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 항일 공산주의자들이 꿈꾼 국가
새롭게 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 항일 공산주의자들이 꿈꾼 국가
  •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 승인 2019.07.11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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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임시정부의 역사를 논하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당시 소련의 볼셰비키혁명이 얼마나 여기에 관련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일부 좌익 역사가들은 3·1운동이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즉, 볼셰비키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과정에서 민족자결주의를 말했고 이것이 조선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볼셰비키혁명과 이동휘의 한인사회당

우리는 여기에서 민족자결주의의 형성 과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넬라 하버드대 교수는 원래 민족자결주의는 1차 세계대전 중 슬라브민족의 독립운동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 뒤 1917년 2월(이하 이 지역을 설명하는 경우 러시아력을 사용) 소위 온건 좌파인 케렌스키가 러시아제국을 공격하면서 자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더 이상 주변의 약소민족을 지배하지 않고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거해 그들의 독립을 도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러시아제국 내의 많은 약소 민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같은 해 10월 급진 좌파인 레닌이 부르주아적인 케렌스키파(멘셰비키)를 몰아내고 소위 볼셰비키혁명을 이룩했다. 레닌은 민족자결주의를 마르크시즘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를 만들고, 이것은 식민주의를 만들기 때문에 진정한 민족자결을 위해서는 민족을 초월해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계급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은 민족자결주의를 자본주의에서의 해방으로 이해했다.
 

1920년 12월 상해 임시정부를 방문한 이승만을 환영하는 이동휘와 안창호 선생.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의 목적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계급 해방이며 자본주의타도였다.
1920년 12월 상해 임시정부를 방문한 이승만을 환영하는 이동휘와 안창호 선생.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의 목적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계급 해방이며 자본주의타도였다.

이미 알려져 있듯이 러시아에 정착해서 살고 있던 한인들 가운데 귀화인들은 케렌스키를 지지했고 비귀화인들은 볼셰비키를 지지했다. 후자는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이동휘였다. 이동휘는 구한말 계몽운동과 의병운동, 그리고 기독교 전도에 힘쓴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한일병합 이후에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본은 항상 그를 주목했고 이동휘는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는데 이곳에서 러시아 관원에게 친 독일 스파이로 몰려 7개월 옥살이를 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볼셰비키를 만났고 그들의 도움으로 10월 혁명 직후 석방되었다. 이후부터 기독교민족주의자였던 이동휘는 볼셰비키와 함께 사회주의 혁명에 나서게 되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혁명이 성공하자 그 영향이 곧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도 볼셰비키 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1918년 초부터 이런 볼셰비키의 영향은 제동이 걸렸다. 즉 볼셰비키혁명의 확산을 우려한 일본이 자국민 보호라는 명목으로 이곳에 진주해 구세력을 지원하고 있었고 여기에 서부전선에서 체코군이 오고 있었으며 영국, 캐나다 등 연합군이 여기에 가담했다.

이렇게 극동의 상황이 급변하자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여운형과 접촉을 하게 되었고, 결국 볼셰비키의 도움으로 1918년 봄 비귀화 한인들을 중심으로 한인사회당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한인사회당은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고, 구체적으로는 일체의 계급을 타파하고, 토지와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교육과 의식주 및 노약자는 국가가 책임진다는 것이다. 이들이 원하는 국가는 바로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소비에트를 모델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인사회당의 활동에는 제약이 많았다. 우선 이 지역은 볼셰비키가 장악하고 있지 못했고 연합국의 영향이 아직도 강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귀화인들이 중심이 된 전로국내조선인회의는 볼셰비키의 주장보다는 미국 중심의 서방세계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특별히 이것은 1918년 11월 독일이 미국에 항복을 하고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면서 대부분의 한인들은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기를 원했다. 이런 흐름이 만들어낸 것이 대한국민의회이며 이 모임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기독교민주국가를 선호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상해임시정부와 같은 방향을 갖고 있었다.

소련의 볼셰비키는 이런 연합국의 흐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연합국이 파리에 모여 새로운 국제질서를 논의하고 있을 때 여기에 맞서 자신들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추구하고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난 바로 그 다음 날 소위 제3인터내셔날(코민테른)이 형성되었고, 여기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란 “기껏해야 식민지 노예제를 상표변경한 것에 불과”하다고 규정하고, “프롤렐타리아 독재정권의 출현만이 아시아, 아프리카의 식민지 노예 제군의 해방의 때”라고 선언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은 일본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신뢰할 수 없으며 소련식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동휘는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주도세력은 아니었다. 이동휘의 목적은 대한국민의회에 한인사회당의 영향력을 확대해 언젠가는 사회주의 정부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

상해임시정부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 국제연맹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는 민주공화국을 꿈꾸고 있었다. 이것은 미국, 일본, 중국 심지어 러시아의 교포들까지 동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한인사회당이 꿈꾼 소비에트 공화국

이동휘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1919년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2회 한인사회당 회의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조선인 근로대중의 정신상, 육체상의 정상적인 발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 압제 및 자본주의적 착취로부터 조선을 해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2. 일본 및 조선의 근로대중의 이해가 서로 연관을 갖고 있으며, 일본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압제가 그들에게 동일하게 고통을 주는 점을 고려한다면, 양국의 혁명단체들 간의 긴밀한 연관은 불가피하다.

3. 조선이 자본주의적인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에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와 고농을 조직하고, 그들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정신으로 교양하며, 그들의 자본에 대한 일상투쟁을 지도해야 한다.

4. 1890년대에 농민봉기 형태로 나타난 우리의 고유한 혁명의 경험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혁명 경험에 따라 (우리)당은 소비에트권력을 합목적적 권력 형태로 간주한다.

여기에 의하면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지 민족의 독립이 아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계급 해방이며 자본주의의 타도였다. 그러기 위해서 소비에트식의 정부를 세우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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