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를 보는 눈 ] 천안문 사태와 종교 탄압
[ 시대를 보는 눈 ] 천안문 사태와 종교 탄압
  • 이종윤 미래한국 상임고문. 한국기독교학술원 원장
  • 승인 2019.06.1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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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올해 두 가지 중요한 기념일이 겹쳐 있다. 하나는 5·4운동 100주년이고, 다른 하나는 천안문 사건 30주년이다. 5·4운동은 한국의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중국 근대화운동의 출발점이고 천안문 사건도 일정 부문 5·4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1989년 북경의 천안문 광장 시위(중국에서는 6·4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30주년을 맞아 세계 도처에서 잇따른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해 4월 15일을 시작으로 학생들과 시위자들은 언론의 자유와 민주화를 부르짖으면서 북경 천안문 광장에 모였다.

유사한 시위들이 중국 수백개의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었으므로 시위 가담한 학생수를 약 100만 명 정도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소비에트연방과 공산정권들을 무너뜨리는 유사한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어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시위들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 중국공산당 리더인 덩사오핑(1904-1997)은 시위대에 대해 무력 진압을 명령했다.

군대가 시위대에게 발사 명령을 개시한 1989년 6월 3~4일에 얼마나 많은 시위대가 사망했는지 역사가들은 의견이 분분하다. 미국 정부는 약 1만 명의 학생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지만 중국공산당은 경찰과 병사 23명을 비롯해 몇 백 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이종윤 미래한국 상임고문. 한국기독교학술원 원장
이종윤 미래한국 상임고문. 한국기독교학술원 원장

서구 학자들은 천안문 시위 원인에 대해 오랫동안 논의해 왔다. 덩사오핑의 경제 개혁이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고 자본주의 경제가 중국의 민주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낳았다. 그러나 만연된 부패는 부를 소수의 손에 집중시켰고 어떤 민주화도 뒤따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식인들과 학생들 특히 억압 속에서 불길같이 확장일로에 있던 가정교회 성도들이 성경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인권은 신이 주신 권리 즉 신권(神權)임을 자각하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마침 소련과 동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황도 한 몫을 한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천안문 사태의 일반적 설명들은 경제 요인과 민주주의 운동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으나 천안문 사태와 종교 사이의 중대한 연결고리가 있었다고 인지하는 이는 거의 없다.

중국 정부가 인정한 삼자운동(three self Movement) 참여 교회 외에 가정교회들은 온갖 핍박과 규제 속에서도 퍼져나가 마침내 천안문 사태 당시 시위대로 참가한 학생들 중 상당수가 가정교회 소속 기독교인들이었고 천안문 사태 이후 가정교회는 부흥에 큰 힘을 얻어 성장했다.

가정교회 사역자들을 배출하는 신학교가 도처에 세워졌고 그 당시 필자의 졸저도 중국어로 번역 출판되어 신학교 교재로 사용되고 있었다. 덩샤오핑의 개혁들은 문화혁명 이후 이뤄졌으며 이 개혁운동에 희망을 걸고 봤지만 천안문 사태를 잔혹하게 억압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중국공산당의 이데올로기에는 환멸을 느끼고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기독교 신앙 귀의자가 증가했다.

홍콩의 Jonathan Chaw 박사는 대륙의 10% 이상이 기독교인이라는 통계 발표를 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막측하여 한국처럼 중국도 민주화와 인권회복뿐 아니라 복음박해국에서 복음선교국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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