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韓·日을 동맹급으로 이끈 나카소네 총리
[심층분석] 韓·日을 동맹급으로 이끈 나카소네 총리
  • 고성혁 미래한국 군사전문기자
  • 승인 2019.12.1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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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가 지난 11월 29일 향년 101세로 별세했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80년대 미·소 냉전 시절 레이건 미국 대통령, 대처 영국 총리 그리고 헬무트 콜 독일 총리와 함께 자유진영을 이끈 지도자였다.

특히 나카소네 전 총리는 한국과의 관계를 준 동맹급으로 끌어 올린 인물이다. 우리 국민은 새카맣게 잊고 있지만 나카소네 총리가 결정한 대한(對韓) 경협 40억 달러 제공은 80년대 한국이 제2의 도약을 하는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나카소네 총리는 한국이 공산세력으로부터 일본을 방어하는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한 총리이다. 그의 이 같은 생각은 1983년 1월 실행에 옮겨졌다.

총리 취임 후 가장 먼저 한국을 방문 국가로 택했다. 기자들이 한국을 첫 방문지로 택한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한·미·일 세 나라가 함께 손잡고 태평양 국가로 돌진하자는 것이 나의 외교 전략이었다”고 답한 바 있다. 당시에는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이끄는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는 등 그 팽창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였다.

1983년 한일 정상회담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나카소네 총리.
1983년 한일 정상회담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나카소네 총리.

나카소네 총리는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는 한·미·일 삼각안보체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는 한국 정치인들과도 친근한 관계를 유지했다.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 김종필 전 총리와도 막역했다, 야권 정치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가까웠다. 1981년 5공 전두환 정권이 내란음모 혐의로 김대중 사형 판결을 내렸을 때 나카소네 총리는 일본에서 감형 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의 역대 총리 가운데 나카소네 총리는 한국을 가장 잘 이해했던 지한파(知韓派) 총리로 통했다.

현재 문재인-아베 사이에 한일관계는 최악이다. 그러나 80년대 전두환-나카소네의 한일관계는 가장 밀접하고 협력이 잘 되던 시기였다. 나카소네 총리는 1982년 11월 27일부터 1987년 11월 6일까지 3차례 연임으로 일본 총리를 역임했다. 한국의 5공 전두환 정권 시기와 대부분 겹친다. 80년대 한일관계는 말 그대로 안보-경제 협력 동반자의 시대였다. 요즘처럼 한일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 전두환-나카소네 한일관계는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1979년 12·12 사태로 실질적 권력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에게 경제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1980년 경제의 마이너스 성장은 신군부를 옥죄었다. 특히 1979~1980년 이란사태로 말미암아 국제유가는 3배나 폭등했다. 2차 오일쇼크는 한국경제에 설상가상으로 덮쳐왔다.

연평균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하던 한국경제는 1980년에는 1956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2.7%로 곤두박질쳤다. 국제유가 급등, 1980년 냉해로 인한 대흉작, 국내정치 불안과 겹치면서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소비자 물가는 1980년 32.2%, 1981년 21.5%로 초 인플레 상황이었다. 경상수지 적자는 79년 41.5억 달러, 80년 56.9억 달러로 급증했다. 무역적자가 총 수출액의 30% 가까운 시기였다.(통계청 자료)

5공화국 출범과 동시에 전두환 정부는 산업합리화 조치 등으로 산업구조개편에 나섰다. 점차 정치적 안정을 기함과 동시에 전두환 정부는 초긴축 재정을 펼쳤다. 가장 먼저 물가안정을 경제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새로운 산업 육성도 절실했다. 외자 도입은 필수였다. 1981년 전두환 정부는 그 돌파구를 일본에서 찾았다. 전두환 5공 정부는 일본에 대해 ‘안보무임승차론’으로 압박했다. 마치 현재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 방위비 분담 요구를 하는 것과 비슷한 형식이었다.

1981년 4월 23일 노신영 외무부 장관은 스노베 료조(須之部量三) 주한 일본대사를 갑자기 불렀다. 노신영 외무장관은 현행 일본의 한국에 대한 협력 금액을 10배로 늘려 연간 20억 달러, 이를 향후 5년간 총 100억 달러를 제공해 달라고 통보에 가까운 요구를 했다. 전두환 정부의 논리는 ‘한국이 군사력을 유지면서 공산권세력을 막고 있으니 결국은 일본을 지켜주고 있다. 일본은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스즈키 내각에서 미온적 반응을 보이자 1981년 8월 공로명 외무차관보가 일본 측에 보다 구체적으로 요구했다. ▶첫째, 한국은 국방비 부담이 과대하다.(GDP 6% 국방비) ▶둘째, 새롭게 경제5개년계획을 추진할 예정인데 군사비 부담 때문에 차질이 생겼다. ▶셋째, 거의 200억 달러나 쌓인 대일 무역적자를 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한마디로 협박에 가까운 요구였다. 일본은 안전보장의 측면에서 ‘무임승차’를 했으며, 한국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겨온 만큼, 한국이 군사비 부담을 줄여 경제발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돈을 내놔야 한다는 것이다. 대일(對日) 무역역조 시정 요구까지 덧붙인 것이다. 일본에 요구한 금액은 무려 100억 달러였다. 이것은 1965년 한일국교수립 당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의 청구권 협정보다 그 정도가 더 했다.

전두환 정부가 일본에 대해 무리하게 보일 정도로 압박에 나선 배경에는 미국이 있었다. 1981년 2월 전두환은 대통령 당선자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로널드 레이건과의 한미정상회담에서 전두환은 강력한 안보동맹을 내세웠다. 한국은 태평양에서 자유진영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일본은 한국의 군사안보적 역할에 협조해야 한다면서 한국에 거액의 원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에 동조했다. 전두환의 주장은 시기적으로 딱 맞아 떨어졌다. 레이건이 표방한 강력한 미국 건설에 동반자로서 동맹의 역할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월남전 패배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카터 행정부는 소련의 아프간 무력 침공에도 무기력했고, 테헤란 미국 대사관 점령에도 속수무책이었다. 카터에 질린 미국 유권자는 강력한 미국 건설을 표방한 레이건을 압도적으로 당선시켰다.

레이건 대통령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미·일 삼각 안보협력 체제의 구축이 중요하다는 것에 인식을 같이 했다. 게다가 미국 역시 일본에 대한 무역적자 문제가 경제의 화두로 대두되던 시기였다. 경제문제와 안보문제 두 가지 모두 한국과 미국의 입장이 딱 맞아 떨어졌다. 레이건 행정부의 이러한 인식은 한국에 힘을 실어 줬다.

그러나 스즈키 내각은 거절했다. 전두환 정부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대중 내란음모 재판으로 사형선고까지 내린 것도 전두환 정부에 대한 불신감으로 작용했다. 스즈키 내각은 전두환 정부가 주장하는 ‘안보 경협’ 논리를 반박했다. 일본은 주일미군의 주둔비용을 부담하면서 한국의 후방을 지원하고 있다는 논리였다. 이 때문에 1981-83년 사이 한•일 양국의 가장 큰 외교문제는 전두환 정부가 요구한 100억 달러 ‘안보•경제협력차관’이 핵심 과제였다.

그러나 1982년 11월 나카소네 내각이 들어서면서 급진전을 이뤘다. 나카소네 내각은 한국 정부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다. 물론 미국의 입김도 작용했다. 1983년 1월 나카소네 총리가 현직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면서 일괄 타결되었다. 1983년부터 1989년까지 7년간에 걸쳐 18억5000만 달러, 일본 수출입은행 융자 21억5000만 달러 등 총액 40억 달러가 ‘안보·경협차관’으로 한국에 제공됐다. 차관(借款)보다 더 큰 수확도 있었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반도체 생산 설비 수출을 승인한 것이다.

그동안 일본 기업은 정부 탓, 일본 정부는 기업 소관이라면서 시간만 끌고 있던 사안이었다. 그래서 1983년부터 삼성은 64KDRAM 개발을 본격 추진할 수 있었다. 미국 레이건 행정부도 일본에 대해 안보분담을 요구했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의 소련 극동함대의 동향 추적 감시에 일본 자위대가 보다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었다.

이른바 SEA LANE 방어에 일본 해상자위대가 적극적으로 임하게 한 것이다. 특히 소련 극동함대의 주 통로인 쓰시마 해협, 쓰가루 해협, 소야해협에서 소련 잠수함의 이동 감시 추적이 그 핵심이었다. 이것이 확대되면서 미국은 일본에 ‘1000해리 전수방어’를 요구하게 된다. 나카소네 총리는 세계사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한국과 함께 보다 적극적으로 미국과 공조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안보협력 속에 1983년 9월 1일 사할린 상공에서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 공군기에 격추되자 일본은 소련공군 감청자료를 미국에 제공했다.
 

19080년대 냉전 시절 서방자유세계를 이끈 지도자들. 1985년 독일에서 열린 G7 정상회담 모습. 왼쪽부터 대처 영국 총리, 헬무트 콜 서독 총리, 레이건 대통령, 나카소네총리, 멀로니 캐나다 총리.
19080년대 냉전 시절 서방자유세계를 이끈 지도자들. 1985년 독일에서 열린 G7 정상회담 모습. 왼쪽부터 대처 영국 총리, 헬무트 콜 서독 총리, 레이건 대통령, 나카소네총리, 멀로니 캐나다 총리.

일본을 제대로 알았던 한국 정치인과 기업인들

한국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정치인이 있었다. 박정희, 김대중, 김종필, 박태준, 전두환, 권익현 한일의원연맹 회장, 이병철 삼성 회장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일본을 제대로 알고, 협력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용했던 이들이었다. 1965년 한일국교 수립 당시 일본의 원로 정치인들은 한국의 젊은 장교 출신 혁명세력들에 대해 ‘유신지사’의 풍모를 느꼈다는 말이 있다. 그들의 당돌함(?)함이 일본 정치인들에게는 ‘어필’된 듯싶다. 박정희 정권은 어찌 보면 일본을 제대로 ‘이용’ 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시기 김대중 역시 일본을 이용(?)했다. 1972년 가을 김대중은 고관절 치료를 위해 일본에 가 있는 동안 한국에서 유신헌법이 통과되었다. 김대중은 일본에서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선포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번 계엄령 선포는 반민주적인 조치이다. 나는 민주적 자유를 원하는 조국의 동포들과 더불어 기필코 박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저지할 것이다.” 김대중은 귀국을 미룬 채 일본에 머물면서 박정희 정권을 상대로 반독재 민주화투쟁 전면에 나섰다. 일본어가 유창했던 김대중은 일본말로 한국의 ‘유신체제’를 강력하게 성토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때나 김대중 사형판결 때 오히려 김대중을 적극 옹호하고 구명활동을 했던 이들은 바로 일본의 정치인들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친일파’라는 단어가 ‘반일매도’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우파에서조차 일부는 일본 정치인을 말할 때는 접두어처럼 ‘극우’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을 잘 알고 일본을 이용할 줄 알았던 정치인들이 이제는 없어서일까?

겉으로 드러난 정치인 외에 막후에서 한일관계를 훌륭하게 조율한 인물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일본의 세지마 류조(瀨島龍三)다. 그는 나카소네 총리가 대한(對韓) 경협차관 40억 달러 제공을 결정하는 데 숨은 조력자다. 당시 일본 재계에서는 한국이 적화되면 일본도 위험하다는 불안감에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언론에서는 세지마 류조를 ‘현해탄의 밀사’라고 부른다. 중요한 시기마다 세지마 류조가 한국과 일본을 연결했기 때문이다. 1990년 월간조선 8월호에는 전두환과 세지마 류조의 만남을 이병철 회장이 연결한 것으로 나온다. 1980년 3월경 이병철 회장이 세지마 류조에게 “한번 조용히 한국에 와서 전두환, 노태우 장군에게 좋은 충고를 해주었으면 한다”면서 “경제관계의 문제도 있을 것이니 도큐(東急) 그룹의 고토(五島昇) 회장과 동행해주었으면 한다”고 요청하고 같은 해 6월 두 사람은 서울에 와서 신라호텔에서 권익현 씨의 안내로 전두환 노태우 두 장군을 만났다는 것이다.

세지마 류조의 조언으로 한국에서 무역 종합상사 설립이 구체화 되는 과정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1974년 이낙선 상공부 장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세지마 씨는 ‘한국에서의 종합상사 설립에 대한 계획서’를 제출했다. 이듬해 정부는 국내기업의 건의서와 ‘세지마 계획서’를 참고해 ‘종합상사 지정요령’을 공포, 종합상사 중심의 수출전략을 채택했다. 1975년 상공부는 삼성물산과 현대종합상사, LG상사, 대우인터내셔널, 효성물산 등 7개사를 종합상사로 지정했다.

세지마 류조는 이병철 회장과도 절친이었다. 삼성물산이 종합상사로 탈바꿈할 때 이병철 회장의 부탁으로 세지마 류조는 이토추상사의 부장급 4명을 삼성에 파견해 무역 업무를 도와주기도 했다. 70년대 한국 정치인에게 일본 대하소설 ‘대망’이 필독서였다면 80년대 기업인들에게는 일본 소설 ‘불모지대’가 필독서였다.

소설 ‘불모지대’의 실제 모델이 바로 세지마 류조였다. 당시 삼성 임직원은 ‘불모지대’를 읽고 독서발표회도 가졌다고 한다. 1986년 월간조선 9월호는 세지마 류조에 대해 자세하게 보도했다. 세지마 류조에 대한 첫머리는 “나카소네의 제갈량으로 국가 재편성에 참여, 일본 보수화의 책사 역할을 하면서 한일간의 새 파이프라인으로서 권익현·박태준·이병철 인맥을 창구로 하여 원대한 대한(對韓)작전을 펴고 있다”고 말한다. 1983년 1월 나카소네총리 방한 전 먼저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사전 조율한 인물이 바로 세지마 류조였다.
 

1973년 8월 8일 일본에서의 김대중 납치사건은 일본 정치권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 중의원 의회도 한국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같은해 11월, 김종필 총리는 방일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사진은 납치사건 직후 기자들과 만난 김대중 씨 / 연합
1973년 8월 8일 일본에서의 김대중 납치사건은 일본 정치권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 중의원 의회도 한국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같은해 11월, 김종필 총리는 방일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사진은 납치사건 직후 기자들과 만난 김대중 씨 / 연합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vs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일제시대 36년이 끝난 후 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는 일본과 협력 속에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의 먹거리 산업인 자동차, 조선, 전자, 반도체 기술 대부분이 일본에서 전수된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은 과거 제국주의 군국주의 국가가 아니고 자유민주 선진국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본에 대한 인식이 일제시대 제국주의 일본관에 머물러 있다. 왜 그럴까? 민족감정, 역사교육과 인식, 정치권의 선동 등이 복합된 결과다. 무엇보다 현재 한국인 대부분은 일본을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일제식민지 원흉’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거의 대부분 이토 히로부미를 꼽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에게는 철천지 원수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일병합의 실질적 원흉은 이토 히로부미라기보다는 야카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라고 하면 ‘그 사람이 누구지?’ 또는 ‘뭐하는 사람이야?’라고 반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좌)와 이토 히로부미(우)
야마가타 아리토모(좌)와 이토 히로부미(우)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조슈번 출신이다. 조슈번은 막부 타도의 선봉으로서 메이지유신을 이끌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징병제를 실시해 근대 일본 육군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일본제국 육군 원수이자 내각총리대신을 두 번 지낸 인물로 이토 히로부미와는 사실상 정적(政敵)관계였다.

야마가타는 군부 강경파의 수장이기도 하여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사실상 ‘한일합방’은 야마가타의 주도로 추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마가타는 일찌감치 한일합방을 주장했지만 번번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막혔다.

왜냐하면 메이지 천황의 절친이었던 히로부미의 말을 메이지 천황이 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병합’을 오히려 반대했었다. 실질적으로 한반도를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마당에 구태여 ‘합방선언’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토 히로부미의 생각이었다. 러시아를 자극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야마가타 계열의 강경파 입김이 세졌다. 일본제국 군부는 조속히 한일합방 선언을 하고 본격적으로 만주 대륙으로 진출을 주장했다. 그들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러시아 눈치만 보는 겁쟁이’라고 조롱했다. 결국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통감에서 물러났다.
 

1983년 삼성전자 64K DRAM 개발 생산 성공 기념식에서 축사하는 이병철 회장. 일본의 반도체 생산 설비 관련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삼성전자
1983년 삼성전자 64K DRAM 개발 생산 성공 기념식에서 축사하는 이병철 회장. 일본의 반도체 생산 설비 관련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삼성전자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맺었던 가쓰라 다로(桂太郞) 총리,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은 더 이상 이토 히로부미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옥죄고 있었다. 사실상 날개가 꺾인 히로부미는 메이지 천황을 설득해 러시아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떠났다.

바로 그곳에서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그 결과 야마가타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군부세력은 한일합방을 급진전시켰다. 더 이상 방해꾼이 없기 때문이다. 1910년 8월 29일 그렇게 한일합방이 선포되고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대부분의 학생들과 일반인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보통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임진왜란과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에서 고착되어 있는 듯하다. 해방 후 74년인데도 아직도 1945년 시점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좌파의 ‘친일·반일 프레임’은 자신들의 ‘종북’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반대로 우파에 대해 ‘친일’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목적이다.

문제는 우파 역시 ‘친일 반일’ 프레임에 스스로 갇혀 있다는 것이다. 설령 일본에 극우 정치인이 있다손 치더라도 국가 안보와 외교에서는 경중을 따져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위협을 주는 것이 무엇이냐는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그것이 무시되고 일제식민지시대의 시각 그대로 오늘날 일본을 보는 것은 하등 우리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과 일본은 모두 우리 민족을 침략했다. 현재도 마찬가지라고 했을 때 과연 중국과 일본 중 어느 나라가 대한민국 우리의 우방이고 적이냐 하는 문제다. 일본은 미국의 우방이자 서방선진 민주주의 사회다. 반대로 중국은 북한의 혈맹이자 공산체제다.

현실적으로도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다. 그런데도 중국에 대해서는 아무 말 못하는 것이 한국 정치권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냉철히 판단해야 한다. 기시 노부스케가 외조부인 아베 총리와 방어 목적의 사드 배치에 대해 ‘대한민국에 미국 미사일이 설치되면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면서 위협하는 중국 대사 중에 우리는 누구를 더 경계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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