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한 전·현직 정치인들이 “마치 문 대통령이 독재자인 것처럼 물어보면 안 된다. 저는 그 대목에서 굉장히 불편했다.(정청래)” “문 대통령 지지층에게는 질문에 성역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이 생긴 것 같다.

지지층이 오히려 대통령을 망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 같다.(하태경)” “충신 입장에는 불편했을 것-국민의 반이라고 할 수 있는 야당의 주장을 대신 물어봐준 것(정두언)” 등으로 주고받은 논쟁을 보면, 대통령에게 물었어야 할 핵심 내용들이 모조리 빠져 있다는 사실에서 최근까지 지속되는 송현정 논란은 얼빠진 우리 사회의 단면을 고스란히 증명해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 대통령 취임 2주년 대담 이후 벌어진 송현정 논란에서 필자는 KBS 공영노조 외에 그날 대담 문제점과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지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언론탄압의 문제와 언론 관심에서 사라진 드루킹-김경수가 공모한 대선여론조작의혹사건, 김태우 수사관의 폭로, 신재민 전 사무관 의혹, 대통령 딸 다혜씨의 해외이주 사건, 아들 문준용씨 취업 의혹, 손혜원 의원을 둘러싼 여러 비리의혹, 사법부 독립문제, 패스트트랙에 올라탄 선거법 개정과 공수처 신설, 검경수사권 조정 문제 등 대통령에게 국민이 꼭 듣고 싶은, 반드시 들었어야 할 질문을 하지 못한 그날 대담의 실패 문제를 분명히 지적한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KBS 보도, 부실경영 등 온갖 문제가 터져도 입을 다물고 있던 양승동 사장도 송현정 기자 논란이 가라앉지 않자 최근에 한마디 했다. 요컨대 이번 논란을 KBS의 성장통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송 기자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본인도 부담스러워한다. 내용 자체에 포커스가 가야 하는데…오늘 아침 보니 ‘기자는 칭찬받는 직업이 아니다’라는 글을 봤는데 많은 분들이 이해해주실거라 믿는다. 국민 60%가 한국 언론을 불신하고 있다는 통계를 봤다.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성장통으로 생각하겠다(15일 KBS 운영진 기자간담회)” 일부 사람들은 그날의 특별대담을 짜고 친 고스톱으로 폄하한다. 그렇건 아니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물어야 할 것을 묻지 못한 물렁한 기자 한 명이 의도치 않게 문 대통령에게 향한 국민의 불만과 비판을 대신해 ‘욕받이’ 역할을 한 덕에 문 대통령이 위기를 극복했다는 사실이다. 문 대통령의 액운을 없앤 것일까. 중앙일보의 한 중견기자는 최근에 꽤 인상적인 칼럼을 썼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 2주년에 폭스뉴스 앵커로부터 들었던 노골적인 질문들을 예시로 들었다.

“러시아·중국·베네수엘라의 독재 지도자들이 당신의 언어를 인용해 언론을 탄압하고 있지 않으냐.”(월러스) “오바마 대통령도 폭스뉴스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우리 보고 ‘국민의 적’이라곤 안 했다.”(월러스) KBS의 성장통으로만 남은 이번 결말이 아쉬울 뿐이다.

박한명 미디어비평가·미디어연대정책위원장(전 미디어펜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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