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수기] 6·25 진실을 북한에서 알았을 때의 느낌
[탈북수기] 6·25 진실을 북한에서 알았을 때의 느낌
  •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
  • 승인 2019.07.11 1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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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날 신비하게도 새벽 4시에 깨어났다. 문득 포격 속에 전쟁 일어난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고요한 새벽에 누구나 혼비백산, 아니 그 전에 사라진 이들도 수두룩하겠다.

북한에서 6·25는 꿈속에서 물어도 미제와 남조선 괴뢰가 일으킨 전쟁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기초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남조선의 거짓말이 있다.

신성모 국방장관의 ‘(북침하여) 아침은 해주,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 발언 때문이다.

이 말이 수록된 남조선신문자료를 제시하며 매일같이 선전교육하는데 믿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자가 될 정도이다. 한편 ‘수령님은 이걸 예비하셔 1-2km까지 쳐들어온 침략자를 일거에 쳐부수고 3일 만에 적의 수도를 점령한 것은 역사에 없는 기적을 창조한 천재적 군사가’로 우상화 시킨다.

이러한 믿음의 여파는 탈북인들이 남한에 와서도 상당한 기간 자리 잡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필자는 의외다. 북한에서 6·25 진실을 알게 되었고 그 여파로 탈북 결심을 최종 결심했으니 말이다.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

북에서 삐라로 알게 된 6·25의 진실

6·25 진실을 처음 아는 순간 나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튀어나와 놀랐다. ‘수령님’하면 나도 모르게 흠모의 눈물 보이던 충성분자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어버이로 믿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반대로 어버이를 죽인 원수라고 느꼈다고 할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공산주의는 증오의 철학으로 운영된다. 북한 공산주의는 그 증오의 원천을 6·25에서 기본 뽑는다. 우리 민족 역사에서 그리고 현대에 이 만큼 죽고 파괴된 것이 없는 원한을 잘도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그 대표적 증오의 박물관이 황해도 신천에 있다.

청년비서(사로청위원장)로서 3번이나 청년들을 이끌고 방문했다. 국가적으로 학생, 군인 등 전 인민을 견학시켜 증오를 고취시킨다. 신천 박물관에 들어갔던 날은 밥을 못 먹을 정도로 끔찍한 학살 참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시작부터 미국의 침략 역사, 그 시초인 미국 선교사 만행을 보여준다.

결국 전면전인 6·25 침략으로 히틀러보다 더 잔혹한 학살을 했다는 김일성의 교시가 전시관 첫 머리에 붙어 있다. 이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그 반대의 진실 앞에 저절로 육두문자가 튀어 나왔다.거짓말을 해도 어느 정도이지 이런 새빨간 거짓말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이다. 이걸 모르고 미국과 남조선을 증오하며 이를 박박 가는 ‘공화국’ 사람들을 깨우쳐야 한다.

어쩌면 통일이 안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증오가 사라지면 통일은 자연히 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옳은 말 한마디에 죽어야 하는 세상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말할 수 있는 곳으로 나와 그곳에 보낼 수 있는 말인 대북풍선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대북풍선에 의한 삐라가 나를 6·25 진실을 알게 한 단초를 제공했기에 더 그렇다.

내가 성인이 되어 처음 본 ‘남조선 삐라’는 1990년 8월 강원도 철원 대전리에서였다. 북한사람들은 삐라를 못 보게 하니 더 보고 싶어 한다. 나 역시 출장을 연기하면서까지 샅샅이 뒤져 봤다. 그 중 머리에 꽂힌 것이 6·25전쟁이었다. 침략당한 북한이 오히려 3일 만에 서울 점령한 것이 이상했다.

북한 주장 일변도의 전사기록을 봐서는 뻔한 것이고 하여 진실을 알기 위해 방법을 고안해냈다. 6·25 초기 참전자, 38선과 신천 대학살 현장 주민을 조용히 만나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생각해보지 않고 산 것이 문제였는데 이것을 새기게 한 것이 삐라라는 데 그 의미가 크다.

6·25 초기 참전자의 말 - “나는 과학원연구소 화부였는데 중국 팔로군 출신이다. 6·25 전야 조선족만 뽑아 인민군으로 배치된 자신의 부대는 양양, 속초계선이다. 새벽 4시에 포격을 하고 달려 들어가니 국군은 빤쯔바람에 죽고나 도망가더라.”

38선 주민의 말 - “아침은 해주, 점심은 평양 하던 국군은 어디 가고 땅크를 앞세운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나가는 것만 보았다.”

신천 대학살 현장 주민의 말 - “주 전선이 아닌 신천에서 미국놈은 코빼기도 못 보았다. 대학살은 좌우익 주민 간에 학살의 악순환으로 일어난 것이다.”

6·25 현장인들의 생생한 증언 앞에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6·25전쟁 당시 대북전단
6·25전쟁 당시 대북전단

평화통일로 가는 길

새빨간 거짓말로 우상화하고 증오하게 만든 김 부자에 대한 분노는 먼저 얘기했고 다음 답답하기 그지없는 것은 남조선이었다. 삐라만 제대로 보냈다면 북한 사람들이 저렇게 속아 살지 않겠는데 말이다. 그마저 6·15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보내지 않는 것은 어이가 없다. 저기서는 유일독재를 위해 여기서는 인기를 위한 정치끼리의 잔치 상에 제물일 뿐이다. 2000년 첫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북한이 가장 내세운 첫째 조건이 대북방송과 삐라를 보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실망과 도전을 받아 아무 것도 없는 탈북자로서 나서게 되었고 특허를 낼 만큼 개발해 민간인도 할 수 있도록 보편화시켰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들어서 막아나서는 행태를 부린다. 핵과 미사일은 늘어난 것뿐임에도 아직도 그들과 대화해서 푼다고 한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2000년 첫 정상회담 때 말했다.

“북한의 변화는 김 부자가 아니라 그 주민을 각성시킬 때이다.”최근 태영호 전 외교관도 “북은 핵을 놓지 않는다. 놓는다고 해도 위장한다”고 했다.통일의 주체는 북한 주민이다. 정보유입을 통해 그들을 깨우쳐야 한다. 김일성의 머리였고 김정일의 스승으로 북한의 사상을 만든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3만 탈북인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한 북한 문제들은 요원한 것이다.

6·25 때와 판이하게 통일의 여건은 너무 좋아졌다. 남북한 국력은 하늘땅처럼 뒤집어졌고 소련, 중국도 북핵 제재에 손을 드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이 남한의 통일의지와 통일주체로 향한 올바른 대북정책뿐이다.

보수우익도 제발 6·25 때처럼 적화 당한다는 못난 소리를 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래서 평화공존해야 한다는 좌파진보에 좋은 빌미를 제공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이는 머리가 아니라 꼬리를 때리는 싸움이니 언제나 선수를 잃는 것이다.

북한에 비해 수 백 배의 국력을 가진 현실임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통일로 이끌어야 한다. 북한 주민을 향한 정책을 왜 하지 않느냐고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한편 6·25 전범자, 평화교란자를 돕는 이적행위를 촛불 이상으로 규탄해야 한다. 이렇게 꾸준히 하다보면 서독 이상으로 주도권을 쥐고 평화통일로 가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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