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 70주년 연속기획 1 ] 스탈린 감독, 김일성 주연, 마오쩌둥이 조연한 남침(南侵) 전쟁
[ 6·25전쟁 70주년 연속기획 1 ] 스탈린 감독, 김일성 주연, 마오쩌둥이 조연한 남침(南侵) 전쟁
  • 송종환 미래한국 발행인·경남대 석좌대 교수
  • 승인 2020.06.17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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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6·25 남침전쟁 발발 70주년이 된다. 6·25 남침전쟁(북한은 ‘조국해방전쟁’, 중국은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으로 각기 호칭)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대한민국이 외부로부터 불시에 침략을 받은 역사이면서도 현실이지만 정작 한국 사회에서는 좌파들에 의해 공산국가들의 남침 사실이 왜곡되고 있다.

6·25전쟁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 하에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이라는 ‘전통주의’ 해설은 1960년대 후반 월남전 당시 소련보다는 미국이 오히려 더 침략적인 나라라고 주장하는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1980년대 후반까지 상당히 큰 학술적 영향력을 미쳐 한국 사회를 갈등과 분열로 몰아넣었다.

남한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다는 북한의 주장을 따르는 미국의 수정주의자들에 이어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는 6·25전쟁은 당시 남북한 국민의 정치사상 분열에 비춰 미국의 남북전쟁과 같이 불가피한 민족 간 내전 (civil war)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구(舊) 소련 붕괴 후 1992년부터 러시아 측에 의해 공개된 세 가지 종류의 문서들은 6·25전쟁이 남한의 북침에 대한 북한의 반격이라고 되풀이해 온 구 소련과 북한 측의 주장이 거짓 선전임이 밝혀졌다. 그동안 공개된 소련의 비밀자료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 자료는 1966년 소련 외무부가 소련과 중국의 6·25전쟁 개입 관련 내용을 정리한 ‘6·25전쟁, 1950-53, 휴전협상(On the Korean War, 1950-53, and the Armistice Negotiations)’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미국과 전쟁 중인 베트콩에 대한 소련의 지원 문제를 중국, 월맹 측 관계관들과 협의하려는 소련 관계관들에게 배경 정보로 제공할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두 번째 자료는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대통령이 1994년 6월 2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공하기 위해 정리한 ‘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외교문서’(이하 ‘한국전 문서요약’으로 약칭)로서 1949-53년 기간 중 한국전쟁에 관한 216건, 총 548쪽에 이른다.

세 번째 자료는 러시아 대통령실 문서고 소장 문서로 정식 명칭은 ‘러시아연방 대통령 문서(The Archive of the President, Russian Federation)’이며 약칭은 APRF이다. 1950년 2월부터 1953년 7월 기간 중 스탈린(Joseph Vissariovich Stalin)-김일성-마오쩌둥(毛澤東)간에 오고 간 한국전쟁 관련 비밀전문(電文)으로서 총 1200쪽에 달한다.

상기 문서들은 1993년 가을부터 미국 워싱턴 DC 소재 우드로 윌슨 센터(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가 발간하는 냉전국제역사프로젝트회보(CWIHP: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에 학자들의 연구논문들과 함께 영문으로 번역되어 시리즈로 게재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공산권의 붕괴로 접근이 가능하게 된 구 공산권 국가들의 자료들을 연구 검토해 냉전에 관련된 정보와 학술적 평가들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 회보들은 누구든지 읽고 연구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다.

이렇게 공산국가들의 남침이 사실로 확인되었음에도 한국에서는 좌파 정부 집권으로 ‘전통주의’ 해설을 훼손하려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미국 등 유엔군이 참전했다는 이유로 강대국 간의 대리전이라는 주장으로 공산권 국가들이 치밀하게 협의해 남침한 사실을 희석하는 연구들도 있다. 심지어 북한만 바라보는 현 한국 정부의 국가보훈처는 지난 5월 중 한국 갤럽에 의뢰해 6·25전쟁은 남한, 북한, 남·북한, 미국, 소련, 중국 등 어느 쪽이 일으켰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여론조사를 하다가 국민들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송종환 미래한국 발행인·경남대 석좌대 교수
송종환 미래한국 발행인·경남대 석좌대 교수

북한군, 6월 25일 기습 남침해 단 3일 만에 서울 입성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에 대해 중국 측 학자가 중국 측 자료를 활용해 진행한 연구 결과를 기다려왔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김동길 북경대 역사학과 종신교수의 충실한 연구 결과를 포함시켜 필자가 과거 썼던 글들을 보완하고 종합했다. 후세대들이 6·25전쟁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후학들이 이 글을 참고하고 발전시킬 것을 기대해 본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 분계선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이 서울 시내에 입성하기까지 단 3일이 걸렸다. 북한군은 당일 옹진반도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26일 의정부, 27일 창동,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을 파죽지세로 돌파했다. 그동안 개성·김포·문산·포천·의정부·춘천·가평 등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력에서 한국군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북한의 지상군 병력은 국군의 2배였다. 10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 3개 독립연대 등 18만2000명이었다. 국군은 8개 보병사단과 2개 독립연대 등 9만4000명이었다. 북한 전투장비는 남한의 3배가 넘었다. 개전 당시 북한은 200대가 넘는 전차를 보유했다. 국군은 단 한 대도 없었다. 장병들은 북한 전차 소리만 들어도 도망을 가거나 두려움에 떨었다. 공군력의 경우 북한은 전투기 포함 211대가 있었지만 아군은 연락기와 연습기 22대가 전부였다.

북한은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해 한 달여 만에 부산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북한 주공(主攻)은 4개 사단과 1개 전차여단으로 구성된 1군단이 맡았다. 3·4사단과 105전차여단 예하 2개 전차연대는 의정부-서울 방향으로, 1사단과 1개 전차연대는 문산-서울 방향으로 공격했다. 나머지 6사단은 한강을 넘어 김포-영등포로 진격하게 했다.

조공(助攻)은 3개 보병사단과 1개 모터사이클연대로 구성된 2군단이 맡았다. 이 중 2, 12사단과 모터사이클연대는 춘천-가평·홍천-수원 방향으로 진격해 서울 동측을 우회 공격, 국군 주력을 포위하도록 했다. 나머지 5사단은 766유격연대와 945육전대의 지원을 받아 동해안 축선을 따라 포항 방면으로 남진하도록 했다.

국군의 전방방어 부대는 4개 사단과 1개 연대였다. 옹진반도에 보병 17독립연대, 개성·문산에 1사단, 의정부 북방에 7사단, 춘천 북방에 6사단, 동해안에 8사단을 배치했다. 그나마 북한 인민군의 남침 전날인 24일 0시를 기해 한동안 계속했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됨에 따라 많은 장병들이 휴가와 외박을 나가 부대에 남아 있는 병력은 절반에 불과했다.

6·25전쟁을 일으킨 3사람 / 전쟁기념관 전시물

스탈린의 결단·승인·작전계획에 따라 김일성 남침 개시

70년 전 일어난 일에 대해 잘못된 교육에 영향을 받으면 인간의 뇌리에 잘못 입력된다. 역사와 현실은 아래와 같이 분명하다.

러시아 정부가 공개한 6·25전쟁의 비밀문건을 검토한 케스린 웨더즈비 플로리다주립대 교수는 ‘윌슨 쿼터리’ 1999년 여름호에 발표한 ‘다시 본 한국전쟁’이라는 글에서 북한의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1949년 초부터 1950년 초까지 ‘남조선 적화’를 위한 남침을 승인해 줄 것을 무려 48차례 걸쳐 요청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웨더즈비 교수의 위 논문과 옐친 대통령이 1994년 6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공하기 위해 6·25전쟁 개전에 관해 정리한 216건의 ‘한국전 문서요약’에 의하면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무력통일을 위한 대규모 남침 의사를 최초로 밝힌 것은 1949년 3월 5일 모스크바에서의 스탈린·김일성 간 회담에서 김일성이 무력통일을 위한 남침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때 스탈린은 한국군과 한국 주둔 미군 규모, 남북한 군대의 우열을 질문한 후 북한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답변하고 남한에 미군이 아직도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 활동은 남한의 북한 침공을 반격하는 경우에만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남침을 승인하지 않았다.

스탈린으로서는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는 한 한반도에서의 남북한 간 전쟁에 미·소 간 전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했고 김일성도 자신을 북한 지도자로 발탁해준 스탈린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자신도 없었다.

스탈린이 남한 공격을 엄격히 제한했지만 북한은 1949년 8월 4일 새벽 5시 최현의 지휘 하에 두 개 연대 병력과 포병부대를 동원해 옹진반도의 두락산, 운동, 국사봉을 공격하는 대규모 38 분계선 분쟁을 일으켰다.

8월 12일 김일성은 스티코프(Terenty Shtykov) 대사와의 면담에 이어 9월 3일 자신의 러시아어 통역관 문일과 툰킨(G. I. Tunkin) 공사 면담을 통해 1949년 7월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한 후 38선은 이미 그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하면서 대남 전면 공격 승인을 요청하면서 대남 전면 공격 승인할 수 없다면 최소한 옹진반도 점령을 하는 제한 전쟁 승인을 호소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스탈린은 9월 11일 김일성의 요청이 대부분의 주한미군이 철수한 시점에 제기되었음을 감안해 호의적 관심을 보이면서 휴가 중인 스티코프 대사를 대리하고 있던 툰킨 공사가 김일성을 조속히 면담, 8월 12일 및 9월 3일자 북한 측 제의 사항과 관련해 남북한의 정치 군사정보와 현지 대사관 의견을 보고토록 지시했다.

툰킨 공사는 김일성을 면담한 후 보고한 9월 14일자 전문에서 “9월 12일과 9월 13일 김일성과의 면담 시 김이 종전과는 달리 확신을 주지 못하는 어조로 현 상황에서 속전속결에 의한 승리는 기대할 수 없으므로 전면전을 조기에 개시하는 대신 옹진반도와 해주 인근까지를 점령할 것을 제의했다”고 보고했다.

아울러 툰킨은 “인민군 남침 시 남한 내 빨치산의 지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신속히 승리할 만큼 강하지도 못하고 미국의 강력한 군사개입으로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므로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현지 대사관 의견을 보고하면서 옹진반도 점령과 같은 제한적 작전 수행에 대해서도 “내전으로 확대되지 않더라도 이는 미국의 성공적 반소 캠페인에 이용되어 소련에 유익하지 않으므로 가치가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소련 비밀문서가 해제되면서 밝혀진 남침계획의 전모

옹진반도 점령 제한전이라도…간청한 김일성

이처럼 인민군의 남침에 대한 부정적인 평양주재 대사관의 보고를 받고 스탈린은 소련공산당 중앙위 정치국 명의로 9월 24일 평양주재 대사에게 하달한 훈령에서 남한 내 빨치산 활동 강화 계획은 승인하되, 전면적 남침이나 옹진반도 점령 작전은 “미국의 개입으로 분쟁이 장기화됨으로써 통일이 지연될 것”이라는 이유로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고 강조했다. 그는 옹진반도 점령 계획에 대해서도 “남한의 공격이 있을 경우 이들이 북한 영역으로 들어오도록 한 뒤 반격작전을 펼치는 방안”을 제시했다.

스탈린의 지시에도 김일성은 남침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1950년 1월 17일 북경 향발 이두연 북한 대사를 위한 박헌영 외상 주최 오찬에서 김일성은 2명의 참사관급 소련 외교관 이그나티에프(Ignatiev)와 페리센코(Pelishenko)에게 “이제는 중국의 통일이 완료되었으므로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언급하면서 “그동안 남한 측의 대북한 공격이 없었기 때문에 1949년 3월 5일 스탈린에게서 승인을 받은 반격형태로서의 대남공격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남한 해방을 위한 인민군의 대남 공격 승인을 받기 위하여 스탈린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이어 “자신이 공산주의자이며 상부의 규율을 지키는 사람이며 스탈린이 그에게 법이기 때문에 (그의 승인 없이는) 공격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소련 대사관원들이 이 문제에 대한 대화를 회피하고 일반 문제로 대화 주제를 바꾸려 하자 김일성은 스티코프 대사에게 접근해 1949년 6월에 “마오쩌둥도 중국혁명이 끝나면 북한을 돕겠다고 약속한 바가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남한공격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스탈린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어 김일성은 “스탈린이 3일 만에 끝날 수 있는 옹진작전을 허가해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총공격 시에는 며칠 내에 서울을 점령할 수 있다”고 강조했으나 스티코프는 옹진작전은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비신스키(Andrei Vyshinsky) 외상으로부터 상기 대화에 관한 스티코프의 비밀 전문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1월 30일 스티코프 대사에게 하달한 전문에서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그가 남한에 대하여 하고자 하는 큰 일은 많은 준비가 필요하며 위험이 없도록 잘 조직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김을 만나 동 문제를 의논할 용의가 있으며 그를 도울 의사가 있다”는 자신의 의사를 김일성에게 전달토록 지시했다.

송종환

미래한국 발행인·경남대 석좌대 교수
전 파키스탄 대사
전 유엔대표부·미국대사관 정무공사
전 안기부 해외정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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