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저글러, 땜장이, 놀이꾼, 디지털 세상을 설계하다.... 세상을 바꾼 괴짜 천재의 궁극의 놀이본능
[리뷰] 저글러, 땜장이, 놀이꾼, 디지털 세상을 설계하다.... 세상을 바꾼 괴짜 천재의 궁극의 놀이본능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20.02.2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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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흔히 정보화시대라고 말한다. 디지털 컴퓨터, 이메일, 유튜브 동영상 등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디지털 세상에 가장 중요한 이론적, 실질적 기여를 한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모든 디지털 컴퓨터의 밑바탕에 깔린 기본 개념을 제시한 클로드 섀넌을 들 수 있다. 클로드 섀넌은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명한 석사학위 논문”으로 디지털시대의 기초를 마련한 천재 수학자이자 과학자이다. 최초로 0과 1의 2진법, 즉 비트(bit)를 이용해 문자는 물론 소리·이미지 등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디지털의 아버지”이자 미국 전자통신시대의 서막을 연 인물로 일컬어진다.

클로드 섀넌이 오늘날 지구를 결속하는 정보 아키텍처의 입안자 중 한 명임에도 인지도에서는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자신이 세간의 주목을 싫어한 이유도 있지만, 그의 업적과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기술의 괴리감에도 문제가 있다. 세계 정상급 공학자들은 하나같이 “오늘날 고속데이터통신을 가능케 한 선진 기호 처리 기술은, 클로드 섀넌이 발표한 정보이론 논문의 연장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숨은 천재 클로드 섀넌을 재평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들은 그를 단지 디지털 시대의 먼 조상이 아니라, 정보화시대의 토대를 쌓았을뿐더러 단기적 실용성을 넘어 시대적 관심사를 추구하는 데 필요한 학문이라면 무엇이든 연마한 만능 창조인으로 끌어올린다.

저자들은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과의 수많은 인터뷰와 철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이 ‘창조적 혁신가’이자 ‘늘 장난기 넘쳤던 천재’의 일생을 촘촘히 재구성한다. 미시간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무엇이든 만들기 좋아하던 어린 시절과 유력한 과학자였던 멘토 바네바 부시를 만나 당시 가장 진보한 ‘생각하는 기계’로 명성을 날리던 집채만 한 미분해석기 관리를 맡게 된 일화, ‘미국 최고의 유전학연구소’이자 ‘최고의 과학 골칫거리’ 중 하나인 우생학기록사무소와 프린스턴고등연구소, 벨연구소를 거쳐 MIT 교수가 되기까지 파란만장한 과정을 생동감 있게 들려준다. 섀넌과 당대의 유명 과학자 앨런 튜링, 존 폰 노이만과의 만남도 흥미롭게 그려지는데, 섀넌과 앨런 튜링은 제2차 세계대전 가운데 극비 프로젝트를 위해 벨연구소에서 만난다.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소상히 알 수 없으나 저자들은 디지털컴퓨터의 토대를 쌓은 그해를 컴퓨터 시대에서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라고 평가한다.

세상을 발칵 뒤집은 ‘정보화시대의 대헌장’ : 모든 정보는 비트로 추상화될 수 있다

클로드 섀넌은 1948년 스무 살 때 “정보화시대의 대헌장”이라고 불리는 논문 〈통신의 수학적 이론〉을 출판함으로써 정보라는 아이디어를 단번에 고안해냈다. 물론 섀넌 이전에도 정보는 존재했다. 뉴턴 이전에도 물체가 관성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정보를 아이디어, 측정 가능한 양, 자연과학에 적합한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섀넌 이후 정보는 비트(bit)로 완전히 추상화되었다. 발신자가 누구인지, 의도가 무엇인지, 매체가 무엇인지, 심지어 의미가 무엇인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기하학자가 ‘모래 위의 원’과 ‘태양의 원반’에 동일한 법칙을 적용하는 것처럼, 물리학자가 ‘진자의 흔들림’과 ‘행성의 궤도’에 동일한 법칙을 적용하는 것처럼, 섀넌은 정보의 핵심을 명확히 파악함으로써 오늘날의 세상을 가능케 한 것이다.

거대한 컴퓨터(미분해석기)를 작동시키는 전기 스위치를 연구함으로써, 섀넌은 우리가 살고 있는 디지털시대의 기초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 그 스위치는 회로를 통과하는 전기 흐름을 제어할 뿐 아니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논리 진술을 평가하고 의사결정까지도 내릴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 일련의 이진 선택, 즉 온/오프, 참/거짓, 1/0은 인간의 뇌를 웬만큼 흉내 낼 수 있다. 월터 아이작슨의 말을 빌리면, 이러한 사고의 도약은 “모든 디지털 컴퓨터의 밑바탕에 깔린 기본 개념”이 되었다. “20세기에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명한 석사학위 논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석사학위 논문의 하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석사학위논문” “불후의 논문”…. 섀넌의 위대한 추상화 업적이 이런 찬사들을 한 몸에 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

클로드 섀넌이 기념비적 석사학위 논문을 발표한 바로 그해에,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은 기계지능(machine intelligence)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결정적 단계를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그의 결론은 한마디로 “이론적으로 모든 해결 가능한 수학 문제는 기계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튜링은 기존의 상상력을 완전히 뛰어넘어 “연산 도중 명령문을 스스로 재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컴퓨터”로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튜링이 제안한 기계는 아직 이론적 구상에 불과했다. 반면에 섀넌은 “모든 합리적 논술이 기계에 의해 평가될 수 있음”을 증명해냈다.

섀넌이 논문을 발표한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위대한 아날로그 기계’였던 미분해석기는 완전히 퇴물로 전락하여 디지털컴퓨터로 대체되는 수모를 당했다. 1,000배나 빠른 속도로 질문에 실시간으로 응답하는 디지털컴퓨터를 제어하는 것은 수천 개의 논리 게이트로, 각각의 게이트는 이진법적 장치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다만 스위치가 아닌 진공관을 매개로 했는데, 기본 설계는 섀넌이 만든 발명품의 직계 후손이었다.

놀이 본능과 발견의 즐거움 : 천재들의 삶에는 우리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과학자가 있다. 세상의 풍부함에 압도되어 온갖 정보를 챙기는 데 열중하는 과학자가 있는가 하면, 세상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관조적 자세로 연구에 임하는 과학자도 있다. 섀넌은 후자에 속했다. 섀넌은 자신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20대 시절 골방 깊숙이 파묻혀 지냈으며, 거의 병적일 정도로 수줍어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놀이와 장난을 좋아했다. “최상의 만족”에 집착한 그에게 세상은 “거기에 늘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손과 마음으로 가지고 놀며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대상”이었다.

섀넌은 늘 새로운 호기심 거리를 찾아 헤맸다. 체스, 외바퀴자전거 타기, 주식투자, 심지어 알츠하이머를 앓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저글링에 관한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 애썼다. 수학자들은 난이도가 낮은 문제를 경멸조로 ‘장난감 문제’라고 부르는데 섀넌은 ‘진짜’ 장난감을 공공연히 만들어 갖고 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들 수 있는 프로젝트를 번번이 수행하고, 걸핏하면 사소하거나 하찮아 보이는 물음에 몰입하다가 결국 뭔가 혁신적인 것을 끄집어냈다.

수학이나 과학을 발견의 기회로 여기는 사람은 드문 요즘, 사람들은 수학과 과학이 사회·경제·고용 전망에 가져다주는 실익을 논할 뿐이다. STEM(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수학mathematics)은 취업을 위한 방편이지 즐김의 수단은 더더욱 아니다. 섀넌의 지론은 지식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고 발견은 그 자체로 즐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기과시와는 전혀 거리가 먼 그가 오로지 “최상의 만족”을 위해 연구에 몰두하고, 누구도 할 수 없는 뛰어난 통찰을 보여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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