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 70주년 연속기획 Ⅱ ] 6·25전쟁이 바꾼 한국사회
[ 6·25전쟁 70주년 연속기획 Ⅱ ] 6·25전쟁이 바꾼 한국사회
  • 박명수 미래한국 자문위원·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 승인 2020.07.06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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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기자 겸 목사였던 밥 피어스는 한경직 목사와함께 한국에서 대대적인 구호활동을 펼쳤다. 그 공로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사회복지 분야의 공익 훈장을 수여받았다. / 월드비전 제공
종군기자 겸 목사였던 밥 피어스는 한경직 목사와 함께 한국에서 대대적인 구호활동을 펼쳤다. 그 공로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사회복지 분야의 공익 훈장을 수여받았다. / 월드비전 제공

한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경제구조이다. 전통봉건사회와 근대서구사회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개인의 등장이다. 개인은 자율권을 가졌고, 사적 권리는 국가가 함부로 규제할 수 없다는 것이 근대서구사회의 특징이다. 이것을 경제 부문에 적용한 것이 바로 시장경제 체제라고 말할 수 있다.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다.

근대사회의 이런 발전은 개인의 이익은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이익과 결합된다는 신념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의 핵심 사상은 “합리적으로 이해된 개인의 이익”은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이익과 부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건전한 도덕이 전제된다. 따라서 시장경제의 발전은 건전한 시민의식과 함께 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이승만은 일찍이 그의 ‘독립정신’에서 이런 사회구조를 갖지 못하면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국사회에서 제일 처음에 이 같은 경제제도가 받아들여진 것은 3·1운동 이후에 마련된 헌법이다. 1919년 4월에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에는 “소유의 자유”가 명시되었다. 국가는 개인의 소유를 보장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해 9월에 개정된 임시정부 헌법에는 “기업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다. 이것은 일본이 일본 기업 육성을 위해 조선인들에게 각종 규제를 부과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 것이다. 개인의 소유권과 사기업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제사상은 당시 강력하게 전개되고 있던 공산주의와 부딪히게 되었다. 그들은 사회적 모순의 핵심이 개인의 소유권 때문이라고 보고, 이것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고 봤다. 그래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사회는 바로 이런 개인의 소유권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이다.

이것은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자유무역과 시장경제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다. 1930년대 이후 소련은 파시즘과 맞서기 위해 미국과 손을 잡았지만 이런 근본적인 생각에는 아무런 변화가 있었다.

6·25전쟁과 시장경제 체제의 도입

해방 이후 한국사회는 정치제도 못지않게 어떤 경제정책을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사회에는 막대한 일본기업과 일본인 소유의 토지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한국인들 지주가 갖고 있던 토지가 있었다. 북한은 일본인들이 갖고 있던 기업과 토지는 물론 한국인이 갖고 있던 토지까지 국유화했다. 물론 “토지는 농민에게, 공장은 노동자에게”를 외쳤지만 이것은 허울뿐 실제로는 모든 것의 소유는 국가에 있었고 국가는 공산당의 통제 아래 있으므로 결국은 모든 것은 공산당의 소유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남한 사회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우선 당시 대부분의 인구가 농민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직접 관련된 토지 문제를 살펴보자. 해방 직후 여론은 일본인의 토지는 농민에게 무상분배를 해 주고 한국인 대지주의 토지는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48년 헌법은 이런 여론을 반영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여기에 맞게 토지분배가 이뤄졌다. 그리해서 당시 60%가 넘는 소작농들이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토지 소유권은 소수의 대지주에게 있었지만 이제는 대다수의 농민들이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이들은 신생 대한민국의 국민이 됨과 동시에 당당한 토지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이런 농민들에게 6·25 이후 공산당이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겠다는 것은 이미 가진 것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대한민국의 농민들은 자기의 소유권을 지키기 위해 대한민국을 선택한 것이다. 6·25 때 완장을 찬 사람들은 농민이 아니라 이런 분배과정에서 소외된 머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상당수는 월북했다.
 

전후 경제, 국유화에서 사유화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기업의 문제이다. 일본은 패전과 함께 거대한 기업을 남겨 놓고 철수했다. 이들이 남겨 놓은 적산은 해방 이후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부의 주요 재원이었다. 미군정과 한국정부는 이런 적산을 불하해 주고, 그 수입으로 국가재정의 주 수입원을 삼았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는 상당한 기업을 국가 소유로 가지고 있었다. 한국전쟁이후 남한 정부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고, 이것을 타결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원조가 절실했다. 당시 미국원조가 한국정부의 운영에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에 원조하는 대신 한국의 경제구조를 바꿀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기업의 국유화를 최소화하고 이것을 대부분 사기업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원래 1948년의 헌법은 일본이 남기고 간 기업의 국유화를 주장했다. 이것은 대부분의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승만도 이것을 통해 국가가 막강한 경제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미국은 근본적으로 경제는 국가주도가 아니라 시장에 맡겨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53년 전쟁이 끝난 다음 미국은 헌법을 사기업 육성의 방향으로 고칠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1954년 헌법은 개정되었고, 그 주요 내용은, 주요지하자원이나 수자원도 민간에게 넘길 수 있게 되었고(85조), 국제무역에 있어서 국가의 통제도 제한되게 되었으며(87조), 국방산업을 제외하고는 사기업을 국영기업으로 바꿀 수 없도록 했다(88조).

여기에서 한국은 이제 국가가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기업이 한국의 산업을 주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서 사기업의 탄생이 이뤄지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이길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한 선교사에 의하면 한국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막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이다. 빌리 그래함 목사 역시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미 정부에 전달하는 등 한국 및 한국 기독교 발전에 기여했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한 선교사에 의하면 한국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막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이다. 빌리 그래함 목사 역시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미 정부에 전달하는 등 한국 및 한국 기독교 발전에 기여했다.

6·25전쟁과 한국 개신교의 리모델링

과거 유교와 불교가 대륙의 문화를 한반도에 전해 줬다면 근대사에 있어 기독교는 서구문화를 한반도에 전해 줬다. 더 이상 전통문화가 조선의 앞날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한 고종은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 한반도를 근대화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미국은 극동의 이익이 엇갈리는 한반도에 발을 깊게 내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때 나타난 것이 바로 기독교선교사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조선에 학교와 교회를 세워주겠다고 약속하며 고종에게 접근했다. 그후부터 고종은 이들과의 친분을 유지하면서 이들로부터 서구세계를 알고, 근대문명을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선교사들들 통해서 전해지는 서구문명은 한계가 있었다. 아시아에서 먼저 근대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은 자신들이 조선을 근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결국에 조선을 일본에 강제로 합병했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는 일본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일본은 국제사회에 조선을 근대사회로 변모시키겠다고 선전했다. 이제 한국의 근대화는 일본식 근대화였고 이런 상황 가운데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는 일본에 예속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 가운데도 선교사를 통한 근대문명의 유입은 없어지지 않았고 기독교 교회, 미션 스쿨과 병원을 통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말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일으켰고 그 결과 미국과 기독교는 일제에 의해 상당한 핍박을 받게 되었다. 일본은 기독교를 서구근대문명을 조선에 전하는 데 있어 하나의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었고 일제 말에는 기독교를 미국과 내통하는 세력으로 인식해 크게 경계했다.

해방이 되었을 때 기독교는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대안세력으로 등장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과 싸워 이긴 나라는 미국이며, 그 종교는 기독교이고, 이들과 오랫동안 연결고리를 갖고 있었던 한국의 유일한 집단이 바로 기독교였다. 특별히 기독교는 일제 강점기 일본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해방 직후 한국사회에서 기독교가 갖고 있는 위치는 매우 중요했다. 해방 직후 전국 13도에 만들어진 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 가운데 7명이 기독교인이었으며 당시 가장 중요한 정치가들인 북한의 조만식, 남한의 이승만, 김구, 김규식은 다 같이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는 해방 후 한국사회의 주요 세력으로 등장했다. 남한의 해방공간에서 기독교는 여러 단체에 가담해 활동했지만 그중에서도 이승만의 핵심 그룹인 독립촉성국민회와 민족통일총본부에는 기독교인들이 주류를 이뤘다. 초대 제헌국회에 가장 많은 국회의원을 배출한 것이 바로 독촉국민회였고 이승만 정부에서 가장 많은 요직을 차지했던 사람들이 민족통일총본부의 인물들이었다.

특별히 북한에서 공산주의를 경험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남한에 자유민주주의적인 강력한 반공정부가 수립되기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특별히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될 때 기독교인들은 새로 세워진 국가가 기독교국가라고 생각했다. 개원국회는 기도로 시작했으며 이승만은 그 취임선서에 “하나님 앞과 민족 앞에서” 헌법을 지키겠다는 대통령 취임선서를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한국 기독교는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주한미군의 잔류였다. 한국 기독교는 1949년 서울운동장에서 모여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는 대규모의 집회를 개최했다. 당시 미국의 떠오르는 부흥사 빌리 그래함과 밥 피어스가 한국을 방문했는데 이들 역시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본국에 강력하게 전달했다. 아울러 1950년 바로 6·25 직전에 독실한 기독교 장로인 덜레스가 트루먼 특사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영락교회를 방문해 수많은 월남 교역자들이 모여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트루먼에게 조속히 한국을 지켜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한 선교사에 의하면 한국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막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한국사회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싸움이 아니라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싸움이라고 주장하며, 실제로 민주주의는 실체가 없으며, 오직 기독교가 실체 있는 집단으로서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정부수립 직후 전국에는 남로당 세력들이 산악지방으로 들어가 활동했는데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한국 기독교는 이들을 순화시키고 자유민주주의를 교육하는 사역을 감당했다. 당시 기독교와 민주주의는 둘로 나눌 수 없는 세력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다음에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더 적대적인 관계로 발전되었다. 원래 북한에서 기독교가 반공집단이라는 것을 잘 인식한 인민군은 남한에 와서도 기독교를 적대시했다. 특별히 인민군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철수하게 되는데 남한 각지의 교회를 파괴하고 기독교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전남의 영암과 신안에서 그리고 전북의 정읍, 충남의 논산에서 대규모의 박해가 이뤄졌다. 이것은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황해도의 신천대학살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통해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더 드러났다.
 

미국의 기독교계, 한국에 관심을 갖다

한국전쟁은 두 가지 차원에서 미국 기독교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하나는 한국 기독교의 재건이며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를 막는 것이다. 사실 해방 후 미국 기독교는 한국에 어떻게 다시 들어와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기독교는 이미 독립된 교회로서 선교사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한국교회가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되자 미국의 선교사들이 대거 다시 입국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다시금 신학교육기관과 각종 기독교단체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한국 기독교는 다시금 선교사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다시금 선교사들을 불러들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시 시작된 한국 선교는 단지 과거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의 복귀에 머물지 않았다. 해방 이전의 한국교회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정도였다. 여기에 오순절 계통과 침례교 계통은 매우 미미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미국의 수많은 작은 교단들에게도 한국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들 교단 가운데는 한국전쟁에 군목으로 파송되기도 했다. 이들을 통해 장, 감, 성 중심의 한국교회에 침례교와 오순절 계통의 선교사가 들어오게 되었고 이것은 해방 후 한국 기독교의 지형을 바꾸게 만들었다.

해방 후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 가운데 상당한 숫자는 과거 중국 선교사들이었다. 중국은 미국 기독교의 최대 선교지였다. 그런데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중국에서 활약하던 선교사들이 대거 한국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장, 감, 성 관련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침례교와 오순절 계통도 포함된다.

이들은 중국 공산주의를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한국에 와서 활동할 때 반공사상은 그 기본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선교지를 바꾼 선교사들의 반공은 월남 기독교인들의 역할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은 선교사들에게 새로운 사역을 전개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사업이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이들에게 적당한 구호를 제공할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미국 선교사들은 미국 정부와 민간인들로부터 지원받은 재정과 물자로 한국인들을 도왔다.

이런 활동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월드비전이다. 종군기자 겸 목사였던 밥 피어스는 한경직 목사와 함께 대대적인 구호활동을 했고 이것은 상당한 성공을 거뒀으며 이 단체는 현대 세계적으로 가장 큰 구호단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6·25전쟁을 통해 한국 기독교는 당시 정부가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했다. 기독교복음선교 뿐만 아니라 교육, 의료, 복지, 문화 등에 걸쳐 각종 사업을 주도했다. 필자는 당시 한국 기독교가 한국사회를 위해 한 일은 유사 정부의 역할과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한국 기독교는 한국의 가장 큰 우방인 미국과 한국사회의 지도적인 정치가들과 함께 한국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도세력으로 성장했다. 이것은 개항기나 일제 강점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전국에는 수많은 교회가 생겼을 뿐만이 아니라 군대에는 군목, 경찰에는 경목, 학교에는 교목, 병원에는 원목 등이 있어 기독교의 전성시대가 오게 되었다.

6·25전쟁은 한국 근현대사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특별히 6·25전쟁을 통해 한반도의 분단이 더 고착화된 것은 가장 가슴 아픈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6·25전쟁을 돌이켜 볼 때 이것이 우리에게 부정적인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6·25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은 서방 자유세계에 편입되었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했고, 개인의 소유와 시장경제라는 자본주의 체제를 수용했고, 이런 가운데 기독교는 국민종교로서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가 여기에서 분명하게 확립된 것이다.

박명수

미래한국 자문위원·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보스턴대 신학 박사
전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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