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한국논단] 잊혀진 범죄, 재일교포 북송 60년
[미래한국논단] 잊혀진 범죄, 재일교포 북송 60년
  • 김태훈 미래한국 편집위원· 한반도 인권통일 변호사모임(한변) 회장
  • 승인 2019.12.1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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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일은 60년 전인 1959년 같은 날 재일교포 975명을 태운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新潟)항을 출발하면서 북송사업이 시작된 날이다. 이후 1984년까지 25년간 180차례에 걸쳐 9만3000여 명의 재일교포들이 ‘지상의 낙원’을 약속받고 귀국한다며 북한으로 갔다. 그들은 대부분 남한 출신이어서 북한에는 혈연도 지인도 없었다. 이들 ‘귀국자’들 가운데 6730명은 일본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배우자를 포함한 일본 국민이었다.

북한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4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를 창립하고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대안적 교육과 고용 증진을 위해 일본에 학교, 기업과 대학을 설립했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240만 명가량의 재일교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조총련’에 연대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북한이나 한국 중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을 때 재일 북한 국민으로 등록하겠다고 결정함으로써 지상 낙원 혹은 귀국 선전 운동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지상 낙원이라 일컬어지던 북한은 조총련에 의해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일을 하고 필요에 따라 재화와 (교육, 의료와 같은) 서비스를 제공 받는 곳으로 묘사되었다. 북한은 일본에 비해 많은 광물자원과 식량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생산성의 측면에서 볼 때 곧 많은 분야에서 일본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북한은 흔히 ‘노동자의 천국’이라고 불렸다. 당시 일본은 여전히 2차 세계대전 패배에서 회복하는 중이었고 불충분한 식량공급으로 많은 이들이 빈곤 속에 살고 있었다. 일본에서 거주하던 한인들의 상당수는 차별로 인해 일본인들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거의 10만 명을 북한으로 이주하도록 유혹했던 ‘이러한 꿈의 건설’에는 조총련뿐만이 아니라 일본 당국도 가세했다.

북한으로 넘어갔던 이들은 청진항에 당도했을 때 일본과 비교하여 훨씬 더 낙후한 사회기반시설과 생활수준을 보고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북한은 6·25전쟁의 폐허에서 회복하기 위해 허덕이고 있었다. 그들은 노동력, 기술, 생산 시설뿐만 아니라 원자재도 부족한 상황이었으나 김일성 집단은 정책적으로 노동력 및 기술 착취 등을 위해 이런 캠페인을 고안해내 자국을 지상 낙원이라 속였던 것이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일본 니이카타에서 북송된 재일 교포가 9만 3340명에 달한다고 보도한 AFP통신.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일본 니이카타에서 북송된 재일 교포가 9만 3340명에 달한다고 보도한 AFP통신.

北의 ‘지상낙원’에 속은 재일교포들

귀국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가혹한 현실은 단지 기초적인 생활환경이나 수당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 인생의 자기 결정권을 잃게 되었다. 도착한 날로부터 그들이 어디에 거주할지, 어디서 일할지, 무엇을 먹을지, 누구와 어떻게 이야기할지에 대한 결정이 명령되었다.

이동에 제한을 받았고, 감시당했으며, 서로 감시하도록 조장되었다. 일본의 가족들에게 보낸 우편물은 확인 및 검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호화된 모호한 메시지 등을 통해 북한에서 직면한 그들의 난관과 어려움을 일본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검열의 두려움 때문에 편지 속에 표현할 수 없었던 솔직한 감정을 사전 협의를 해 놓은 대로 우표의 뒷면에 적어보내기도 했다.

위와 같은 소식과 함께 일본에 있는 가족들은 재화와 돈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계속되자 아직 일본에 남아 북한을 꿈꾸던 한인들은 북한에서의 삶의 전망에 대해 우려하게 되었다. 이는 일본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북한으로 유입되던 흐름을 멈추게 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북한 당국은 ‘귀국자’들과 일본에 있는 가족들 간의 접촉을 극히 제한했다.

북한으로 떠나기 전 3년 후에는 일본을 방문해 가족들을 만나게 하겠다며 ‘일본인 아내들’에게 했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귀국자들은 점점 심하게 감시당하고 고통 받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대다수가 자신의 의지에 반한 채 북한에 억류되어 구금당한 셈이 되었고, 그들이 남기고 떠난 가족들에게 더 이상의 접촉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들은 북한에서 최하위 계층인 ‘적대계층’에 속하게 되어 극심한 차별을 받았다. 북한은 그들 자유의 박탈에 대한 인정을 완전히 거부하고 이렇게 실종된 사람들의 생사와 행방에 대한 정보를 외부에 제공하지 않았다. 국제기구나 가족 구성원들의 수많은 정보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이로써 북한 당국은 한국 등이 피해자들에 대해 국제법적 보호를 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유엔 인권 기구들이 국제법상의 권한에 따라 그들을 보호할 수 없도록 했다.

북한 최고 지도자인 김일성 및 그의 후계자 김정일, 김정은을 포함한 북한 당국은 그동안 국제 언론매체 등을 통해 전달된 피해자 가족들의 간절한 공개 호소를 인식하지 못할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당국은 지금까지 수십 년에 걸쳐 국제기구들, 강제실종 관련 국가나 가족들의 문의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거나,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정보만을 제공하는 정책을 시행해왔다.

이와 같이 북한은 최고위층인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수립한 정책에 따라 1959년부터 1984년까지 25년간 10만 가까이의 재일교포들을 일본에서 북한으로 유인한 후 억류해 60년이 되는 지금까지 가족을 비롯한 외부 세계에 그 생사 여부를 알려주지 아니하고 있는 바, 이는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가 2014년 밝힌 바와 같이 국제형사법상 반인도범죄인 강제실종에 해당한다.

조총련은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주도했다. 사진은 2018년 조총련 24차 전체회의 모습. / 조총련 홈페이지
조총련은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주도했다. 사진은 2018년 조총련 24차 전체회의 모습. / 조총련 홈페이지

북송교포 강제실종은 반인도적 범죄

2002년 7월 1일부터 발효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관한 로마규정’ 제7조 제2항 자목은 국제형사법상 반인도범죄에 해당하는 ‘강제실종’을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① 국가 또는 정치조직에 의하여 또는 이들의 허가·지원 또는 묵인을 받아 사람들을 체포·구금 또는 유괴할 것, ② 그 후 그러한 자유의 박탈을 인정하기를 거절하거나 또는 그들의 운명이나 해방에 대한 정보의 제공을 거절할 것, ③ 그들을 법의 보호로부터 장기간 배제시키려고 의도할 것

위와 같은 현대적 의미의 강제실종에 해당하는 행위들이 비인도적 행위에 해당하고 반인도범죄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1940년대 말 뉘른베르크 재판 때부터 인정되어 왔다. 따라서 북한과 그 지도부가 1959년부터 자행한 재일교포들에 대한 거짓말에 의한 유인과 송환거부의 사례들은 반인도범죄를 구성하고 이것은 국제형사법상 소급적용 금지 원칙에 반하지 않는다.

이들에 대한 강제실종은 먼 과거의 범죄가 아니다. 그것은 피해자들의 생사와 행방이 완전히 공개되어야 끝나는 지속적인 범죄이다. 따라서 자유의 박탈에 대한 인정을 부인하고 피해자들의 생사와 행방에 대한 정보공개를 지속적으로 거부하는 북한 최고지도자와 관료들은 그들이 본래 납치유인 혹은 구금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어도 반인도범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

비록 60년 전부터 시작된 범행의 피해자 상당수는 자연적 혹은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을 수도 있지만 법적인 관점에서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계속 진행 중인 범죄의 본질을 바꿀 수 없다. 강제실종의 경우 범죄가 완전히 공개되기 전에 피해자의 사망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흔한 일이고, 만약 실종된 사람이 확실히 사망했으면, 당국은 최선을 다해 실종 상황을 설명하고 또한 피해자들의 가족들이 감정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유해를 가족에게 송환해야만 계속 진행 중인 범죄를 끝낼 수 있다.

김태훈 미래한국 편집위원·  한반도 인권통일 변호사모임(한변) 회장
김태훈 미래한국 편집위원· 한반도 인권통일 변호사모임(한변) 회장

북한에서 국가적으로 이렇게 엄청난 범죄가 지금까지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모욕이다. 이 범죄들은 당장 멈춰야 한다. 이것이 지체없이 이행되도록 보장하는 것이 북한의 의무이고, 북한이 이를 실패했을 경우 국제공동체의 책임이 된다.

이태경 재일북송피해가족협회 회장은 일본이 고향인 북송 재일교포 1세들은 현재 북한에 만 명 정도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북한을 전문 취재하는 아시아프레스의 이시마루 지로(石丸次郞) 오사카 사무소 대표는 북송됐다가 탈북한 재일교포와 그 자녀를 약 500명으로 추정하고 이 중에서 200~300명이 일본에 정착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지속해서 일본인 납치자 문제 해결은 강조해오면서도 북송 재일교포에 대한 문제는 외면하거나 덮고 있다. 북송 당시 북한이 생지옥인 줄 몰랐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비밀 해제된 국제적십자사 문서에는 일본 정부의 거짓과 기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일본 정부가 북송을 결정할 당시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는 “남조선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국제적십자사의 협력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했다고 한다. ‘북송 사업’에 인도주의라는 포장지를 씌운 것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아버지 고이즈미 준야(小泉純也) 당시 자민당 의원은 ‘재일조선인 귀국협력회’의 대표위원 자격으로 북송 선동의 핵심 역할을 했고 일본의 좌파 지식인과 모든 언론이 한 편이 됐다.

일본 정부뿐 아니라 법원도 이들의 피해 구제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2018년 8월 재일교포 북송 사업으로 북한으로 건너갔다가 탈북한 피해자 5명이 김정은 정권을 상대로 일본 법원에 총 5억 엔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북한이 ‘지상낙원’이라고 속인 ‘귀환 사업’에 참가해 인권을 억압당했다”며 일본 법원에 호소한 것이다.

피해자들은 일본에서는 2009년 제정된 ‘대(對)외국 민사(民事)재판권법’에 의해 북한은 미승인 국가로 ‘국가면제’를 받을 수 있는 외국에 해당하지 않아 재판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 북한이 사기행위로 재일교포를 데려간 후 출국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일종의 납치이기에 민법상 불법행위 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 일본도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관여한 잘못과 그에 맞는 책임을 인정해야 하고 한국 정부도 이 점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김용옥이라는 사람은 그의 신간에서 김정은에 대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서 조총련의 재일교포 북송(北送)에 대해서도 “북송선에 전혀 강제성은 없었다”며 “냉전 체제에서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국가로 민족 대이동이 이뤄진 유일한 사례”라는 망발을 하고 있다.

더 한심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2월 1일 이 책을 읽었다면서 국민에게 홍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 대통령의 이러한 어이없는 언동은 그가 최근 발생한 초유의 북한 선원 2명에 대한 강제 북송 사건에서 주된 책임자였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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