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보는 3·1운동과 임시정부...."우리 헌법의 기원은 대한민국 임시헌장"
새롭게 보는 3·1운동과 임시정부...."우리 헌법의 기원은 대한민국 임시헌장"
  •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 승인 2019.07.25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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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일부 인사들은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은 미국이 한국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신들의 정치체제를 이식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들은 한반도는 오랫동안 봉건 사회에 속해 있다가 1910년 일제에 강제 병합되었고, 36년 동안 식민지 생활을 하다가 1945년 갑자기 해방되었는데, 이런 한반도에 미국은 강제로 자신들의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이식해 1948년 대한민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한에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은 우리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대국 미국의 의사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대한민국은 ‘낯선 나라’인 것이다. 일부 인사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필자는 1948년 대한민국의 수립에 있어 미국이 미친 영향을 부정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민주국가인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공산주의를 이기고 남한에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국회 로텐더홀에 걸린 대한민국임시헌장
국회 로텐더홀에 걸린 대한민국임시헌장

그것은 우리나라를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려고 하는 생각은 개화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개화와 더불어 서구 민주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소망은 대한제국 시대에도, 일제 강점기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해방과 더불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1948년 7월 제헌헌법이 만들어졌으며, 그 기초 위에 수립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개항 이후 한국인들이 꿈꿨던 나라이며, 해방 후 민족주의자들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공산주의와 싸워 만든 것이다.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가 100주년 되는 해이다. 3·1운동의 상징인 기미독립선언서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선포한 것이라면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새로 세워지는 국가의 설계도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를 해 왔지만 우리가 어떤 국가를 세우려고 했는가에 대해서는 깊게 논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1919년 4월 11일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헌장에는 당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담아 새로운 국가의 기본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과거의 전제국가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이었다. 1948년 7월 17일 선포된 대한민국 제헌헌법은 궁극적으로 1919년 4월 11일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계승한 것이다. 그래서 제헌헌법 전문에는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대동단결선언 임시헌장의 배경인가

그러면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어떤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가?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역사적인 배경을 1917년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에서 찾고 있다. 대동단결선언은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던 사회주의 혁명을 보면서 만들었다.

1915년 1차 세계대전 초기에 이상설과 함께 독일과 연계하여 일본과 싸워 고종의 복위를 주장했던 신한혁명당의 주동자였던 신규식은 1917년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고, 사회주의가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희망을 본 것이다. 대동단결선언은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과 고종이 주권을 국민에게 양도하였고, 국민은 해외의 교포들에게 주권을 양도하였다는 주권양도설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대동단결선언은 두 가지 점에서 대한민국 임시헌장과는 다르다. 첫 번째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도 민족자결을 내세웠지만 그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의 윌슨이 민족자결을 외쳤을 때 세계는 여기에 환호했다.

1919년 3·1운동과 그 결과로 만들어진 임시정부는 바로 이런 윌슨의 새로운 체재에 근거하고 있다. 두 번째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주권양도설과 같은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는다. 임시헌장은 국민의 천부적인 권리를 존중하는 서양적인 민권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황제로부터 양도받은 것도, 해외의 교포들에게 위임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임시의정원의 의원들이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국내 각도의 대표자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미주 한인사회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3·1운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면 3·1운동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3·1운동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전후 세계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원래 독일 중심의 주축국과 영국 중심의 연합국의 싸움으로 시작되었던 1차 세계대전은 1917년 미국이 연합국 측에 가입해 연합국의 승리로 기울게 되었고,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미국에 항복해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질서로 재편되고 있었다. 3·1운동과 임시정부는 바로 이런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면 미국은 어떻게 세계질서를 재편하려고 했는가?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인 것이다. 윌슨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미국은 “전쟁을 끝내는 전쟁”을 하기 위해 참전한다고 주장했다. 다시는 전쟁이 없는 세계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윌슨은 전쟁은 강대국이 약소국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식민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런 식민지 정책은 서구적인 민주주의 정신을 무시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통치자는 피통치자의 동의에 기초해서 통치해야 하는데, 강대국이 약소국가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식민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약소국은 불만을 갖게 되고, 여기에서 전쟁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없애고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는 길은 바로 민주주의의 근본원칙,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민족의 자결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윌슨에게 있어서 민족이라는 말은 국민, 혹은 시민이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이것이 서구민주주의, 혹은 자유민주주의의 기초인 것이다.

윌슨의 이런 민족자결주의를 가장 먼저 이해했던 사람은 바로 이승만이었다. 그는 일찍이 선교사들로부터 서구민주주의를 배웠고,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만민공동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미국으로 유학 가서 당시 프린스턴대학 교수였던 윌슨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이승만은 하와이에 머물면서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승만과 더불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가장 열렬히 환영했던 사람들은 바로 미국의 교포들이었다. 이들은 미국에 가서 민주주의의 진수를 보게 되었고, 자신들의 조국도 바로 이런 국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이들은 대한제국의 멸망을 보면서 대한인국민회를 만들어 앞으로 세워지는 나라는 제국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그 근본정신은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그 근본정신은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이다.

임시정부 미국 주도 국제질서 선택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미국에 항복하자 미주의 교포들은 윌슨 대통령에게 승전축하전보를 보냈다. 여기에서 한인교포들은 이번 승리는 미국의 것이며, 이 승리로 말미암아 “세계가 다 같이 평등 자유를 얻고, 온 세계 인종이 민주주의 시대를 성립할 줄 믿는다”고 말했다.

11월 21일자 신한민보는 1차 세계대전의 승리는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규정하면서 앞으로 “윌슨 대통령은 위대한 미국을 표본으로 하여 이 세계의 신시대를 창조할 것”이라고 적었다. 다시 말하면 국제질서가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 세계로 재편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국제질서 가운데 독립을 얻기 위해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을 대표로 선출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만들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어떤 세계질서를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당시 세계에는 하나의 질서가 사라지고, 두 개의 질서가 등장하고 있었다. ‘사라지는 질서’는 소위 황제 중심의 제국주의 질서였다. 독일, 오스만 터키, 러시아의 황제는 이미 물러났고, 일본은 천황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구시대의 질서였다. ‘등장하는 질서’는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 질서와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질서였다.

하지만 아직 소련을 중심으로는 공산주의는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고 혁명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아울러 구 러시아제국의 야망을 본 많은 나라들은 그들이 말하는 민족해방을 신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을 때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불러왔다. 그래서 이집트, 인도, 중국, 한국에서 대규모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현상은 미국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에 기초하고 있다. 1919년 6월 29일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전 세계 모든 국가들 중에서 미국이야말로 현명하고, 선하고, 훌륭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은 굳이 다른 나라의 땅을 강탈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정의로울 수 있다. 미국은 청산해야 할 구원(舊怨)이 없기 때문에 공정할 수 있다. 미국은 돈이 많기 때문에 관대할 수 있다.” 윤치호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한국을 해방시켜 줄 수 없다고 생각했음에도 미국에 대해서 깊은 호의를 갖고 있었다.

1919년 4월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모인 파리평화회의, 그리고 이것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국제연맹의 설립과 관련해 이해해야 한다.

당시 수없이 만들어진 각종 청원서는 바로 윌슨과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것이며, 온 민족이 가진 가장 큰 관심은 파리에 간 대표들의 활동이었고, 초기의 모든 문서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만들어지는 나라는 국제연맹에 가입해 서구 민주주의의 질서 안에서 활동하겠다는 것이었다. 3·1운동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대한민국은 바로 이런 세계 질서의 재편 가운데 만들어진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미국식 정부

그러면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구체적으로 어떤 국가 형태를 구상했는가? 당시 신해혁명 이래 중국에서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헌법은 자신이 모방한 헌법을 명기했다. 조소앙이 작성했다고 알려진 가헌법(假憲法) 초안 제1조는 “조선공화국은 북미합중국의 정부를 방(倣)하여 민주정부를 채택함”이라고 되어 있다.

이 초안은 상해의 기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영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제1조는 “The Republic of Korea adopts a democratic Government after that of the United States”(대한공화국은 미국의 정부를 모방하여 민주정부를 채택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 초안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수정되었는데, 사실 민주공화제란 미국식 정치제도를 말하는 것이다. 국가제도는 전제와 공화제가 있고, 공화제에는 귀족제와 민주제가 있는데, 미국의 정치제도는 민주공화제였다. 사실 한국인들은 고종의 퇴위로 전제제도가 무너지면서 민주공화제를 지지했고, 특히 이것은 미국 교포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났다. 조소앙은 자신의 안은 “북미합중국 정부를 모방했다”고 설명했다.

필자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북미 한인교포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현순에게 4월 7일 “조선은 미국의 제도 및 동일한 정신 아래 기독교독립국을 건설한다”라는 전보를 보냈다. 1919년 4월 중순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서 “한국인의 목적과 갈망”이라는 선언서를 채택하였는데, 그 1조가 정부는 그 피통치자로부터 나온 권력에 기초해야 하며, 그러므로 정부는 그가 다스리는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고 되어 있고, 제2조는 “우리는 가능한 대로 미국의 정부 형태를 따른 정부를 가질 것을 제안한다”(We propose to have a government modeled after that of America as possible as.)라고 되어 있다. 이 제2조의 내용은 조소앙의 초안 1조와 거의 유사하다.

임시헌장이 미국의 정치제도를 모방했다는 것은 여운형의 조서에서도 입증된다. 여운형은 1929년 일본 경찰의 신문조서에서 여러 차례 임시정부의 수립은 미국 교포들의 주장에 따른 것이며,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이 열리고 있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안창호가 멀지 않아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안창호가 미국에서 오기까지 임시정부는 잠정적인”것으로 하여 조직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여운형은 신문조서에서 두 차례에 걸쳐 임시헌장은 “미국과 프랑스의 각 헌법에 의거하여 공화정부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과 더불어 프랑스 헌법을 고려했다는 것은 당시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으며, 아울러 임시정부가 프랑스 조계에서 열리고 있다는 현실을 고려했다고 본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침묵하거나 무시했다. 윤대원은 그의 <상해시기대한민국임시정부>(2007)에서 조소앙의 초안과 4월 11일 선포된 헌법을 비교하는 표를 제시하면서도 조소앙이 북미합중국의 헌법을 모방했다는 언급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신우철은 ‘중국 제헌운동이 상해 임시정부 헌법 제정에 미친 영향’(2004)이라는 논문에서 조소앙의 이 같은 분명한 조문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구미각국의 헌법을 참고했을 가능성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중국에서 만들어진 헌법에 보면 그들의 헌법 대강에 자신들이 모방하는 나라의 헌법을 열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왜 이런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는가

이것은 대한민국 헌법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서희경의 <대만민국 헌법의 탄생>(2012)과 박찬승의 <대만민국 헌법의 탄생>(2013)에서도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대동단결선언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을 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나 미국의 헌법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논의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1919년 독립운동의 전반적인 상황을 살펴본다면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미 미주 한인들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것을 보면서 이제 세계는 미국의 민주주의로 재편될 것이라고 봤고 일본에서 1919년 2월 발표된 2·8선언은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범(範)을 수(隨)”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진국이란 미국을 비롯한 서구국가를 말함이 분명하다. 따라서 3·1운동 이후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해 서구식 민주주의를 지향했다는 것은 당시의 흐름에 비춰 본다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당시 사회주의자들과 소련의 관계를 살펴볼 때 이해할 수 있다. 먼저 볼셰비키 혁명직후 1918년 이동휘를 중심으로 소련의 도움을 받아 한인사회당이 만들어질 때, 이들이 내건 강령 가운데 제1조는 “사회주의 국가를 조직한다”였고, 파리 강화회담이 실패로 돌아가고 1920년 이동휘가 소련과 접촉해 200만 루불의 원조금을 받으면서 맺었다고 알려진 한러비밀조약에는 “노농정부와 전 세계 인류가 요구하는 공산평등주의를 동양에 선전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에 찬동하고, 공동보조를 취한다”고 되어 있다.
 

조소앙, 그는 누구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조소앙이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기존의 학설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기존의 많은 학자들은 조소앙이 1917년 대동단결선언이나, 1919년 여름 유럽의 사회당에 참여한 사실, 그리고 후에 삼균주의를 주장한 사실 등을 들어 조소앙이 사회주의적인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시에 조소앙은 그 뒤에서 한 번도 공산주의에 가담한 일이 없으며, 1948년 남북협상 때 단독선거를 반대했지만 나중에 이것을 철회하고 대한민국 건국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깊이 연구해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조소앙은 이미 일본 명치대학에서 서구정치제도를 연구했다. 당시 명치대학은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소개했다. 또한 조소앙은 미국과도 상당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조소앙의 형은 조용하로 일찍이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1910년 한일병합이후 잠시 총독부에서 경기도 지역의 군수를 하다가 이것을 버리고 상해를 거쳐 1916년(대정 5년) 이승만을 찾아 미국 하와이로 가서 이승만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이때 가족을 상해에 남겨 놓았다. 그는 미국에서 각종 노동으로 돈을 벌어 상해의 가족에게 보냈고, 그 일부는 조소앙에게로 전해졌다. 다시 말하면 조소앙이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에 있었던 그의 형이 후원해 줬기 때문이다.

해방 후 조소앙은 임시정부 외교부장으로 1945년 8월 31일 중경의 미국 대사관을 방문해 자신들을 “미국식 입헌주의를 신봉하며, 지난 40여 년 간 한국의 자유를 위해서 싸운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1919년 4월 11일 제정 발표한 임시헌장의 가장 중요한 골격은 무엇인가? 사실 임시헌장은 겨우 10개조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갑작스럽게 제정되었다. 따라서 1919년 5월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한 다음에 보다 본격적으로 헌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이것이 1919년 9월 11일 만들어진 임시헌법인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임시헌장의 주요 내용을 임시헌법과 연관하여 몇 가지로 설명하겠다.

첫째,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임을 밝혔다. 여기에서 민주공화제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이 되는 그런 정치제도를 말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국민은 누구인가? 임시헌장이 말하는 국민은 대한민국의 남녀, 귀천, 빈부의 모든 사람을 말한다. 특별히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모든 계급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봉건 양반계급도, 당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노동자와 농민의 계급도 다 같이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은 대한제국과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도 구분된다.

둘째,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대한민국이 통치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대의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인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와는 구분된다. 서구민주주의의 근본은 통치자는 피통치자의 동의에 기초해야 하며, 이것은 국민의 대표를 통해서 표현된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국내 각도와 해외교포들의 대표자들로 의정원을 구성했다. 이런 의정원은 노동자와 농민의 대표로 구성된 공산주의의 인민대표자대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셋째,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입법과 행정을 분리시켜 권력의 집중화를 방지했으며, 임시헌법은 이것을 발전시켜 삼권분립을 공포했다. 임시헌장 제2조는 임시정부는 의정원의 결의에 의해서 통치한다고 설명하여 권력을 분산시켰고, 임시헌법 5조는 입법권은 의정원이, 행정권은 국무원이, 사법권은 법원이 갖는다고 명시하였다. 이런 삼권분립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핵심 내용이며, 이것으로 독재를 막을 수 있다. 여기에 비해 공산주의는 인민위원회가 입법, 행정, 사법의 모든 기능을 다 갖고 있어 필연적으로 독재로 나갈 수 밖에 없다.

넷째,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개인의 기본권을 명시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우리가 독립국임과 동시에 자주민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독립을 원하는 이유는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이것을 지켜 주는 국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개인의 기본권은 3·1 운동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다. 임시헌장은 이것을 종교의 자유를 필두로 하고, 소유의 자유를 마지막으로 하여 설명하고 있다.

임시헌장은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종교의 자유를 언급하고 있다. 아울러 소유의 자유를 천명하여 국가가 함부로 개인의 사적 소유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임시헌법은 여기에 덧붙여 영업의 자유까지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이 조선 사람의 경제활동을 제한하는 것에 반대하여 공평하고, 자유롭게 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같은 종교의 자유와 소유 및 영업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및 시장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1948년 대한민국 헌법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은 해방 후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은 이미 개항기부터 공화국을 꿈꿔 왔고, 이것은 3·1운동과 임시정부를 가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대한민국 임시헌장이다.

그 근본정신은 대한민국은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이며, 이런 국민의 의사는 대의민주주의를 통해 나타나며, 권력은 삼권분립이라는 상호견제를 통해 행사되어야 하며, 어떤 국가권력도 개인의 기본권, 즉 종교의 자유와 개인의 사적 소유권과 영업권을 함부로 제한할 수 없다는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은 1919년 제정된 임시헌장의 기본정신을 따르고 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모진 풍파를 견디며 만들어졌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지자 곧 바로 소련의 국제공산당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을 후원하고, 자금을 제공하여 임시정부를 사회주의정부로 만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김구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자들은 이것을 막아냈고, 여기에 미주 한인들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해방 후 소련은 다시 한 번 한반도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1948년 5·10선거로 새롭게 세워진 국회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여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수립하였다. 이렇게 해서 1919년에 잉태한 대한민국이 1948년 출산하게 되었다.

올해는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이 된다. 그리해서 많은 기념행사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임시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것을 기념하는 제헌절 행사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임시정부가 중요하다면 그것을 계승한 정식 정부는 얼마나 중요한가?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 본 기사는 필자가 2019년 4월 27일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제73회 정기논문발표회(주제 : 교회와 민족: 과거, 현재, 미래)의 주제 강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미친 영향’의 일부를 수정·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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