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반일, 반미, 민족주의 고찰..... "반일민족주의, 미래 포기하고 파국 자초할 뿐"
[특별기고] 반일, 반미, 민족주의 고찰..... "반일민족주의, 미래 포기하고 파국 자초할 뿐"
  • 허화평 전 국회의원
  • 승인 2020.04.06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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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의 상징처럼 된 소녀상. 오늘날 반일 민족주의의 문제점은 망국의 책임을 일본과 친일파에게만 전가시키는 것이다.
반일의 상징처럼 된 소녀상. 오늘날 반일 민족주의의 문제점은 망국의 책임을 일본과 친일파에게만 전가시키는 것이다.

한국에서 반일 민족주의자들은 소녀상을 곳곳에, 심지어 미국에서까지 세우며 징용자상까지 제작하고 있다.

반일 민족주의

일본을 좋게 말하고 칭찬하는 글을 쓰면 친일파로 매도하고 친일인사명단을 작성·배포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김영삼 대통령은 일본총독부 건물을 일제 잔재라 하여 철거해버리면서 일본인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5000만 국민 앞에서 허풍을 떨었다.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반일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친북좌파 인사들이 집요한 노력 끝에 1965년 한일 양국이 문서로 합의한 약속마저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법원 판결을 받아내 강제징용 보상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한국에 상주하고 있는 일제 당시의 관련 기업과 관련 있는 회사 재산을 압류하겠다고 나서자 일본 정부가 “약속을 지켜라”고 항의하면서 무역제재를 하고 나서도록 만들고, 한·일간 군사협력에 이르기까지 마찰을 초래하면서 한·미·일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 근대화는 일본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한 탓으로 난타를 당했던 이영훈 교수가 중심이 되어 2019년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출간해내자 그들은 이빨을 드러내며 비판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대표적 일본음식인 초밥(스시)을 먹고 고급 사케를 즐겨 마시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반일에서 조선의 멸망과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우 우리는 정직해야 한다. “조선이 망하고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것은 을사오적(乙巳五賊) 때문이었나?”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왕조의 병적 사대(事大)와 쇄국(鎖國), 그리고 무능과 부패, 지배층의 분열과 대립, 그리고 탐욕과 비겁함, 성리학 밖에 모르는 사림(士林)들의 소아병적이고 도그마적인 의식구조가 유·무형으로 작용해 망국을 자초한 것이 아닌가?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켰다기보다 조선이 스스로 잡아먹혔다고 말해야 정확하다.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켰다고 하면 1차적 책임의 소재는 일본 측에 있게 되지만 스스로 잡아먹혔다고 하면 책임의 소재는 조선 측에 있게 되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다. 19~20세기 전반은 제국주의 시대로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던 시대였다.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국가적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가장 가깝고 취약한 조선을 먹잇감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음에도 조선왕실과 지배층은 당시의 국제 정세를 읽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자강의 길을 가기는 커녕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 뒷걸음질 치는 데 여념이 없었고, 백성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는 손쉬운 먹잇감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날 반일 민족주의가 지닌 최대 약점은 민족적 책임을 외면한 채 조선의 망국과 일제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일본과 친일 인사들에게 덮어씌우는 비겁함이다. 이렇게 되면 역사적 교훈은 소용이 없어지고 앞날을 위한 화해는 어렵게 되며 민족 내부 갈등 역시 해소되기 어렵다. 망국의 교훈을 잊지 않을 때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게 되지만 책임을 전가하거나 회피하고 교훈을 망각할 때 더 큰 불운과 비극을 자초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경험이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 이와 같지 않을까? 인간의 삶에 있어 개인이 열등감이나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면 크게 성장하기 어려운 것처럼 국가 역시 열등감이나 강박관념을 벗어나지 못하면 선진국이 되고 문명국가가 되는 것은 어렵다. 우리가 역사 앞에서 진솔하고 정직해질 수 없을까 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잘못되고 손해 보는 일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14대 국회에서 함께 했던 이주일 씨의 말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연예인 시절 무명에 가까웠던 그가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그 말 한번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스타 코미디언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국가도, 민족도 같은 이치가 통하지 않을까!

일본의 영향으로 이뤄진 갑오개혁(1894) 이전 조선에서는 근대적 교육제도, 근대적 형행제도, 근대적 관료제도는 없었다. 반일 민족주의 인사들은 일제 강점기 이전에도 이 땅에 자본주의 맹아가 있었고 근대화 싹이 트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근거가 미약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일제에 의한 조선의 근대화는 조선민족을 “근대화를 통한 조선의 자발적 동화”라는 과정을 통해 일본화 하기 위한 정책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다. 친일인사 시비와 명단 작성 문제 역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해방되기 전까지 조선반도에서는 나치스 점령 하 프랑스인들의 레지스탕스 같은 무장투쟁은 없었다. 민족 전체가 무기력한 상태에서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만이 생존의 수단이었다. 물론 간헐적이고 국부적인 무장 항일투쟁이 있었지만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 했다.

지금 와서 친일인사명단을 작성하고 배척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현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례는 적지 않다. 예컨대 안익태(1906-1965) 선생의 경우 과거 친일 행적이 있으므로 그가 작곡한 애국가를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안익태 선생은 세계적 음악가였을 뿐 친일 인사도, 반일 인사도 아닌 조선인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음악에 국경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방탄소년단이 뉴욕에서 환대를 받는다고 해서 친미가 아니며 도쿄 공연에서 일본 젊은이들이 열광한다고 해서 친일이 아닌 것과 다를 바 없다.

베토벤 작품을, 모차르트의 작품을 베를린에서 연주했다고 해서 친 나치스가 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가 그 시대에 일본이 아니었다면, 미국이 아니었다면 어디에서 세계적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조선에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일본, 미국, 유럽 음악계에서는 존대를 받았던 거장이었으나 해방된 조국에서는 냉대를 받다시피 하다가 외국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조선의 자랑이었고 대한민국의 자랑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가 단지 일본에서 공부하고 연주했으며 나치스 시절 독일에서 연주한 것만으로 친일, 친나치스 인사인 것처럼 비판하는 반일 민족주의 지식인들이야말로 조선시대 성리학 도그마에 갇혀 나라를 망치게 한 사림들과 다를 바 없다.

안익태 선생의 경우와 비교되는 예가 중국혁명의 아버지 쑨원(孫文, 1866-1925)의 경우다. 쑨원이 1894년 하와이에서 중흥회(中興會)를 결성하고 이듬해 광저우에서 무장봉기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 그를 평생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은 일본인 우메야 쇼키치(梅屋庄吉)다. 홍콩에서 우메야 사진관 경영으로 성공한 그는 1895년 홍콩에서 쑨원의 은사였던 의학박사 제임스 컨트리 소개로 쑨원을 만나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눈 끝에 “자네가 거병하면 나는 재산으로 지원할 것이네”라는 맹약을 했고 실천했다.

우메야는 신해혁명 후 일본에 망명한 쑨원을 숨겨주고 쑹칭링(宋慶齡)을 소개하여 결혼을 주선했으며 쑨원 부부는 귀국할 때까지 우메야 집에 머물렀다. 우메야가 쑨원의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쓴 돈은 현재가치로 1조 엔 정도라고 한다. 박상후 저, ‘메이지 유신을 이끈 카게무샤’(2019)에 소개된 내용이다.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 지식인들 같았으면 쑨원을 골수 친일분자로 치부하고 그의 혁명공적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중국인들은 그러지 않았고 지금까지 혁명의 아버지로 존경하고 있다.

주은래(周恩來)의 부인 등영초가 일본 벚꽃을 그렇게 좋아했으나 친일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았다. 청일전쟁에서 굴욕을 당하고 만주를 빼앗기고 본토 침략을 받았던 중국은 굴기하면서 일본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일본 정부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고 일제강점기 피해 당사자들의 금전적 보상 요구를 직·간접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다. 80여 년 동안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았던 베트남이 프랑스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고 금전적 보상을 요구한 적이 없다. 미군과 한국군과 싸우고 북폭세례를 받았던 베트남은 미국과 한국 정부에 대해 사과와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베트남은 미국과 우호관계를 맺었고,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환대를 받고 있다.

진주만 기습으로 심대한 피해를 입고 태평양전쟁에서 수많은 인명 손실을 입어야 했던 미국은 ‘진주만을 잊지 말자’는 기념행사나 태평양전쟁 승리 축하 같은 기념행사는 하지 않고 있다. 우리의 자랑거리인 포스코(POSCO)는 일본 자금과 기술지원이 큰 몫을 해낸 결과다.

이제 일본은 1945년 이전 군국주의 일본이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시대, 미국의 제1의 동맹국가로서 세계 평화와 인류의 번영을 함께 도모해가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선진국이다. 한국 역시 더 이상 외세의 지배를 받는 약소국가가 아니라 경제강국이자 자위력을 갖춘 주권국가로서 미국과 함께 인류 보편 가치를 지키고 추구해가는 가치동맹 국가다. 반일 민족주의는 1945년 8·15로 끝난 과거사다.

조선왕실은 망국의 실질적 책임자 아닐까? 1918년 영왕이 귀국한 뒤 덕수궁 석조전에서 영왕,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왼쪽부터)와 찍은 기념 사진.
조선왕실은 망국의 실질적 책임자 아닐까? 1918년 영왕이 귀국한 뒤 덕수궁 석조전에서 영왕,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왼쪽부터)와 찍은 기념 사진.

反美 민족주의

한반도에서 반미(反美) 민족주의는 반일(反日) 민족주의와 궤적을 같이하고 있다. 친북 성향을 지닌 반미 민족주의자들이 1945년 북한에 진주한 소련의 붉은 군대는 해방군(解放軍)이며 남한에 진주한 미국의 양키군대는 점령군(占領軍)이라는 입장에서 반미 민족주의 정서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으나 이는 역사 왜곡이며 날조에 가깝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으로 對 나치스 전쟁에 참여하고 있던 소련은 일본과는 중립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전 직전까지 대일 태평양전쟁에서의 주역은 미국이고 소련은 국외자였다.

'일본 본토 상륙작전 시 예상되는 막대한 인명 손실을 우려했던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요청이 없었더라면 소련이 북한을 접수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원폭실험 성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고, 부통령이던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지만 소련은 루스벨트와의 약속에 따라 북한에 진주할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유럽에서 나치스 독일의 패배가 임박해질 무렵이던 1945년 2월 크리미아 반도 얄타(Yalta)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회동하여 전후 문제 처리를 논의하면서 한반도 문제 처리 원칙에도 합의하였다. 이때 미·소간에 합의된 비밀의정서에 따르면 독일 항복 후 2-3개월 내 대일전쟁에 참전하는 조건으로 소련은 러일전쟁 당시 빼앗긴 영토를 돌려받고 외몽골 독립을 인정하기로 하였으며, 조선반도 문제는 전원 합의 원칙에 입각하여 과도적 단계인 합동지역 점령(joint zonal occupation)안에 따라 38도선을 경계로 미·소가 분할 점령하되 참가국 외상들 간 협의를 거쳐 조선의 완전 독립을 허용하기로 했다.

이 당시 합의된 대원칙은 “나치스 점령 하에 있던 지역에서는 모든 민주세력을 폭넓게 대표하는 인사들로 하여금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자유선거를 통해 인민의 뜻과 일치하는 책임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으나 독일 패망 직후인 1945년 7월 17일~8월 2일 사이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국의 트루먼, 영국의 처칠과 애틀리, 소련의 스탈린이 회동하여 독일 문제 처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처칠이 얄타에서 합의했던 대원칙을 강조하자 스탈린은 단호한 어조로 “해방지역은 해방군이 책임을 지고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응수했다.

이때는 이미 스탈린은 소련군이 점령한 동구지역(폴란드, 발트해 연안국,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에서 공산주의 괴뢰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훗날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미국과의 합의사항에 구애됨이 없이 동구에서 취했던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 스탈린을 의심하고 있던 처칠은 귀국 후 군 수뇌부와 회동하고 독일군 10만을 포함한 최대 병력을 동원하여 대소 전쟁을 감행할 수 없는가를 논의했으나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훗날 그 유명한 ‘철의 장막’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1946년 3월 5일 미국 미주리주 풀턴(Fulton)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공산주의 국가들을 언급하는 가운데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라는 냉전시대 도래를 알리는 극적 표현을 썼다.

“발트해의 슈테틴(Stettin)에서부터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Trieste)에 이르기까지 대륙을 가로지르는 ‘철의 장막’이 드리워졌다.”

대일 참전 개시일을 8월 15일로 약속했던 스탈린이 8월 9일 공세를 취해 만주와 북한으로 재빨리 진주해 점령한 이유는 미국이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대일 참전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8·15 이전에 38도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동구에서와 같은 수법으로 미국과의 합의를 무시하고 공산주의 괴뢰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했고 미군은 일본과의 항복조인식을 마친 다음 9월초에 해방군으로 진주하여 과도기 단계인 군정을 실시하면서 얄타 합의 정신에 따라 민족대표자들의 건국을 도왔고 UN 감시 하 자유선거를 치를 수 있게 하여 자유민주공화국, 대한민국 탄생을 도왔다. 일본이 패배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해방되지 않았을 것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패배시킨 것은 미국이지 소련이 아니다. 소련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종전 막판에 만주와 북한에 무혈입성이라는 행운을 누렸을 뿐이다. 따라서 조선반도를 해방시킨 것은 미국이지 소련일 수가 없다.

북한에 진주한 붉은 군대는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자유가 없는 공산 괴뢰정부 수립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점령군의 모습을 드러냈으며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국민의 뜻에 따른 자유대한민국 정부 탄생을 도왔다는 점에서 해방군의 면모를 과시했다.

북한은 자주적이지도, 독립적이지도 않았던 스탈린의 괴뢰에 불과했을 뿐이고 남한의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었으며 친일 인사는 더더욱 아닌 항일독립투사였다. 그는 미군정과 갈등을 겪으면서 국내 좌익세력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자유를 존중하는 대한민국을 건설한 건국 지도자였다. 친북 좌파들인 반미 민족주의자들이 이승만 정부에 일제 관료 출신들이, 반일 민족주의자들 시각에서 본 친일 인사들이 참여했다는 이유로 정통성 없는 친일 정부로 매도하고, 이승만을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된 꼭두각시로 비하하고, 분단의 책임을 미국에 전가하면서 반미 민족주의 정서를 부추기는 것은 주한미군 철수를 유도하고 적화통일을 위한 교활한 기만전략이다.

한반도에서의 분단은 미·소 양국 간 합의에 의해 이뤄진 것이고 분단 고착은 얄타에서 합의한 원칙을 깨고 유엔 감시 하의 자유총선을 거부하면서 북한에 공산주의 괴뢰정부를 세운 소련의 책임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고, 북한 남침을 지원함으로써 분단 고착을 더 강화시킨 책임까지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김영삼 정권에 의한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정치재판 결과 승리자 편에 편승한 좌파들, 반미 민족주의자들이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합법적 토대를 구축하고 현 정부 하에서 전성기를 맞아 기세를 올리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주한미군 철수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사드 배치를 반대하며 미 대사관 담장을 뛰어넘어가 난동을 부리고 주한 미 대사의 콧수염을 조롱하는 인신 모욕을 해대고 미 대사관 옆에는 주한미군 철수 피켓을 든 사람들이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다.

전시작전권 환수가 마치 미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이나 되는 것처럼 떠들고 있다. 남한에서 반일 민족주의는 反식민지 민족주의 연장선상에 있어 과거지향적인 데 비해 반미 민족주의는 反제국주의 및 反자본주의라는 전형적인 좌익 민족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 반일은 합리적이지 않고 반미는 정당하지도 않다. 글로벌시대인 오늘날 지구상에서 혼자 힘만으로 자신을 지키고 혼자만의 힘만으로 잘 살아갈 수 있는 국가나 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 얽매인 국가는 정체하거나 퇴보했고 미래를 중시하는 국가는 발전해왔다. 독일과 프랑스, 미국과 일본이 대표 사례다.

오늘날 남한에서 종북 좌파들과 반미 민족주의자들이 공공연하게 친중(親中) 쪽으로 기울어져가고 있는 것은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파리가 말 궁둥이에 붙어가듯 우리도 중국 궁둥이에 붙어가야 한다”고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미국 궁둥이에 붙어가지 말고 중국 공산당 궁둥이에 붙어가자는 전형적인 반미 친중 발언이라 할 수 있다. 6·25 전쟁사를 몰라서가 아닐 것이다. 중국이 비록 경제적으로는 우리에게 편리한 국가이지만 역사적으로나 정치·군사적으로는 잠재적 위험국가이고 영토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않고 있는 패권국가다.

최근 이상우 박사가 중국이 북한을 중국의 소수민족 자치구인 외성(外省)으로 편입하고 남한을 친중 半속국화 하려는 속셈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 것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중국 지도자들이 “조선반도를 1894년 일본에 빼앗겼다”고 하는 것은 언젠가는 다시 빼앗아 와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다.

중국 최고지도자 시진핑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한반도 문제를 논의할 때 “한반도는 원래 중국의 영향 아래 있었다”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반도가 자신을 지키지 못할 때 티베트와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과거 토번(吐藩)으로 알려졌던 현재의 티베트는 당(唐) 태종(太宗)이 공주를 보내 달래야 했을 만큼 사나운 세력이었으나 18세기 청(淸)의 강희(康熙) 대제 때 완전히 복속(服屬)된 이후 1913년까지 지배받았던 것은 1637년 청 태종이 조선을 무력으로 항복시킨 이래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할 때까지 속국으로 지배한 것과 다르지 않다.

중국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한 모택동은 1959년 티베트를 무력을 앞세워 자치구로 만들었다. 그로서는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같은 논리로 그들이 한반도를 다시 지배하기 위해 무력을 행사해도 그들로서는 이상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은 베이징대 연설에서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 한국은 작은 나라이지만 중국몽(中國夢)에 함께 하겠다”고 했다. 놀라운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큰 나라 앞에서 굽실거리며 살아가는 일은 없어야 하고 큰 나라라고 해서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 중국이 미국을 대신할 수 없고 중국은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위험한, 공산당 1당 독재 국가임을 잊어서는 안 되고 그들이 전통적으로 고수해오는 중화 민족주의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이 미국을 멀리할수록,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가 멀어질수록 한국에 대한 중국의 압박과 간섭은 그만큼 증가할 것이지만 한미관계가 공고할수록 중국은 더 조심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수많은 전문가들이 미국의 세기가 끝날 것인지, 지속될 것인지와 급부상하는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는 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문제를 두고 논의를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결론은 21세기는 여전히 미국 주도의 세기일 것이다, 라는 것이 다수의 견해다. 우리가 앞으로도 미국과 함께 가야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도움을 받아왔고 미국이 단순히 크고 부강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국가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나치스와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철저한 패배를 안겨준 주도적 국가이며 전후 자유주의 정신과 원리에 입각한 새로운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를 구축함으로써 인류의 항구적 평화와 번영을 함께 추구하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데 앞장선 국가이고, 미·소 냉전기간 자유세계의 맹주로서 공산주의 소련제국을 붕괴시킨 국가이자 지금은 국제테러 위험과 맞서 싸우면서 인류 보편가치를 지키고 전파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국가다.
 

반일시위는 반미선동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한일간 지소미아 연장을 반대하는 평통사(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시위 모습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대표하는 국가이며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이면서도 영토에 대한 야심이 없는, 국제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관대한 국가다. 우리가 건국 이래 미국과 동맹국가가 된 것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만인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진실에 대한 확인일 뿐 친미(親美)와는 상관이 없다. 이 시기에 우리가 새삼스럽게 미국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전통적으로 유럽 중심 대외정책 노선을 취해왔던 미국이 서서히 아시아-태평양 쪽으로 중심축을 옮겨가고 있는 전환기이기 때문이다.

미 국방부는 1995년 ‘아시아-태평양 전략(Asian-Pacific Strategy)’을 담은 ‘나이 이니셔티브(the Nye Initiative)’를 수립하고 중국의 군사력 건설과 패권적 대외전략에 대비하기 위해 이 지역 미군감축을 중지해야 하고 상당 기간 10만 미군을 주둔시키면서 대만해협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갈 것을 강조했다. 중국이 세계전략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one road)에 맞서 일본, 호주를 포함한 태평양-인도양을 잇는 해양 벨트를 구체화해가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2010년 2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과거 친소국가였던 인도를 방문하고 양국 친선과 협력 관계 증진을 다짐함으로써 對 중국 포위망을 굳혀가고 있다. 미국과 동맹국가이며 아시아-태평양 국가에 속하는 한국이 불참하고 있다는 것은 현 정부 하의 반일반미 친북친중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반드시 동참해야 한다. 한미관계는 크고 작은 관계가 아니며 군사동맹 이상의 관계다. 한미관계는 군사동맹이 중심축이 되어 지난 75년을 거치면서 가치동맹, 경제동맹, 문화동맹으로까지 확대되고 심화되어 왔다.

미국은 보편가치에 기반을 둔 국가로서 인간 존엄성이 강조되는 법이 지배하는 국가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힘으로 개방되고 다양하며 자유가 존중되는 국가다. 미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한 국가이며 미국 경제의 힘을 상징하는 달러화는 국제사회에서 결제 수단이 되는 기축 통화다.

미국은 유사 이래 최초로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우주 공간까지 힘이 미치는 군사력을 지닌 국가로서 과거 침략적 제국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세계 평화와 인류 번영을 도모하고 안전을 지키기 위해 군사력을 구사하는 국가다. 미국의 언어인 영어는 글로벌 시대, 디지털 시대 제1언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대다수 국제회의에서 영어가 사용되고, 여객기 조종사들은 모두가 영어로 관제탑과 교신을 해야 하고,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언어 중 영어의 비중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미국이 지닌 최대 잠재력은 대학 교육환경에 있다. 미국은 대학교육을 통한 전문가 양성을 위한 한국인들의 뒷마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8년 월가 금융위기 당시 국제사회 좌파 지식인들, 정치인들(평등주의자, 反자본주의자, 反신자유주의자)이 미국의 자본주의는 파탄이 났다고 떠들어댔을 때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과 정치인들도 덩달아 맞장구를 치면서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시장만능주의로 1% 대 99% 양극화 사회가 되었다고 소란을 떨었다. 그러나 월가의 위기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지금은 트럼프 행정부에 의한 규제완화와 감세에 힘입어 50년 내 가장 낮은 실업률, 주가 상승, 경제호황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이 지닌 또 다른 잠재력은 회복력(resilience)과 적응력이다. 그들은 과거 지구상에서 명멸했던 제국들의 흥망성쇠 역사를 끊임없이 들춰보면서 교훈을 찾아내고 새로운 처방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지구상에서 미국과 비교할 수 있는 대등한 국가는 없다.

혼자 힘만으로 생존하고 발전할 수 없는 국제 환경 속에서 작은 나라가 생존하고 번영하는 지혜는, 크고 강하며 영토 야심이 없고 가치를 존중하는 나라와 함께 하는 것이다. 주체니 자주니 하면서 크지만 위험한 나라와 함께하는 나라는 생존도, 번영도 쉽지 않다. 혼자일 때 가까운 강자가 지배하려는 유혹을 쉽게 받게 되고 위험을 자초하게 되지만 강한 동반자와 함께 할 때 무시당하거나 강요당하는 일은 쉽지 않다. 친중(親中) 만큼 잘못된 것이 없고 반미(反美) 만큼 나쁜 것도 없다.

반일(反日), 반미(反美), 민족주의는 설 곳도 갈 곳도 없다

일국 민족주의, 배타적이고 고립적인 민족주의 시대는 끝난 지 오래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민족에게 독이 될지언정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일본과는 적대관계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미국을 멀리하는 것은 자폭만큼이나 어리석고 위험하다.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일본과 미국보다 더 훌륭한 동반자나 동맹국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역사 앞에서 정직해야 하고 미래 앞에서 진지해야 하며, 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가 자본주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출간한 책에서 경제발전 대가로 알려진 노벨경제학 수상자 사이먼 쿠즈네츠(1901-1985)가 제시한 선진국과 후진국 분류 모델을 소개하면서 쿠즈네츠는 선진국, 후진국 분류에서 일본 모델과 아르헨티나 모델을 들면서 일본은 1세기만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에 도달했고, 아르헨티나는 1세기만에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추락했음을 지적했다.

성공한 대한민국은 일본 모델에 가깝지만 지금처럼 반일, 반미, 민족주의에 집착하면서 주체사회주의 국가, 평등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는 종북 좌파 세력이 대한민국을 완벽히 장악하는 날 제2의 아르헨티나로 추락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국토가 넓고 자원이라도 있는 나라지만 우리나라는 국토는 분단되고 자원도 별로 없는 국가다.

1913년대 세계 10대 경제 선진국이던 아르헨티나는 페론주의(Peronism)라는 좌파적 포퓰리즘 남발로 IMF 구제금융을 밥 먹듯이 반복하고 있는 후진국으로 추락했다. 오늘날 자유대한민국에서 망령처럼 떠돌아다니는 친북, 친중을 의미하는 반일, 반미, 민족주의는 설 곳도 갈 곳도 없는, 미래를 포기하고 파국을 자초하려는 미친 자들의 착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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